2003.2 | [특집]
20대는 언제나 진보적이었다.
시대 흐름과 20대 인식의 변화
변희재
정치칼럼 사이트 seoprise.com 운영자(2003-04-18 16:59:48)
20대, 그리고 대학생, 80년대 거리의 그곳에 그들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군부독재 정권 시절 검은 것을 검다고 말하고 흰 것을 희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세대가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30대 넥타이 부대의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87년 대선은 패배로 끝났다.
80년말과 90년대 초에 '퀴즈아카데미라'는 프로가 있었다. 거리에 깃발을 들고 있어도 그 어떤 매체에서도 다뤄주지 않은 20대 대학생들이 방송 퀴즈 프로그램에서 대중들과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일반인들은 듣도 보지도 못한 난해한 시사상식을 그들은 단 3초 안에 맞추곤 했다.
80년대의 6월 항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군사정권이 이어진 시대에 그들은 사회의 또 다른 희망이었다. 시청자들은 그 어떠한 어려운 문제도 척척 풀어내는 그들이 시대의 주인공이 될 10년 후, 20년 후라면 최소한 무언가 더 나은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92년 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군정이 종식된 것이다. 80년대에 깃발을 들고 있던 20대, 90년대 초반의 문제를 해결하던 그들은 어느새 신세대들로 바뀌어 있었다. 20대는 드디어 사회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들어왔다. 신세대와 X세대를 무시하고선 텔레비전 시장에서든 광고시장에서든 상품시장에서든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소비대중사회의 영웅이 되었다.
"나는 나야", "아무도 날 규정할 수 없어", "난 원하는 것만 한다" 등으로 표현되는 주체성과 자아가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수많은 운동단체에서는 이 신세대의 정체를 밝히려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그 누구도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놓은 결론은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이념은 붕괴되고 개인의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애매한 추측이었다.
문민정부의 말기에 국민소득 1만달러로 상징되는 물질적 풍요가 깨져나갔다. IMF 환란 위기가 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권 내내 달러는 600원대로 떨어져 있었고, 외국 한번 나가보지 않은 20대 대학생이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은 세계화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경고 한번 없이 그대로 국민소득이 반토막 나버린 것이다.
거리엔 노숙자가 늘어났고, 40대 명퇴, 실직자들이 사회적 문제거리가 되었고, 이러한 경제위기는 사회적으로 가정파괴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또 다른 20대가 등장한다. 이른바 IMF 세대란다. 지금껏 물질적 풍요만 누려온 90년대 중반의 20대와 달리 97년의 20대는 경제적 궁핍을 경험하여 절제를 알고 소박한 문화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90년대 중반의 20대들이 97년에 갑자기 다들 30대가 되었단 말인가? 20대 내에서도 세대 차이가 생긴 걸까?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다. 경제위기가 서서히 가시고 벤처의 시대가 열렸다. 벤처의 시대가 열리면서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오직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만 볼 수 있었던 20대들이 인터넷상에 직접 나타났다. 아무리 언론매체에서 20대에 대해 떠들어도 그건 진실로 통하지 않았다. 인터넷만 접속하면 온갖 종류의 20대들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상 드러난 20대는 너무나 다양했다. 깃발을 들고 있던 80년대형의 20대는 노동운동 사이트에서 여전히 깃발을 들고 있었다. 퀴즈를 척척 맞추던 90년대 초반형 20대들은 언론고시 사이트에서 여전히 퀴즈를 풀고 있었다. "나는 나야"라고 외치던 소비지향적 20대들은 여전히 엔터테인먼트 사이트에서 놀고 있었다. IMF형 20대들도 IMF가 끝났어도 여전히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2002년이 되었다. 인터넷상에서 각자 놀던 20대가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깃발은 없었다. 오직 붉은 셔츠 한 장만 입으면 그만이었다. 누가 모이라고 강제하지 않았다. 이미 그간 갈고 닦은 핸드폰과 인터넷 활용기술을 이용해 각자 연락해 알아서들 모여들었다. 구호는 '대한민국 짜작짜작작'이었다. 이미 30대가 된 예전의 20대들도 같이 모였다. 조만간 20대가 될 10대도 같이 모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짜작작작작"을 외친 것 말고 그들이 한 일은 없었다. 월드컵 4강은 달성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에선 탈락했다. 히딩크는 떠났고, 홍명보와 황선홍은 은퇴했다. 축구열기는 다시 썰렁해졌다. 다만 그들은 승리의 맛을 알게 되었다.
월드컵 광장에 모여들었던 20대들 중 몇몇은 모임의 기술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방식은 같았다. 언론의 도움 없이 그들 스스로 핸드폰과 인터넷 채팅을 이용해 모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정치개혁이었다. 민주화 광장 그리고 월드컵 광장에도 있었던 30대의 몇몇도 결합해 있었다. 패배의 한을 가슴에 안고 있던 30대와 패배를 모르던 20대가 조그마한 정치적 공간에서 만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만의 정체성을 하나하나 확립해나갔던 존재였다. 그들은 소비지향적인 존재이긴 했지만 헛된 권위에 기대지는 않았다. 돈이 많이 벌리면 판검사보다도 연예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상명하복식의 학생회나 동창회 모임보다는 넷에서 자유롭게 만나는 번개 모임에 익숙해져 있었다. 언론에서 조작된 정보를 보면 인터넷에서 바로 확인하여 걸러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 어떤 시대의 20대들의 여러 가지 장점을 다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촛불 하나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들고 있다.
'세대'란 그 자체로 일정한 의미를 지향한다. 10대 하면 느껴지는 감성은 단지 그냥 물리적인 나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항, 풋풋함, 순수함 등등. 20대도 마찬가지이다. 80년대부터 우리들의 20대는 어떠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때로는 자발적이었고 때로는 외부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사회는 20대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20대를 체제에 순응하여 저항의식을 마비시키려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공부로 몰아붙이다가는 어느 순간 소비만능주의로 물들이고, 수가 틀리면 벤처로 거품을 넣어 대박의 꿈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20대가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21세기에 접어들며 너무나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게 되었다. 바로 핸드폰과 인터넷이다.
뉴욕대의 로시코프 교수가 정의한 미디어 바이러스라는 개념이 있다. 미디어를 익숙하게 다루는 세대는 미디어를 지배하는 세력의 손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자신의 메시지를 사회에 전파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20대는 최소한 이런 미디어 바이러스를 전파시킬 기술적 힘을 지니고 있다. 10대든 20대든 젊다는 것은 진보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들은 기성세대보다 더 많은 것을 더 빨리 배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진보적이었던 20대가 사회에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이제껏 그 진보성을 현실에 구체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없었을 뿐이다.
물론 20대의 역할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들이 아무리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사회에 보급한다 할지라도 사회적 주류는 엄연히 30대와 40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의 20대가 30대가 되어 2000년대의 변화를 이끌었듯이 20대에 갖춰진 정체성은 그 이후를 결정한다. 20대에 무언가 변화를 이끌었다는 기억 자체가 20대의 저항정신을 세대를 넘어 유지시킬 것이며, 그 이후에 나올 새로운 20대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렇게 정리된 궁극적인 20대의 역할은 결국 "20대는 어떠어떠 하다"라는 사회적인 여론몰이를 깨는 것이다. 왜냐하면 20대의 가치관이라면 30대에서도 올바를 것이며 10대 역시 이어받아야 할 가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03년의 20대가 갖는 역사적 진보성이란 올바른 것을 그들만의 열정과 익숙한 미디어 활용기술로 널리 보편적으로 알려나가는 것이 아닐까?
변희재/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젊은 논객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젊은 인터넷 시사웹진 대자보 편집장과 정치칼럼 사이트 seoprise.com 운영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