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 |
● 서평 ◎ 아프리카 문학
관리자(2007-12-24 19:08:14)
아프리카 작가 응구기의 탈식민주의론과 실험정신
탈식민주의 소설가, 기쿠유족의 아들 응구기
서부 아프리카의 치누아 아체베와 더불어 아프리카 문학의 탈식민화를 주도하는
작가로는 케냐의 응구기 와 씨옹오(Ngugi wa Thiong'o)를 들 수 있다. 1938년 케냐의
카미리투 지역에서 기쿠유(케냐의 한 부족)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응구기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해 케냐 민중들이 일으킨
마우마우(Mau Mau) 독립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한다.
실제로 응구기의 어머니는 남동생이 마우마우 유격단원들과 밀회를 한다는 혐의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기도 한다. 한편, 벙어리인 그의 이복형은 영국 치안경찰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하기도 한다. 응구기는 이 시절의
경험들이 그의 ‘초기 소설의 알심’임을 고백한 바 있다. 응구기의 본격적인
문학수업은 우간다에 있는 마케레레 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시작된다.
아프리카 문학의 탈식민화와 관련해 응구기의 문학적 여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그가 마케레레 대학에 입학해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읽었던 콘라드라던가 포스터 등 속의 영국 작가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초기 습작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로는 상기한 작가들의 기교를 기쿠유인 특유의 내러티브로
전유해 형식과 내용 면에서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소설을 써내기 시작하는 중기
단계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창작의 매개어로서 영어를 폐기하고 자신의 토착어인
기쿠유어로 소설 및 동화 그리고 희곡 등을 쓰기 시작하는 실험적 단계가 바로
마지막 단계에 속한다.
영미문학이라는 그릇에 담은 초기 소설들
응구기는 1964년 <울지 말아라, 아이야>라는 첫 소설을 상자하면서 문단에
등장한다. 이 소설은 마우마우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가는 와중에 서구식 학교에 다니면서 서구식 교육을 받는 한
식민지 아이의 정신적인 갈등을 그린 자전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응구기는
아프리카인의 비극이 근본적으로는 ‘토지’의 상실에 있음을 주목한다.
‘토지’는 응구기의 문학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주제이다. 청년 시절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강하게 경도된 바 있는 응구기는 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마우마우
운동의 본질도 케냐의 농민들이 조상신을 모시고 가족들을 부양할 땅을 상실한 데
있음을 지적한다. 응구기는 이 소설에서 ‘기쿠유와 뭄비’라는 창조신화를 동원해
‘땅의 회복’이 문제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1965년 응구기는 실제로는 <울지 말아라, 아이야>보다 먼저 탈고했지만, 출판은 일
년 늦게 이루어진 <샛강>이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샛강>은 호니아라 불리는 생명의
강을 두고 기독교도가 중심이 된 한 마을과 아프리카 전통신앙을 숭상하는 다른 마을
사이의 종교적이고 이념적인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응구기는 기독교
교육을 받은 와이야키라는 청년을 통해 기독교와 토착 종교, 다시 말해 근대와
전통간의 화해를 시도한다. “선교 학교에 가거라.” “가서 백인들의 온갖 지혜와
비밀을 배워 오너라.” “팡가(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나비를 잡을 수는 없지 않느냐?”
아버지의 이러한 뜻에 따라 선교학교에 다니게 된 와이야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갈등이 깊어진 두 마을을 화해시키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어이없이 그 갈등의
골에 빠지고 만다. 응구기는 기독교적인 가치에 일방적인 특권을 부여하는 식민지
체제하에서 근대와 전통은 상호 화해가 불가능한 대립쌍임을 분명히 한다.
서구 모더니즘을 아프리카의 확장된 리얼리즘으로
앞의 초기 두 소설들을 통해 형식과 내용 면에서 유럽 작가들의 그것과 미학적
변별점을 구축하는데 실패한 응구기는 아프리카인만의 독특한 내러티브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응구기는 이때부터 이른바 역작들을 생산해내기 시작한다. <밀알>이
그 중 하나다.
<밀알>은 1952년부터 1960년 계엄령이 공표된 한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다. 응구기는 이 소설에 여러 등장인물들을 등장시켜 각자의 시선으로 본 사건의
전말을 구술하게 한다. 한 사건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구술과 다양한 입장을 통해
다각적으로 교직되면서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숨겨진 사연들이 입체화된다.
응구기는 이 작품에서 콘라드가 즐겨 사용한 복수시점과 복수화자라는 장치를
아프리카 식으로 전유한다. 다시 말해 “유럽의 모더니즘을 아프리카의 확장된
리얼리즘으로 바꾸는 것이다.”
“유럽의 모더니즘을 아프리카의 확장된 리얼리즘으로 바꾸는” 시도는 <핏빛
꽃잎>이라는 작품에서도 계속된다. 이 작품은 응구기의 소설 중 최초로 독립 이후의
케냐를 다룬 것으로 신식민지 케냐에서 벌어지는 부패한 정권 및 자본과 기층
민중들의 싸움을 그린 것이다. 응구기는 이 작품을 통해 “케냐의 민중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이루어낸 독립”이 이후 부패한 엘리트들의 손아귀에 매몰되면서 “진정한
독립이 아닌 깃발만 펄럭이는 독립”이 되었다고 애석해한다.
영어를 버리고 기쿠유어로 글쓰기
응구기는 <핏빛 꽃잎>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어로 창작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다소 이념적인 이유로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의 매개’일 뿐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정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 집단의 언어를
잃는 것은 소통의 도구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존재론적 토대’를 잃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보다 방법론적인 이유로 그의 탈식민주의적인 글쓰기와 실천적으로
맞닿아 있다. 응구기는 그를 소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밀알>이나
<핏빛 꽃잎> 같은 소설들이 진정 그런 상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반문한다.
그는 실천적인 차원에서 이 소설들이 실존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소설들이 영어로 씌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의 소설들이 영어로 집필되어 많은 수의 서구 독자들을 사로잡긴 했지만,
정작 그가 소설 쓰기를 통해 헌정의 대상으로 삼았던 케냐의 기층 민중들은 언어적인
장벽 때문에 그 소설을 감상도 할 수 없었음을 깨닫는다.
응구기는 영어라는 창작의 매개어를 통해 나아가 서구적 근대의 부정적 유산을
발본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과연 서구의 근대란 무조건적 수용의 대상인지를
진중하게 심문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영어라는 이름으로 환기되는 서구의
근대가 기술적 타협내지는 조건부 조율의 대상은 될지언정 무조건적 몰입의 대상은
아님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다시 말해, 영어는 기쿠유어로 씌어진 자신의 작품을
대외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을 때 번역이라는 훌륭한 매개를 통해 기능적으로
사용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 생각은 응구기 뿐만 아니라 많은 아프리카
작가들에게 서구의 근대 혹은 근대성에 대한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준다.
이런 이유에서 응구기는 과감하게 영어로 창작하는 관행을 저버리고 자신의
토착어인 기쿠유어로 복귀하게 된다. <십자가 위의 악마>와 <마티가리>라는 소설을
비롯해 <결혼하고 싶을 때 결혼할래요>와 <어머니, 저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세요>
등의 희곡이 영어가 아닌 기쿠유어로 쓰인 대표적인 저작들이다.
기실 응구기의 모국어로의 회귀가 가장 빛을 발하는 장은 연극에서이다. 응구기는
아리스토텔레스류의 유럽 전통연극이 판을 치는 케냐 극장에서 영어를
몰아냄으로써 연극의 개념을 바꾸고, 춤과 노래를 가미한 아프리카 전통연극의
복권을 시도한다. 응구기에게 연극은 언어적인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소설에 비해 연극은 현장성이 강조되는 장르다. 현장성이
강조되다보니 언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성을 갖게 된다. 응구기는 아프리카
연극을 현장의 언어, 즉 토착어로 공연함으로써 연극 자체의 밀도 및 완성도를
높임은 물론 관객 일반들로부터도 생동감 있는 유기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응구기와 한국문학의 인연
기쿠유어로 쓴 최초의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는 응구기가 필화사건으로 인해
수형생활을 하면서 간수의 눈을 피해 화장지에 기록한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신식민지 케냐의 부패상을 다룬 것으로 알레고리 기법을 쓰고 있다. 응구기는 이
작품에서 ‘악마의 잔치’에 참가해 최고의 도적을 가리는 자리에 일곱 명의 도적들을
우의적으로 등장시켜 케냐 독립 정부의 고위 공무원을 비롯한 정치인, 은행가,
사업가 등이 얼마나 교묘한 방법으로 민중들을 사취하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이 작품은 한국문학과 관련해서도 주목을 요한다. 그 이유는 응구기가 이 작품을
집필할 때 김지하의 <오적>과 <비어>를 그 바탕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는
응구기가 <정신의 탈식민화>에서 고백한 바이기도 하다.
기쿠유어로 쓰였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정작 케냐에서는 판금조치를 당한
<마티가리>라는 소설은 1982년 응구기가 런던에 체류할 때 썼던 작품이다.
응구기는 당시 귀국하면 구금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의도하지 않은
반영구적인 망명의 길에 나선다. <마티가리>는 응구기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수법을 동원해 쓴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마우마우 독립운동시 산속으로
들어갔던 투사 마티가리가 독립 된 지 한참 후에 세속으로 돌아와서 독립 전이나
독립 후나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판단하에 다시 새로운 투쟁을 결심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응구기는 <마티가리>를 통해 케냐의 독립이 ‘깃발만의
독립’임을 새삼 확인한다.
<마티가리>는 흥미로운 일화를 하나 가지고 있다. <마티가리>가 런던에서 출판된 후,
‘마티가리’라는 사람의 이름이 신식민지 치하에서 고통 받는 케냐인들의 입에
일종의 구세주 혹은 혁명가의 대리물로 수없이 회자되었다. 그러자 케냐 정부에서는
급기야 혁명을 운운하며 기층 민중들을 동원해서 정부의 전복을 꾀하려는
반정부주의자 마티가리를 현상금을 내걸고 수소문을 했는데 알고 보니 마티가리는
실제로 현존하는 인물이 아니고 소설 속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근래에 이루어지고 있는 기쿠유어 소설과 희곡 쓰기를 통해서 응구기가 실천하고
있는 ‘모국어로 창작하기’라는 신념은 표면적으로는 영어라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아프리카 문학내지는 문화운동이 현실적 추동력을 갖출 수 있을까라는
실험정신의 표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아프리카 문학 혹은
문화판에서 전일한 권력으로 삼투되어 있는 유럽의 근대(성) 혹은 근대정신에 대한
강력한 심문내지는 도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응구기의 성공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 3세계 내에서 서구 근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와 관련해
발전적인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이석호/ 1996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서 아체베에 관한 논문으로 첫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아프리카 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요량으로 남아공의
케이프타운대학교로 건너가 2002년 여름 응구기에 관한 논문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쓴 글로는 <민족문학과 근대성>, <영어공용화론에 부치는 몇
가지 단상>, <소잉카 연극의 탈주와 상상>, <남아공의 탈식민주의 작가 루이스
응코시와의 대담>이 있고, 역서로는 응구기의 <탈식민주의와 아프리카 문학>,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아체베의 <제 3세계 문학과 식민주의 비평>,
세제르의 <귀향수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