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 |
● 문화시평 ◎ 김준의 빨간피터
관리자(2007-12-24 19:07:41)
‘인간이 된 원숭이’에 대한 보고서
비오는 날 오페라 아트홀. 6층 소극장은 높은 천정과 널따란 객석으로 시원스러웠다.
빨간조명을 받은 철창하나 비스듬히 놓여있고, 교탁하나, 먼발치에 옷걸이용 의자.
공연이 시작되자 바깥조명을 받으며 뒤뚱거리면서 멋지게 차려입은 원숭이가
소리없이 서류가방을 들고 걸어온다. 김준의 빨간피터다. 장식이 없는 음향과 간소한
소품 등 모든 것이 배우을 위해 준비된 듯 했다. 시종일관 공연은 열띤 응원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땀에 흠뻑 젖어 무대를 내려갈 때까지 관객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연기인생 20년, 불혹을 맞은 나이의 배우, 모노드라마, 며칠 공연하면서
건물광고화면에까지 홍보를 하고 지인을 찾아다니며 공연관람을 요청하는 세세한
기획까지, 배우가 호강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라는 짤막한 단편소설을 무대화 한 이작품은
여러 가지 의미로 전해져 왔다. 아프리카 황금해안에서 동물 포획자들에 의해 잡혀온
원숭이가 자신이 빠져나갈 출구가 없음을 깨닫고 인간화되어 쇼꾼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원숭이 자신의 인간화 과정을 학술원에 보고하는 형태로 꾸며진 이 작품은 주인공인
원숭이가 인간의 겉모습만 보고 자기기만에 휩싸여 살면서도 자기실현을
이루었다고 의기양양, 인간들이 소망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닌 거짓자유이며
오히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원숭이시절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우물안
개구리의 시각으로 세상인간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풍자한 이야기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원숭이의 인간화를 통해 이성과 본성에 갈등하는 경계인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봐야할까? 배우의 포스에 가려 작품의 내밀함을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원숭이가 인간화되는 과정은 악수, 침뱉기, 술마시기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인간의 진면목이 배제된 학습은 인간사회를 출구 없는 사회로 잘못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연을 보면서 뜬금없는 생각도 하였다. 정말 원숭이를 훈련시키면 인간처럼 될까?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무대위에서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원숭이를
보면서 태초의 말이 사회 속에서 정보와 지식의 도구로 변하면서 나중엔 자신을
포장하고 기만적으로 변질되고 있는 모습이 느껴졌다. 동물의 본성을 가지고
살기에는 출구가 없는 세상이지만 술을 마시며 꿈틀대는 본성을 느낀다고 할 때는
잠깐 술 생각이 나기도 하여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작품의 후반부에, 집에서 기다리는 원숭이 애인을 생각하며, 자기의 애인도 자신처럼
인간화 교육을 받고 있지만 가끔 교육과정에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다고 슬프게
말한다.
원숭이의 인간화는 경쟁 속 도시의 메타포로 여겨졌다. ‘도시에 살더니 사람이
달라졌어’, ‘돈 벌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어?, ‘어차피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애국심이고 국적이고 필요없다. 무조건 팔고
봐야한다.’ 순응하고 적응하는 게 빨간 피터가 살아날 수 있었던 방법이었고, 그런
모습은 사회라는 우리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슬픈 자화상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것들이 지금 이시기에 ‘빨간 피터’를 공연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한다는 이유로 루카치로부터 ‘자본주의의 소외에 대한
공모자’로 비난을 받기까지한 카프카의 작품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김준의
신들린 연기를 보면 관객과의 따뜻한 교감을 만들 줄 아는 배우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후배에 대한 애정이나 연극에 대한 사랑은 그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한다. 자신의 연기적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극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배우. 인간 김준의 배우로 거듭나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관객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공연을 보고 뒷풀이 자리에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 했다. 오페라 아트홀은 공연이
끝나면 자리를 옮길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한잔 걸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기도
한다. ‘연기가 조용해졌어’, ‘눈빛이 철학자 같애’, ‘저렇게 김준을 좋아하는 관객들이
많았나?’, ‘원숭이가 달변의 인간을 흉내냈듯이 인간의 관습적인 몸짓도 제대로
보여줬으면’, ‘객석을 왔다갔다 하는 것 때문에 내면적이어야 할 작품의 방향이 좀
틀어진 것 아냐?’ 앞으로 장기공연을 계획하고 있다는데 여러가지로 가능성을
확인한 이번 공연이 추송웅이나 장두이의 ‘빨간피터’ 보다 롱런하길 기대해본다.
조용히 철장 안에서 사람을 응시하는 원숭이를 본적이 있는가? 「동물원의
탄생」에서 니켈 로스펠스는 ‘동물이 우리와 마주보며 우리와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해 무언가를 아는 듯 할 때만큼 우리의 시각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배우가 서있는 무대는 어찌보면 원숭이가 갇혀 있는 우리안일 수 있다.
사람들은 동물들과 시선을 마주치기 위하여 동물원을 찾고 흥분한다고 한다.
관객들은 객석에 앉아 배우의 거대한 눈과 마주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배우의
눈빛에서 길을 찾기를 희망한다.
홍석찬/ 전북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입단, 연기를 시작했다. ‘정으래비’, ‘상봉’,
‘서울로 가는 전봉준’ 등 수많은 연극에 출연했으며, ‘밤비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대대손손’, ‘청부’ 등을 연출했다. 현재는 창작극회 대표와
전주연극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남원국악정보고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