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 |
● 신귀백 영화엿보기 - 두고 온 시절 ... 아웃 오브 아프리카
관리자(2007-12-24 19:06:02)
추석 텔레비전은 역시 성룡 영화다. 왜? 고스톱 치다 광 팔며 봐도 되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 성룡 없는 추석 연휴 마지막 날, EBS에서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하고
있었다. 싱글의 날들에 아프리카에 두고 온 청춘들이 떠올랐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그 무슨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티비 앞에 세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 벌써
20년 세월이 흘렀다니.
내가 아프리카에 대해 아는 것. 가난과 세렝게티, 킬리만자로를 노래한 가수와 표범
정도.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진출한 제국주의자들이 잘 닦여진 거대한
정원에서 벌이는 폴로 경기, 전쟁에 이겼다고 행진하는 식민지 인도인들, 모순이다.
원주민을 가르치려는 행위들에는 호혜 아닌 시혜라는 비판이 있는 줄 안다. <호텔
르완다>나 <블랙 호크 다운>이야기가 진짜 아픈 아프리카고, 드넓은 평원을 가르는
기차나 수평선 너머 사자 머리 위로 지는 해의 사진 속 아프리카가 가짜라는 것을
나도 안다. 부디 이 백인 여자의 일과 사랑을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의 거짓
자아라고 물리치지 말기를, 너무 야박하게 꾸짖지 마시길.
메이지 않는 남자
1913년. 독일 옆 작은 나라 덴마크에 살던 혈기 넘치는 부잣집 상속녀 카렌(Karen
Blixen, 메릴 스트립 역)은 삶에 재미가 하나도 없다. 하여, 그녀는 케냐에 살고 있던
스웨덴 귀족과 결혼하기 위해 아프리카행 배를 탄다. 충동 그 자체. 수에즈를 거쳐
나이로비에 도착한 뒤 기차에 오른 그녀의 고풍스런 주름 많은 A 라인 드레스는
매혹적이다. 호기심에 찬 여인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는다. 열사의 햇빛을 차단하는
리본 달린 브림이 넓은 모자를 쓴 여인은 아름답다.
카렌이 아프리카로 떠난 이유를 나는 <바베트의 만찬>에 나온 덴마크의 금욕적이고
우울한 동네 분위기 탓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주체할 수 없는 자신감과 도전 정신을
가진 부잣집 여식에게 작열하는 태양, 상아, 약육강식의 질서를 보여주는 아프리카는
창조적이고 신비스런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열사의 땅이 그녀에게 준 것은
사자와 사자를 쫓는 남자가 주는 상처와 치욕 그리고 한 줌의 빛나는 사랑.
기차가 짜보 국립공원에 이를 때, 한 남자가 기다란 상아를 기차에 싣는다. 강한
충동으로 뭉쳐진 이 남자는 그녀의 운명의 지침을 바꿔놓는다. 많은 책과 세 자루의
총 그리고 축음기와 모차르트 외에 소유와는 거리가 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남자. 카렌과 <화양연화>를 찍을 남자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다. 긴 코 둥근
다크 서클이 결코 미인이라 하기엔 좀 그렇지만 사랑스러움이 넘치는 여자, 북구의
금발에 호기심 가득 찬 푸른 눈을 가진 그녀는 찬바람에 언 듯한 열정을 간직한 빨간
볼을 가지고 있다. 정말 많은 옷을 입고 나타나는 그녀. 블라우스를 입으면 정숙하게
보이고 플레어스커트 차림으로 시의 운율을 맞추면 지혜가 드러나며 사파리를
입으면 용기와 독립심이 넘치는 듯.
나이로비에 도착해 한 시간 만에 결혼식을 올린 남편 브로어 남작은 사냥과 길
떠남에 강한 남자. 책과 신문이 궁금하지 않은 이 남자 야비하긴 해도 가면을 쓰진
않는다. 그녀의 돈과 결혼한 이 무심한 남자는, “당신은 나의 귀족 칭호를 산 것이지
나를 산 게 아니야” 라고 말한다. 일찌감치 사랑에 관심을 접은 그녀는 일찍이 남이
시도하지 않은 커피 농장에 몰두한다. 단지 남자들이 좋아하는 방식에 순응하지 않는
이 금덩어리를 볼 줄 모르는 사냥꾼은 부인의 재능과 현명함을 못 견딘다. 결국
이혼을 하고 만다.
아프리카에서 일과 사랑은 그녀에게 자아 발견과 작가로서의 경험의 소중한 시간들.
학교를 세우고, 글을 쓰고, 커피를 생산하고, 사자에 물릴 뻔한 순간에도 침착을 잃지
않는, 홍수에도 불에도 흔들리지 않는 여자지만 그녀 역시 사랑하는 남자의 옷에
단추를 달려 한다. 자유와 사랑 두 가지를 다 갈구하는 이 복합적 성격의 여자 앞에
데니스는 그것을 제지한다. 그리고 충고한다. 우리는 이곳의 주인이 아니라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뿐이라고. 사랑은 쓸 데 없는 자존심을 버리게 하는 것. 이제 그녀는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나 평범한 여자로 한 남자를 붙들고 싶은 마음, 매독에 대한 치료 등 솔직한
부분은 그녀가 충동에 빠진 부잣집 딸래미에서 한 여성으로 성숙해 가는 의미 있는
장면들.
두고 온 낙원
갈구하되 구걸하지 말 것. 카렌이나 데니스, 다만 사랑의 때를 기다릴 뿐(사실
그랬어야 했다). 뜨거운 태양이 식자, 별이 보이는 초원에 불을 피우고 깨끗한
식탁보를 차리고 축음기로 모차르트를 들려주는 남자. 이 남자, 이 때 흐르던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A장조 K622 아다지오처럼 맘에 든다. 카렌의 머리를
감겨주는 데니스를 보며 저 옛날, 나에게도 언제 저런 일이 있기를 바랐다. 내가
여자였다면, 복엽기를 태워주는 남자가 있다면, 어찌 빠지지 않겠는가. “당신에게는
당신 자유만 중요해?” 라고 묻는 카렌에게 그는 “결혼이 뭘 바꿔주지?”라고 되묻는다.
데니스! 그는 재치있고 쾌활하고 이기적이고 개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사랑보다 자유에 헌신적이었던 남자는 금요일에 돌아오겠다며 하늘을 가르고
복엽기를 타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는다. 카렌이 관계한 두 남자 다 자기 소외가
습관이 되어버린 남자들. 남자는 동기를 위해 떠나지만 여자는 외로움과 싸운다던가.
사랑은 불완전하고, 성취감의 상징이었던 커피 농장은 불에 타버린다. 그 고통의
정점에는 데니스의 몸을 실은 몸바사로 향하던 복엽기의 추락이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덴마크로 돌아간다. 덴마크에 기다리는 다음 생은 기록을 남기는 것.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아에 대한 명확한 발견이자 실천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녀는 덴마크에서 아이작 디네센이란 이름의 작가로 변신해서 많을 작품을
집필했으나 생전엔 그리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고. 마침내 그녀가 죽고 나서 미국
영화사가 만든 카렌의 이야기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고 전세계에 알려진다.
품격 있는 대중 영화
1985년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비롯 7개 부문을 수상. 더 이상 젊을 수 없던
로버트 레드포드와 절정의 날들을 구가하던 메릴 스트립의 연기, 완벽한 음악과 연출
그리고 시적인 그림을 만든 훌륭한 촬영은 나무랄 데 없지만 20세기 초반 서양 여자
생각의 한계는 마가레트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별로 다를 게 별로 없다.
원작에 충실한 감독 시드니 폴락의 세계는 후일 보여준 <사브리나> <랜덤 하트>
<투씨> <인터프리터> 등 깊음이나 넓음에서 사실 모두 이 영화만 못하다.
가보지 못했지만 나이로비 시내에서 약 20분간 응공 힐을 향하여 달리면, 카렌이란
이름의 숲으로 우거진 마을이 나온단다. 그녀가 살던 집은 이 영화로 인해서
박물관이 되어 있다고. 고서와 뻐꾸기시계도 있단다. 이 영화, 정치적 올바름은
부족하지만 드라마로서 품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덴마크 감독 라스 폰 트리에 같은
선수들의 도그마적 입장은 이해할 만한 가치지만 영화는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것,
우리들에게 저 옛날 두고 온 아프리카가 있다면 이 정도는 좀 봐주시라고, 끝으로
같은 작가가 쓴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영화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