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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 |
● 이흥재의 마을 이야기 - 새만금의 한 가운데 서있는 심포 ... 김제시 진봉면 심포마을
관리자(2007-12-24 19:04:54)
심포는 바다를 향해서, 좌측에는 동진강이 우측에는 만경강이 흘러 들어오는 절묘한 위치에 있다. 흔히 호남평야라 할 때, 주로 김제 만경을 중심으로 한 평야를 말하고, 김제 만경 중에서도 지금의 진봉, 광활 일대의 평야를 일컫는다. 10월 초순, 벽골제를 중심으로 지평선 축제가 열릴 때면, 죽산에서 광활 - 진봉 - 심포 일대는 가을의 전령사인 코스모스 길로 장관을 이루고, 징게맹게 평야에 화환을 씌운 듯 아름답다.   신천강씨들의 동족마을 심포는 신천강씨(信川康氏) 집성촌이다. 노인회 회원 56명중 32명이 신천 강씨이다 조선 태조때 강원기(康元紀)공이 심포에 온 후에 집성촌이 이루어졌다. 강원기는 조선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 康씨의 사촌오빠였다. 신덕왕후 康씨의 간청으로 도승지에 출사했으나, 1396년 강씨가 죽고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홀연히 남하하여 심포마을에 정착을 했다. 낙향 후 진봉산에 서해 바다를 향해 영락와(永樂窩)라는 오막살이를 짓고 수양을 하며, 찾아온 후진들을 교육 하며 일생을 마치었다.   강원기가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몰두하고 있을 때, 선생의 제자였던 이지로(李芝老)가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 뒤 옛 스승을 찾아온 관찰사를 통해 강원기는 이 지방의 세가지 폐단을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첫째, 진봉산 맨끝 길곶(吉串)마을에 있던 봉수대를 계화도로 옮기고, 둘째, 공마(貢馬)라하여 매년 300필의 말을 길러서 나라에 바쳤는데, 말 기르는 곳을 제주도로 옮겨갔고, 셋째, 매년 6천편의 숫돌을 만들어 나라에 바쳤는데 그 숫돌 만드는 일을 태인으로 옮겨가게 했다.   그래서 지방민들은 봉호당 강원기 선생의 송덕을 기리기 위해 두곡서원(杜谷書院)을 세워 포은 정몽주를 함께 배향하여 모셨다. 그뒤 강씨 집안에서 참봉 강덕순(康德淳)같은 효자가 나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간척사업으로 어업에서 농업으로   옛날 심포사람들의 생업은 주로 바다일이었다. 진봉산을 중심으로 야트막한 구릉 밑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산언덕에는 지금도 볼 수 있는 밭이 있었다. 수리시설이 마련되지 않아서 논은 매우 적었고 그나마 있는 논도 모두 천수답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본인들의 간척사업으로 농토가 생겨나고 운암저수지에서 끌어온 물이 이곳에 공급되면서부터 심포 마을에서는 본격적인 논농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인 다목과 아베의 방조제 축조로 농토가 늘어나자 이 지역 사람들도 일본인이 소유한 개간지를 소작 받아서 농사를 지었다. 이 당시 농부들의 애환을 임영춘은 ‘갯돌’이라는 소설에서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게 경작하던 땅을 해방 이후 유상으로 분배받아서 자신 소유의 땅을 보유하게 되었다. 인공적인 간척사업으로 마을의 주요 생업 자체가 바뀌어 버린 경우다. 심포는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매우 오래된 마을이었으나, 일본인들의 인공적인 개발로 인해서 주요 생업이 바뀐 지역으로, 지금으로 치면 신개발 지역이었다. 심포에 사는 사람들 중 일부는 아무런 재산도 없이 그냥 심포에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특별한 자본이나 기술이 필요없는 조개채취업에 종사해서 재산을 모았다. 새만금사업으로 현재는 조개의 채취량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새만금 물막이 공사가 끝나기 전인 작년만 해도 잘 잡는 사람은 1인당 100킬로 이상을 캐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새만금사업으로 1인당 잘 잡아야 10킬로 정도이다. 새만금사업으로 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만경강 어귀 곳곳에 뻘이 존재해서 마을 사람들은 물이 빠지면 걸어 들어가서 조개를 켰다. 현재는 물이 빠져봐야 뻘이 들어나는 곳이 군산공항 근처와 민가섬 인근에 불과하다. 그래서 배를 타고 군산공항 근처까지 가서 조개를 캐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제는 바다가 아닌 육지 깊숙이 박힌, 내륙에 가까운 농촌지역이 되는 심포. 새만금사업으로 늘어난 토지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경작하게 될까?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좌절이 되었던 새만금사업은 아마도 또 다른 새로운 기회의 시험장이 될 것이다. 역사의 흐름이 그러했듯이 인공적으로 일어난 지리적인 변화가 사회의 구성을 바꿔 버리는 일이 또 일어나기 직전이다.   심포마을은 새만금이 완공되면 어떤 모습일까?   망해사(望海寺)가 아닌 망강사(望江寺)로 해야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이후 신포앞바다는 바닷물 보다는 만경강 동진강 물이 주를 이루는 담수호 형태이다. 그래서 이제는 바다를 바라보던 망해(望海)사가 강을 바라보는 망강(望江)사가 되었다. 망해사는 백제 의자왕 2년(642)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다고 하며, 서해 낙조를 즐긴다는 뜻의 낙서전(樂西殿) 건물은 비록 소박하지만 전망이나 전각의 이름은 시적이다. 이곳 망해사에 부설거사(浮雪居士) 설화가 전해온다. 김제 성덕에 살던 구무원(具無寃)이란 사람이 늦게 딸 하나를 낳았다. 이름이 묘화(妙花)인데, 말 못하는 벙어리였다. 자랄수록 얼굴은 백옥같고, 자태는 연꽃 같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동네 총각들이 앞 다투어 청혼했으나 묘화는 모두 거절했다. 어느 봄날 스님 세분이 탁발을 하러 이 마을에 들렸을 때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설, 영조, 영희 세 분 스님이었다. 해가 저물어도 비는 개지 않아 부득이 이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날 밤 묘화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묘화가 말하기를 “부설스님과 묘화는 전생에 인연이 있었고 금생에도 인연이 있으니 인과를 따르는게 불법이다” 하므로, 부설스님은 두 스님과 헤어져 묘화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부설거사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이 등운(登雲)이요 딸은 월명(月明)이었다. 남매가 장성하자 거사는 병을 자칭하여 서해 백강변에 초막을 짓고 이름을 망해(望海)라 했다. 그곳이 지금의 망해사이다. 나중에 아들이 머물렀던 곳이 등운암(登雲庵)이고 딸이 수도했던 곳이 내변산 월명암(月明庵)이다. 망해사에서 공부를 하던 중 옛날 도반인 영희, 영조 스님이 찾아와 희롱적인 태도를 보이자, 부설거사는 도력을 시험해 보자고 제안을 했다. 낙수병 3개를 처마에 매달고, 각자 지팡이로 일시에 내리쳤다. 2개의 병은 깨어지면서 물이 쏟아졌으나, 부설거사가 때린 병은 깨어졌으나 물은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 거사는 두 스님에게 말하길 “유신이 수생멸 천류자는 사병지파쇄요 진성이 본영명상주자는 여수지현공이라” (幼身 隨生滅 遷流者 似甁之破碎 眞性 本靈明常住者 如水之懸空) 생사를 따라 윤회(輪回) 하는 범부(凡夫)는 병이 깨지면서 쏟아진 것과 같고, 진성이 본래 영명하여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병이 깨어져도 물은 공중에 매달린 것과 같다. 비록 두 남매를 둔 부설은 거사였지만, 평생 수도만한 두 스님보다 더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 오늘도 부설거사는 망해사 낙서전에서 새만금으로 넘어가는 낙조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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