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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 |
● 이종민의 음악편지 - 돌아오기 위한 떠남 ... 황의종의 ‘아리랑 변주곡’
관리자(2007-12-24 19:04:12)
돌아오기 위한 떠남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은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시킨다. 강한 자는 그 사랑을 모든 장소에 바치고자 한다.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린다… 현명한 사람은 한 발짝, 한 발짝 고향에 이별을 고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끊임없는 정진, 부단한 노력을 강조하는, ‘공부’(Didascalicon)에 관한 12세기 프랑스 철학자 위그(Hugues de Saint Victor)의 말입니다. 자기가 이미 이룬 것에 만족하지 말고 중단 없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탐구하라는 스콜라 철인다운 충고의 말입니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귀성객이 현저하게 줄어가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며 엉뚱하게 이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이제 이 땅에도 ‘강인한 자’ 혹은 ‘완벽한 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인가? 나 혼자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로 남아 고향 주변을 맴돌며 ‘매실타령’만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이 들면서 오히려 고향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더 다가서고 있으니 ‘현명한 사람’과는 영 거리가 멀어진 것이 아닌가?   저라고 ‘강인한 자’처럼 보이던 때가 없었으리요? 그때만 해도 “언제 서울로 올라가나(오나)?”라는 질문을 자주 받곤 했었지요. “오라는 이 없는데 어딜 가?” 속으로는 그러면서도 “모교에서 부르면 갈까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을 거야!” 호기를 부리기도 했었습니다.   그 호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을까? 지역을 위한 여러 가지 일을 꾸미기 시작한 게. 지역은 변방이 아니라 변혁의 터전이다. 약한 고리가 혁신(명)의 진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모아 모임을 꾸리기도 했습니다. 호남사회연구회, 민주화교수협의회, 문화저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등.   변혁의 텃밭답게 당시 많은 이들이 뜻을 같이하며 서로를 북돋아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 “세계 속 특정한 한 장소”에 자신의 사랑을 고정시키기에는 너무 강한 사람들이었나 봅니다. 하나 둘 새로운 둥지를 향해 이 지역을 떠나갔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타령으로 심술을 부려봤지만 그들은 새로운 터에서 발병은커녕 더 눈부신 활동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속 터지고 의기소침하게!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여우의 신포도’ 타령! 이때부터였을 것입니다. 서울 모임이 심드렁해지고 서울나들이가 힘겹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 고향 텃밭에 매실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 무렵부터지? ‘홀로 사는 즐거움’을 되뇌며 홀로 지리산 찾아 나선 것도 이런 허한 마음 달래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여우 신포도’ 타령이 정작 타령으로만 끝나지 않더라는 점입니다. 진정 이 지역에서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 너무 건방진 일이겠지만 저 자신과 이 지역을 더 잘 알게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 동지들의 떠남을 통해 그 소중함을 깨닫고 진정한 ‘함께’를 위해서 참된 ‘홀로서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심기 시작한 매실나무가 이제는 형제들이나 귀한 벗님네들 새로운 만남의 구실이 되어주고 있다는 점도 혼자 쾌재를 부르게 하는 대목입니다.   떠남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떠남은 구태를 벗어던지는 것이요 서리처럼 우리들 생명의 기운을 옥죄는 낡은 습관의 굴레를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인습적 이념이나 사고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리적 이동이 꼭 전제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도 원효스님은 드넓은 화엄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습니다. 좁은 도산(陶山)에 머무르면서도 퇴계선생은 일본 사람들까지 감동시킨 도학의 드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떠남은 돌아오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말한 대로 ‘단절’(breach)이 아니라 외연의 ‘확장’(expansion)이요 거듭남의 수단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올곧게 세우기 위해 시도하는 자기부정인 셈입니다. 소아(小我)의 울타리를 걷어내야 우주적 대아(大我)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 너무 멀리 벗어나면 주인의 부름을 듣지 못하는 사냥매의 꼴이 되기 십상입니다. 시인 예이츠는 중심을 잃어버리고 와해되어가는 현대사회를 꼭 그렇게 비유한 바 있습니다.명절에 되돌아갈 고향이 없는 것이 혹 공동체의 와해, 개인주의의 만연에 휩쓸린 편의적 고향 버리기는 아닌지 되돌아볼 일입니다.     발병나지 않고 오히려 저를 크게 확장시켜주고 있는 떠나간 ‘님’들을 생각하며 아리랑 변주곡 하나 올립니다. 활발한 작곡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는 부산대학교 황의종 교수가 작곡한 것입니다. 익숙한 아리랑 가락을 18현과 25현 가야금 2중주로 변주한 것으로 광주가야금연주단의 강혜경(18현), 조선옥(25현)이 연주한 것입니다. 전남대학교 성애순 교수가 이끌고 있는 광주가야금연주단의 네 번째 앨범 [민요이야기]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화려한 화성과 풍부한 음향으로 개량가야금의 폭넓은 연주영역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곡으로 새로운 연주단을 꿈꾸고 있는 제 딸아이도 매우 좋아하는 레퍼토리랍니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제가 산행 즐길 때 되뇌던 말입니다. 이 곡 들으시며 되돌아갈 마음의 고향, 그 존재의 제자리가 어디쯤일까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아 결국 가을이네요! 이종민ㅣ전북대 교수·전주전통문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장 ※ http://e450.chonbuk.ac.kr/~leecm로 접속하시면, 그동안의 음악편지와 음악을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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