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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 |
● 정현숙의 잘 사는 이야기 - 개
관리자(2007-12-24 19:01:40)
우리 집에는 지금 흰 진돗개 두 마리가 있다. 별이라고 부르는 큰 녀석은 암컷이고 6개월이 채 안 된 어린 녀석은 수컷이다. 천둥벌거숭이같이 사람만 보면 뛰어오르고 촐삭거리던 별이는 어느 날 삼촌이 방금 젖을 뗀 번개를 데려온 뒤부터 엄청 달라졌다.   첫날, 멀찌감치서 빙빙 돌다 번개를 우리 손에서 떼어놓는 순간 순식간에 덤벼 두 차례나 등짝을 물어 번개의 혼을 빼놓더니 그 다음부터는 언제 그랬나 싶게 사이좋게 잘 놀았다. 놀아줄 뿐 아니라 잘 돌봐줬다. 신참녀석의 군기를 확실하게 잡은 것일 뿐 그동안 외로웠던 별이는 자기 덩치 절반도 안 되는 번개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면서 엉켜 놀았다. 그리고 이젠 손님이 와도 매달리려 하거나 뛰어오르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밥을 주면 번개가 다 먹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맛있는 돼지갈비 같은 것을 줘도 별이는 번개가 다 먹고 물러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뿐 아니었다. 혹 우리가 지나다니다가 번개를 밟든가 부딪히기라도 할라치면 별이는 얼른 달려와서 번개를 달래주었다. 개들의 서열은 주인이 예뻐하는 순서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랬을까? 아무튼 별이는 한동안 의젓하고 착하게 번개의 뒷전에서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밖에서 돌아와 뭔가를 주는데 별이가 번개를 왕 짖어 쫓아내고 자기가 냉큼 먼저 먹었다. 이제 다 자랐으니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처음에 어리다고 예뻐하던 우리가 무심해진 걸 알고 저나내나 같다고 생각한 것일까. 지금은 서로 다투어서 아예 나눠서 줘야 조용히 넘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자기 자식도 아닌 번개에게 먹을 걸 양보하고 뒤에 서서 기다리던 별이의 모습은 개라고 꼭 먹을 것 앞에서 이성을 잃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닭 널찍한 우리 집 골짜기를 보고 여기서 돈 벌려면 닭을 키워야겠다고 말한 분들이 가끔 있지만 우리는 닭을 키우지 않는다. 몇 번 키우려고 시도한 적은 있지만 그건 서너 마리, 많아야 열 마리 미만의 수였고, 그 작은 수마저 제대로 돌보지 못해 족제빈지 고양인지의 밥으로 최후를 맞게 해 버렸다. 이 산중에서 닭을 키우려면 쥐와 고양이, 족제비, 너구리, 매에 이르기까지, 어느 동물이 공격해 와도 안전하도록 네 벽은 물론 지붕과 바닥까지 완벽해야 한다는 걸 알 리 없는 우리가 딴에는 한다고 준비해도 어느 곳엔가는 꼭 허점이 있어 밤이 지나면 닭은 사라지거나 죽어 있거나 했다.   맨 처음 우리가 닭을 키운 것은 일남이네가 잡아 먹으라고 자루에 넣어 갖다 준 수탉 두 마리였다. 채식을 하던 우리가 그 닭을 잡아먹을 리는 만무하고 예정에 없이 집도 없는 산에다 그 두 마리를 풀어 뒀다. 그리고 암탉이 없어서 되겠냐고 또 누군가가 암탉을 한 마리 보내 와서 염소 우리만 있는 산에 닭 세 마리를 데려다 놓고 갈 때마다 모이를 던져 주었다. 겨울이라 그저 잠깐씩 머물다 내려왔는데, 어느 날 눈이 하얗게 내린 산에서 해거름까지 있다가 닭들이 어떻게 밤을 지내는지를 보게 되었다. 염소집이 거기 있으니 염소들이랑 같이 지내겠지 정도 생각했을 뿐 닭들이 보내야 했던 산짐승 득시글거리는 밤에 대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나는 갑자기 가슴이 멍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수탉 한 마리가 1미터 남짓한 뽕나무 가지를 향해 끊임없이 뛰어오르고 있었다. 몇 번이나 했을까 내가 눈여겨 본 뒤 서너 번을 더 시도하고 마침내 가지에 뛰어오르는 데 성공한 수탉은 그제서야 날개를 접었다. 수탉의 안전한 잠자리는 우거진 뽕나무 가지 중 알맞게 낮은 그곳이었다. 다른 녀석은 또 다른 가지에 그 역시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암탉은 창고로 쓰던 비닐하우스의 미끄러운 지붕을 어렵게 올라가 앉았다. 그때의 미안함이란……. 후에 연못 옆에 집을 지었다가 다시 널찍한 염소 울타리 안에 넣어 줬는데, 둥지를 만들어 놔도 암탉은 끝내 자기만 아는 장소에 알을 낳았고, 나중에 보니 조금 오목한 곳에 감나무잎 소복한 데 달걀이 일고여덟개 있었다. 우째 이런 곳에 싶었지만 어미가 택한 곳이라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뒀더니 열심히 가서 품는 눈치였다. 그런데 한 며칠 비가 내려서인지 나중에 깨어난 병아리는 딱 한 마리였다. 수탉 한 마리, 어미닭, 병아리 이렇게 세 식구는 정말 사이좋게 살았다. 모이를 주러 가 보면 바스락 소리만 나도 어미는 병아리를 풀 속에 숨겼다. 안전하게 숨겨놓고서야 우리 있는 곳으로 나왔다. 그리고 모이를 흩어주면 수탉은 꼭 가족을 불렀다. 단연코, 단연코 자기 먼저 먹지 않았다. 꼬꼬꼬꼬 해서 병아리를 숨기던 암탉을 부르고 암탉이 나와서 안전한 걸 알고 다시 병아리를 불러 올 때까지 수탉은 그 주위를 돌며 가족을 불러 모았다. 아 누가 닭을 보고 닭대가리라 했던가? 그 때 내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순덕이 우리가 키우던 젖짜는 염소 순덕이는 제일 오래 대를 이어가며 가족으로 살았었다. 키우기도 젖짜기도 힘들었지만 우리 집에 온 이상 우리 식구니까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 한다고 우기다가 끝내 멀리 보내버린 순덕이네. 염소들은 의외로 정이 없어 내게 정을 주지는 않았지만 나는 지금도 저 앞에 있는 산에 염소들이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멀리 보내면서도 짐승이니 잘 살 거라고 생각했다. 동물들이 별생각이 있겠냐고.   그런데 멀쩡하게 데려다 준 염소가 다음날 오전에 갑자기 죽어버렸다는 연락을 받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산천을 온통 자기네 세상으로 살다가 느닺없이 좁은 판넬집에 갖히고 보니 기가 막히고 억울해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가 짐작할 따름이다.   나는 아직도 그 미안함을 떨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오만 데를 다 다니며 똥을 싸고, 심어놓은 나무마다 새싹을 다 잘라먹는 그 녀석들을 다시 키울 엄두는 나지 않는다. 여기 사는 동안 한 세상 원없이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위안일 뿐, 사람과 동물이 다 같이 만족스런 세상은 이미 끝난 시대의 얘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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