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9 |
[서평] 달의 바다
관리자(2007-09-15 12:17:32)
서평- 달의 바다
모든 꿈은 불의 형상을 닮아 있다
글 | 김형미 (시인)
바람이 분다. 한여름의 무더운 바람 말고, 조금은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선선한 기운. 신록이 극에 치달아 있는 때이기도 하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지금과는 달리, 봄에 보는 나무는, 가지 끝까지 송곳을 닮아 있었다.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강인한 생명력이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것이다. 송곳 끝과 같은 가지의 형태는 목(木), 즉 ‘자라는’ 힘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그 끝 잎에 도달하면서 목(木)의 힘은 얇고 납작하게 흩어져 불꽃같은 모양으로 변한다. 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잎들이, 산들이, 모두 불의 형상을 닮아 있는 듯, 어쩌면 푸르디푸른 불꽃으로도 보인다.
허나 무성한 나뭇잎은, 나무 내면에 있는 힘이 겉으로 펼쳐질 대로 펼쳐진, 허장성세(虛張聲勢)의 모습이다. 있는 힘 다해 화려하게 펼쳐졌기에 나뭇잎의 내부에는 남아 있는 힘이 없다. 그래서 찬바람 부는 가을로 들어서기만 하면 무성했던 잎의 위용이 순식간에 꺼져 떨어져버리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꿈이란, 욕망이란 그런 게 아닐까. 우리가 꿈꾸고 있을 때는, ‘자라는’ 목(木)의 힘처럼 무엇이든 꿰뚫어버리는 송곳만큼 날렵하다. 그러다가 강렬한 여름의 힘을 빌어 한때 무성하게 펼쳐질 수도 있는 것. 불꽃처럼 타오를 수도 있는 것. 최소한 불꽃의 형상을 흉내라도 내보는 것.
정한아의 소설 『달의 바다』는 그 모든 걸, 대우주의 비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라는 말로 도입부가 시작되는 걸 보면. 꿈이 깨고 난 후의 일을 미리 알아버린 사람처럼.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그렇다고 고리타분해하지도 않으면서. 능청스럽게, 혹은 가볍게 뒤통수를 치듯이.
『달의 바다』에는 ‘나’와 ‘나’의 친구 ‘민’,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미국에 있는 고모가 나온다. ‘나’는 기자시험에서 번번이 미역국을 먹는 백수이고, 친구 ‘민’은 트랜스젠더가 되고 싶어한다. 고모는 미항공우주국 우주비행사라며 진짜 비행사보다 더 진짜 같게 할머니에게 거짓 편지를 보내고, 할머니는 고모의 편지 내용을 철썩같이 믿는다. 아니, 진짜보다 더 진짜 같게 믿으려 한다.
그에 비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적금’을 붓고, ‘이대갈비’를 운영하는 일만큼이나 좀더 현실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아름다움, 환상, 무지개에 대한 믿음’을 가진 할머니보다 보다 ‘현실적인 것’들에게서 믿음을 찾으려 한다.
여기 나오는 이들 모두가, 그렇게라도 살아 있는 동안은 너끈히 건재하길 갈망하는 것이다. 각자가 생각하고 또 꿈꾸는 세계에서. 우주선 실물모형 전시장의 거대한 모니터 앞에서 부지런히 샌드위치를 만드는 고모도, 멀리서 그런 고모의 모습을 바라보고 섰는 ‘나’도. 자신들 스스로를 지탱해줄 심지를 어디에든 스스로 박아둔 채 말이다. 문득문득 ‘감기약 이백 알’에 눈길이 닿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도 하면서.
꿈은, 욕망은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힘의 원동력이다. 그 힘의 원동력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하지만 그 욕망이란 대부분 끝이 없다. 욕망 때문에, 세속적인 삶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당하고 끌려다닌다. 그렇지만 욕망만을 쫓아가는 것은 외줄타기에서 상생(相生)을 고집하며 왼발로만 나아가려 하는 것과 같다. 절제 없는 욕망이란, 결국 파국을 초래한다.
하지만 『달의 바다』의 ‘나’는 결코 파국을 향해 치달아가지 않는다. 무척이나 영리하게도 다시 집으로 돌아와, 기자 시험을 그만두고 ‘이대갈비’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나’가 잘했다고 치하를 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삶이란 선택이므로. 또한 ‘나’가 꿈을 접은 것도 아니라고 본다. 중요한 건, 어떻게 꿈꾸고 도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움직이며 지속시키느냐가 아닐까.
겉으로만 쏠려 있는 온갖 화려하고 찬란한 이 신록의 계절, 속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가을이 된다 해도 그 무엇을 거둬들일 수 있으랴. 쓸모없는 빈 쭉정이들만 낙엽 위에 되쌓일 뿐. 허망한 뒷모습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나무들은 내면의 힘들을 끌어 모아 열매를 익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설령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그 수고로움을 받아들이면서. ‘그 때부터 진짜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그걸 알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이 시작되는 맨 처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