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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4 | [서평]
죽음 혹은 소멸 그리고 거듭나는 삶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김인숙, 문학동네, 2001)
이수라 전북대 강사 여성다시읽기 회원(2003-04-08 10:43:41)
다음 작품이 나오기가 기다려지는 작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거기다가 함께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작가의 변함없는 독자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행운임이 틀림없다. 대학생이었던 어느 시절부터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김인숙의 성실한 독자였다. 그것은 내가 김인숙의 작품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에 거의 항상 동의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제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에서 그녀가 하고 싶어하는 얘기, 그래서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에 대해서 하고 싶어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한 번 봐야겠다. 여기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 중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이 등장한다. 먼 과거의 죽음이거나 얼마 전의 죽음이거나 곧 이루어질 죽음이거나 죽음 미수이거나. 혹은 지나가다가 흘낏 보게 된 죽음이거나 가까우면서도 가깝지 않은 혈육의 죽음이거나 한때는 가까웠으나 지금은 남만도 못한 가족 누구의 죽음이거나. 그것도 자연사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닥치는 소멸 혹은 죽음. 그러나 지금 당장의 삶에 그 무엇보다도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그런 죽음들. 현재의 삶은 왜 그 죽음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그들이 경험한 혹은 경험하게 될 죽음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은 '쓸모 없는, 쓸모 없는 목숨'으로 살아가는 영화 감독이기도 하고, '어차피 아무 것도 아닌 인생,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목숨'일 뿐인 젊은 퇴직자이기도 하며, '생존의 값은 너무도 작아서 마치 지푸라기처럼 가벼'운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여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들의 삶이 무언가 심각한 문제로 삐걱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오히려 그와는 반대이다. 그들은 '삶의 깊숙한 곳에 촌충처럼 들어박힌 무료함의 발톱을 빼낼 수가 없'어서 문제인 사람들이다.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가 되고, 안일함이 불안의 근원이 되어버리는 것이 그들의 심각한 문제이다. 왜 그럴까? 이 지점에 우리가 살아온 지난 80년대와 90년대가 겹쳐진다. 그 시절을 살아온 우리 모두의 발목을 끊임없이 잡아당기는 말들은 무엇이었던가. '삶은 여전히, 누구에게나, 피를 흘리는 일'이라는 목소리로부터 쉽게 자유로울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도 나보다 더 빨리 나아가지 않아주기를 바라'면서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초조를 버팅겨야 했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살아온 시절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고, 여전히 그러하다. 머무름은 곧 죽음이고, 그래서 정지해 있는 자의 생은 그 의미가 희미해진다. 화분이나 물고기 기르기, 운전이나 피아노 배우기, 그리고 남편이 아닌 사람을 애인으로 두기와 같은 일로 밖에는 자신의 생을 증명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자. 국립대학교의 현직 교수라는 걸 중뿔나게 외치는 것 말고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길이 없는 남자. 그처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사람들이기에 타인과의 관계맺기나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러한 사람들을 다시금 삶 앞에 세워두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우리 기억 속의 삶은 실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모호하다. 삶은 기억 속에서 재빠르게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그 속도는 아마도 세상의 속도와 정확하게 비례할 것이다. 사라져 가는 삶과, 직면해 있는 죽음, 그것은 삶의 가치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삶의 순간들을 가장 분명하게 복원해낸다. 죽음으로 바라본 삶의 모습은, 죽음이 끝이 아니듯 삶 또한 연속이 아니며, 죽음은 곧 삶이며 삶은 곧 죽음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결코 평범할 수만은 없는 진실을 확인하게 한다. 그리하여 죽음은 죽음보다도 더 어려운 삶 쪽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간다. '그녀에게 찬란했을 어떤 순간들, 끝끝내 멈추지 않을 뜨거운 피의 돌기' 혹은 '브라스밴드'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채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 앞에서 모든 경계와 모든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젊은 나이에 찾아온 죽음 앞에서 그저 한 인간일 뿐이었던 친구와 아내를 통해, 그 영화감독 역시 자신의 삶과 대면한다. 그저 '보통 남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 비로소 복원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나를 응시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찍고 있는 것'이 가능해진다. 자기 혼자만의 세상으로의 침잠이 아닌 한에서의 내면으로의 응시,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타인에게로 향해가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나와 세계와의 경계를 허무는 길일지도. 혹은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음에 대한 '강렬하고도 뻐근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첫 단계의 걸음일지도.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순간에 김인숙의 모든 작품들이 이번 작품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위로 한꺼번에 쏟아져내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쨌든 이제 나는 김인숙의 다음 작품을 조금쯤은 편안해진 기분으로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거대한 이념에도 엄청난 속도에도 휘둘리지 않는 김인숙 그녀만의, 바로 그녀 자신만의 작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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