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9 |
[서평] ‘어쩌자고 인간은 신을 만들었나’
관리자(2007-09-15 12:16:07)
서평 - 만들어진 신
‘어쩌자고 인간은 신을 만들었나’
글 | 양승호 (전북대 철학과 강사)
장마가 가볍게 넘어가기에 아! 올여름은 무사하려나- 했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8월의 변덕스러움을 넘어선 요상 망측한 날씨가 대단하다. 벼락 치고 바람 부는 여름 한 가운데에서 『만들어진 신』을 읽으면서 한편으론 안심이 좀 되었다. 벼락 맞아 죽는다 해도 신의 노여움은 아닐 테니까. 한 여름 농담치곤 좀 썰렁하다. 썰렁한 진짜 이유는 동양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동양적 삶은 신의 존재와 무관하다. 그런데 올 여름 한반도는 좀 다르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납치된 한국인들 때문에 종교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런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넌덜머리를 내며 종교의 해악에 몸서리를 떠는 사람이다.
처음 몇 장을 읽을 때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옆에 있다면 앉혀 놓고 일장 훈계라도 좀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종교학 강의를 하는 사람으로서 섣부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는 인류의 지식이 토테미즘, 샤머니즘, 기축종교, 과학으로 발전해 왔다고 생각한다. 토테미즘은 인간이 인간에게 동료애를 느끼고 그의 식량이 되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그의 자연조건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며 토템 동물신의 존재와 자신의 세계를 일체화시키는 당대의 사고방식이며 동시에 지식이다. 샤머니즘은 인간이 계절변화를 이해해서 식물을 농경작물화하고, 동물을 유목가축화해서 살면서 곡물과 가축 생육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자연현상을 자연 인격신으로 신앙하는 시대의 사고방식이다. 기축종교는 인간이 어떤 일의 가치를 인간적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파악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시대의 사고방식이다. 과학 시대는 인간이 세상을 물질적 인관관계, 양화된 수학정식, 검증을 통해서 이해한 시대의 사고방식이다. 나는 기축종교보다 과학의 설명력이 훨씬 높다는 저자의 주장을 인정한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은 차원이 다르다. 나는 2000년 전 예수가 전한 진리나 2500년 전 공자(공구)의 진리나 석가모니(고타마 붓다)의 진리가 오늘날도 진리라고 믿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런 지식은 과학적 지식처럼 변하는 진리가 아니라 절대 불변하는 진리라고 믿는다.
예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했으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했고, 그 사랑이 5000군중이 함께 공동 식사한 기적(오병이어의 기적)을 낳았고, 최후의 만찬에서 전한 진리는 음료수(“예수의 피”)와 먹을 것(“예수의 살”)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예수”라고 가르친 것이고, 그의 말에 따라 죽은 지 사흘 만에 “예수”(예수의 식사 공동체)가 부활하는 기적을 낳아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물론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고 또 다른 훌륭한 종교들도 가능할 것이다. 종교 일반을 거부한다면 우리 인류 문명사에서 과거의 훌륭한 지성사를 통째로 부정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거부해야 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이고 그들의 형용모순의 광기이다. 사실 저자가 비판하는 것도 바로 신앙의 탈을 쓴 그런 광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확실히 좋지 못한 버릇이다.
남의 이야기 다 듣기 전에 중간에 가르치려 하는 버릇. 맨 마지막 장을 다 넘기고 나서야 그리고 저자가 사는 동네를 헤아려 보면 저자의 심정이 충분히 헤아려진다. 언젠가 신문에서 미국 상당수의 고등학생들이 아직도 창조론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읽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라는 미국이 아직도 창조론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니 참 우습네!” 하며 대놓고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
서구 사회의 주요한 사상적 기둥 가운데 하나는 일신교를 주장하는 종교가 한 몫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피부로 닿진 않는다. 점차 우리나라에서도 유일신의 영향력이 막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뿌리 깊은 다신교적인 감각이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제사도 지내고 교회도 가고 또 다급하면 점도 보고 굿도 한다.
말 그대로 그때그때 유연한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보니 목청 높여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사람이나 그렇다고 리처드 도킨스처럼 목청 높여 이를 비판하는 사람이나 신 때문(?) 에 고달픈 팔자로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종일관 무신론적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신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우리 삶에 해를 끼치고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신의 관념을 벗어나 자유롭고 해방된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치 인류 전체가 저지른 범죄의 핵심은 신이라는 관념의 도출인 것만 같다. ‘신’에 대한 관념이야말로 인류의 ‘악’인 셈이다.
저자가 볼 때 인류가 진보한 것은 “종교 때문에가 아니라 종교에도 불구하고 (p.405)” 이다. 이 저자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한 관용에서 자유주의가 탄생했다(존 롤즈)는 서구 지성사에 대한 통찰 이외에도 서구 사회가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는지(찰스 테일러)에 대한 인식도 아울러 필요하다. 후자의 쟁점만을 찰스 테일러 같은 친 가톨릭계의 거물 철학자의 이해에 근거해서 바라보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보통 “진짜 예수 당시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하며(소위 예수에게 100% 복종설), 그러면서 가장 현대적 시설물(교회의 최신시설의 대형 스크린, 텔레비전, 라디오, 현대적 출판물 등)을 이용해서 전도하며 “축자영감설”의 성경 구절이 문자 그대로 옳고 상징적 해석이 그르다고 주장한다.”
기에 두 가지만 현상만 추가하면 근본주의자들의 특징이 거의 완성되는데 하나는 “모태신앙중시”의 의심 없는 신앙이 의구심을 가진 회의적 반성신앙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하나는 기도나 조용한 선교보다 잦은 새벽 기도나 가두, 지하철, 그리고 해외위험지구선교의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전투적 선교정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정서이다. 만일 이와 같은 입장과 자신의 신앙 사이에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리처드 도킨스의 저작을 꼭 읽어야 한다.
사실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논리적으로 형용모순이기 때문에 누구도 근본주의적 입장일 수 없다. 과거 당대의 신이든 성인이 출현할 때처럼 살면서 동시에 현대적 선교 기계 장치들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거의 성경 이론을 현대에 적용하려면 반드시 해석문제에 직면한다.
옛날 문자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옛날에 살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이런 난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언어 일반이 직면하는 언어의 통시적· 공시적 변천문제를 고민하면서 현대의 언어들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과거 언어(과거 성경)가 아니라 현대 언어(현대 성경)이다.
이 현대 성경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과 ‘상징적 해석’ 사이의 구별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언어(성경이든 다른 경전이든)는 항상 맥락에 따라 1차적 의미가 있고, 2차적 의미 … n차적 의미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면서 동시에 상징적 해석이다.
현대의 근본주의자들(기독교 근본주의자이든 이슬람교 근본주의자이든)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과 상징적 해석 사이의 구별이라는 ‘마법의 괴물’을 이용한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에서 견우만 읽고 직녀 이야기는 읽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문자 그대로의 해석과 상징적 해석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현대의 문자 그대로 해석’이란 바로 예수 당시의 1차적 언어 의미의 해석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떤 고언어학자도 과거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신앙 자체를 가질 수 없다.
오늘날 서구 지식인들에게는 역사적 책무가 있다.
미국의 부시나 영국 토니 블레어가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그들이 얼마나 무식한 방식으로 종교적 관점을 지지하며 심지어 미국의 부시는 미국을 신성국가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서구 지식인들의 과제는 한층 더 절박해진다.
만일 한국에서도 누군가가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 싶어 한다면 우리에게도 종교 근본주의자들과의 싸움은 남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종교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종교적 신념을 심어주지 말 것을 강변한다. 이 소린 솔깃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아이들이 종교 생활하는 문제에 대해 상당히 너그러운 이들이 많다.
하지만 과학적 신념을 배워야 할 나이에 과학적 신념과 종종 충돌을 일으킬 종교적 신념은 더구나 그 종교적 신념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하기엔 좀 어린 나이의 아이들에겐 종교적 지식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아이들에게 종교적 신념을 절대로 강요하지 말라는 저자의 견해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저자는 할데인의 말을 빌려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기이하다”(p574)고 했다. 진실로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자신의 삶은 그 자체로 기적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어떤 이에겐 죽는 것보다 못한 끔찍한 삶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겐 그 ‘보기에 따라서’라는 관점을 정할 때 신이라는 관념이 필요할지 모른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 정도의 아량도 베풀기 힘든 모양이다. 즉각적으로 반박이 이어진다. “‘X는 참이다’와 ‘X가 참임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p540)” 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나에게도 뜻밖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에 대해 소망을 품는다. 하지만 소망과 사실은 엄격하게 다른 별 개의 상황이다. 소망을 사실인 셈 치고 사는 것은 때로 위안이 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엔 그 자체가 불안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와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구별된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는 소망이 많은 경우 ‘신의 존재를 기정 사실’로 만드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다.
마침 얼마 전 한겨레 신문에 “‘신은 어디에 ---’50년 고뇌한 테레사” 라는 제목으로 테레사 수녀의 내면 고백이 담긴 책을 소개한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수녀 신분으로 신의 존재를 의심하면서 인간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사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의 신에 대한 고민이 오히려 업적을 가능하게 만든 요인으로 본다고 주장하는 신부들이 있다고 한다.
그토록 성숙한 인간이라면 굳이 신이라는 매개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소박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 누가 뭐라 해도 사람에겐 사람이 상처이고 고통이고 또한 삶의 보람이며 의미이다.
내가 볼 때 우리 나라가 참 드물게(?) 바람직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일상인들의 종교에 대한 태도이다. 우리는 필요할 때 적당하게 매달리다가 필요 없어지면 잊고 만다. 범신론을 뒤집으면 무신론이다. 우리 시대 우리가 지녀야 할 일차적 가치관은 과학적이어야 한다. 그 과학의 틈새에 잠깐씩 한 눈 파는 정도(?)로 종교가 필요하다.
신앙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 ‘초월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실리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보다 더 심오한 인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동시에 주어진 현실 너머의 초월세계에 대한 외경심을 잊지 않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의 존재여부는 가끔 생각해 보다가 머리 아프면 헌신(?)짝 버리듯 버렸으면 좋겠다. 리처드 도킨스가 목청 높여 권하듯 말이다. 그렇지만 ‘초월성’까진 버리지 않기를!
양승호/ 1999년 ‘알튀세르와 푸코의 지식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전북대와 전주대에서 철학, 윤리학, 종교학을 강의하고 있다. 전공과 관심분야는 보편주의 페미니즘과 비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