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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9 |
[이흥재의 마을 이야기] 호남평야의 젖줄 - 낙양취수입문
관리자(2007-09-15 12:05:04)
이흥재의 마을 이야기 -정읍시 태인면 낙양마을 호남평야의 젖줄 - 낙양취수입문 우리 지역을 흐르는 강 중에서 강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때 흔히 섬진강 가를 얘기한다. 꽃피는 봄, 녹음이 어우러진 시원한 강가의 여름 풍경 등, 만경강은 전주를 감싸고 흐르는 전주천, 삼천, 그리고 추천. 소양천과 고산천 이 모두가 삼례교에서 만나 본격적인 만경강을 이루어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동진강은 어느 부분의 생태라든가 아름다움에 특별히 우리의 대화에 거론 된 바가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곡창지대인 김제, 정읍 그리고 부안의 너른 평야지대에 물을 대주어 풍년을 기약하게 하는 게 바로 동진강이다. 호남평야의 젖줄인 셈이다. 하지만 워낙 논이 많고 평야가 넓어 농사지을 물이 무한정 필요해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보다는 거미줄 같은 수로(水路)를 만들어 농사를 짓게 하는 게 우선이어서 아름답고 멋진 강의 풍광을 연출해 낼 만큼 여유가 없는 게 동진강이다. 이 동진강에서 김제와 정읍지역 평야에 실질적으로 물을 나누어 주는 곳이 정읍 태인 낙양리에 있는 냑양취수입문이다. 일원종시백파[(一源從是百派)-한갈대의 물줄기가 백갈래로 퍼져 광활히 농경지를 골고루 적셔준다.]비가 낙양리 수리시설이 있는 낙양동산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인 1927년 5월에 낙양 취수입문을 완공하고 세웠는데, 1919년 서해연안 그 중에서 호남평야 일대에 가뭄으로 대흉작이 있었다. 그래서 1925년 11월 임실 강진면에 운암저수지를 착공해서 1928년 12월 준공을 한다. 그래서 지금의 옥정호가 생겨나게 된 연유이다. 지금은 임실 강진에 있는 섬진강 댐에서 섬진강을 막아 옥정호가 만들어지고, 이 옥정호에 굴을 뚫어 산외를 거쳐 오는 물과 칠보 발전소에서 발전을 하고 나오는 물이 만나 태인 낙양리까지 흘러와 낙양리 취수입문에서 정읍수로와 김제수로 두 갈래로 나뉘어 농업용수로 쓰며 벼농사를 짓게 된다. 동진강은 정읍, 김제, 부안을 거쳐 흐르면서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인 김제 평야를 만들어 놓았다. 동진강은 호남평야 대동맥인 셈이다. 이 호남평야에 실제로 물을 대주는 수도꼭지 역할을 하는 곳이 낙양리 수리시설이다. 동진강을 가로막고 있는 낙양 취수입문은 수문을 통해 물길과 유량을 조절하는데 농번기가 되면 김제 간선 수로와 정읍 간선 수로를 활짝 열어 평야지대 곳곳에 물줄기를 흘려보낸다. 이곳을 통해 농사철이 되면 평야지대에 물을 대주고 있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이 곳에서 일원종시백파에서 따온 백파제(百派祭)로 불리는 통수식을 갖고, 9월 말이면 납수제 행사와 함께 정읍, 김제 용수간전의 수문 닫는다. 동진강 유역은 평탄한 충적지와 완만한 경사의 야산이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동진강물을 대서 쌀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이 곳이 벼농사의 발상지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가 벽골제와 고부의 눌제,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만석보이다. 하지만 동진강은 그 지류가 모두 소규모 하천이고 물의 양이 적어 주변의 넓은 평야를 넉넉히 적셔주기에는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물을 좀 더 잘 대서 농사를 짓고 싶은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동진 수리조합이다. 1920년대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했다. 그 과정에서 식량보급을 위한 산미(産米)증식계획 세우는 데 그 핵심이 동진수리조합이다. 당시 동진수리조합을 농사짓는데 부족한 물을 대기 위해 섬진강 상류에 댐을 만들어, 그 물을 동진강으로 끌어들여 호남평야의 농업용수로 쓰기위한 대규모 종합개발 계획을 세운다. 이 거대한 공사는 임실군 강진면에서 시작됐다. 동진 수리조합은 가장 먼저 운암제를 만든다. 당시 운암제는 오로지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물을 대는 관수목적용 저수지였다. 그리고 운암제의 물을 정읍으로 방류시키기 위해 굴을 뚫는다. 이 터널은 정읍 산외면 종산리 팽나무 정까지 연결 돼 섬진강 물을 동진강 상류로 방류시킨 것이다. 1928년에 뚫린 이 물길은 지금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도수로 건설사업으로 정읍 태인면 낙양리 취수입문이 설치되고, 김제용수간선과 정읍용수간선이 만들어져 농사철이면 호남평야 곳곳에 물을 대 젖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농진수리조합장은 전라북도 지사와 함께 할 정도의 막강한 영향력이 있었다고 한다. 낙양 취수입문에서 조금만 가면 신태인이고, 신태인과 이평사이에 옛날 만석보가 있었다. 동진강 본류와 정읍천이 만나는 곳이 있다. 이곳에 만석보가 축조된 것은 1892년이다. 이 전에 정읍천에는 농민들이 직접 동진강 본류와 맞닿는 지점에 광산보를 쌓았다. 그런데 가렴주구와 학정을 일삼던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광산보 아래 새로운 만석보를 쌓고, 막대한 물세를 징수해 농민들의 원성을 불러 일으켰다. 1984년 2월 한 겨울에 봉기한 농민들은 밤길을 달려 만석보를 허물었다. 만석보는 1898년 완전히 철거 되었다. 이렇게 동진강은 전라도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함께 해왔다. 낙양리 외이 마을 모정 옆에는 남녀화장실은 물론 남녀샤워장도 세워져 있다. 아직도 건강한 76살의 전주 최씨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열변을 토했다.   ‘상종마라, 일본놈.    속지마라, 소련놈.    믿지마라, 미국놈.’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들으면서 컸는데, 살아오면서 평생 살아오면서 경험한 바로는 그 말이 맞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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