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9 |
[명인명장] “풍상을 겪은 나무라야 .. -1
관리자(2007-09-15 11:54:11)
악기의 생명은 소리
하지만 가야금 통을 다듬으면서 얼마나 공력을 들이느냐도 중요하죠. 지금은 중국에서도 많이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저희들이 걱정을 많이 해요. 중국을 보면 목수들이 거의 다 만들어요. 소리가 나든 안 나든 목수들이 마음대로 만들어요. 그냥 겉모양이 예쁘기만 하면 갖다 내놓는 거여. 악기의 생명은 소리인데, 그 사람들한테는 소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금년으로 만 40년째 만들고 있는데, 오랜 세월을 터득하다 보니까 좋은 소리를 알겠어요. 처음에는 통을 약하게도 만들어보고, 좀 두껍게도 만들어보고...그렇게 하다 보니까 아, 악기는 이렇게 만들면 좋겠구나, 하고 터득을 한 거죠.
지난번에 일본 ‘나라도’라는 곳을 가봤는데, 거기는 이미 악기 만드는 것이 기계화 돼 있어요. 우리는 대패로 속을 깎는데, 거기는 갈쿠리처럼 생긴 기계 날이 수십 개가 돌아가면서 속을 파내요. 그러니 얼마나 미세하게 깎아냅니까? 끝에 가면 음파조정기가 달려 있어요. 동동동동 때리는 것이. 음파조정기에서 소리가 안 나면 그 나무는 폐기해 버려요. 일본은 확실히 선진화 됐어요. 악기가 가야금은 아니고 ‘고도’인데, 일본 사람 집에는 이 고도 없는 집이 없어요.
우리는 그런 시설을 하려면 얼마나 드느냐? 3억 들어요, 3억! 3억이면 그냥 편히 먹고 살아야죠. 3억 가지면 편히 사니까. 제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내년이 칠십인데.
거문고 만들기 참 어려워요
(거문고 꺼내며) 이것인 거문고인데, 이걸 괘라고 하고 이걸 안족이라고 해요. 왜 안족이라고 하냐면 기러기 발을 닮았다고 해서. 이 괘는 대추나무로 만든 거예요. 왜 대추나무를 썼냐? 대추나무가 굉장히 단단합니다. 말도 못하게 단단해요. 색깔도 이게 무슨 칠을 한 게 아니에요. 대추나무 속은 원래 빠알그래요. 대추씨도 빨개요.
나무 자체에서 나오는 액이 빨가니까 이렇게 빨간 거예요. (거문고 한번 퉁겨보고) 이걸 만들다 보면 차암 어려움이 많죠. 가야금은 안족 12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문고는 16개의 괘를 맞춰야 하는데, 앞줄을 잡으면 뒷줄이 안 닿아야 돼요. 16개가 다 안 닿아야 돼요. 닿으면 소리가 나죠. 그래서 닿지 않게 열여섯 개가 쫘악 올라가야 돼요. 딱 짚었을 때 뒷줄이 닿지 않게.
거문고를 왜 남자들, 선비들 악기라고 하냐면, 힘이 있잖습니까? 그리고 술대(연주용 나무 막대기)를 잡으면 약지 사이에다 끼거든요. 그런데 이 뼈가 여자들한테는 조금 문제가 돼요. 골무를 끼어야 돼요. 잡고 밀고 퉁겨주고. 거문고는 타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소리가 남성답죠. 가야금은 여자답고요. 선비들이 공부하면서 좀 고독할 때 있지 않습니까? 그런 때는 시조 같은 데다 가락을 실어서 이렇게 퉁기곤 했죠. (둥두둥둥)
그런데 이 걸 만드는 과정이 참 힘들어요. 거문고 판이 둥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괘를 만들기도 참 어려워요. 밑에를 둥글게 깎아야 하니까. 그리고 가상에 하얗게 댄 것은 소 갈비뼈예요. 이건 소 물방댕이뼈고. 소 갈비뼈를 가운데를 빠개죠. 그러면 피가 빨갛게 나와요. 그럼 피를 어떻게 빼냐? 양잿물을 넣고 삶아요. 그러면 피가 빠져요. 그럼 이 문양을 어떻게 만드냐? 갈비뼈를 야스리로 얇게 다듬어요. 그리고 나무 속에 이만하게 잘라서 갖다 넣고....그러니 얼마나 공이 들겠어요.
조상들의 기법을 그대로 재현
한국 복식학교 회장이라고 박경자 회장님이 있었어. 나는 스앞판은 오동나무, 뒤판은 오리지날 밤나무, 알밤나무예요. 알밤나무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 그랬죠. 이 거문고는 스페인으로 갈 겁니다만, 금년 10월 5일에 스페인으로 가서 전시할 겁니다. 여기에는 라카칠을 안 했어요. 불로 지져 가지고 기름칠을 했어요. 옛날식으로 했죠. 이것도 역시 소 갈비뼈예요. 왜 새캄새캄하겠어요? 핏자국이에요.
그런데 이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야기해도 몰라요. 뭐 하러 갈비뼈를 붙였냐? 그래요. 아니 그럼 미인이 뭐 하러 화장합니까? 이쁘니까 그냥 내보내지. 거문고 역시 좋은 악기에다가는 아름답게 해줘야 좋지 않겠느냐, 그거죠. 참 조상들의 지혜가 뛰어나죠. 옛날에는 PVC가 없었잖아요? 요즘 거문고는 다 PVC로 해요. 깨끗하죠. 갈비뼈처럼 누렇지도 않고.
이런 거문고 하나가 칠백(만 원) 정도 해요. 그만큼 공력이 들어갔고, 소갈비 갈아서 만들려면 한 달에 한 대밖에 못 만들어요. 한 달에 한 대 만들기도 어려워요. 그런데도 왜 갈비로 만들었냐? 제가 문화재잖아요. 전승자지 않습니까?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던 것을 재현해야 한다, 재현! 그래서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이 ‘돌개’(현을 팽팽하게 조이는 기구)도 옛날에는 육각이나 팔각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돌려야 하니까! 동그란 모양보다 모가 지면 훨씬 돌리기가 수월해요. 근데 요새 젊은 사람들은 모가 지면 손 아프다고 해요. 둥글게 해달라고.
먹고살려다 보니 타는 법을 몰라요
(거문고 퉁겨보다가) 그런데 사실 저는 거문고 타는 법을 못 배웠어요. 만들다 보니 언제 배우러 다니겠어요? 사람들이 왜 거문고를 못 타냐고 하는데, 솔직한 얘기로, 나도 거문고를 좀 탈 줄 알아야 되는데, 먹고살려고 만들다 보니까 못 배우고 말았지.
내 거문고로 연주한 사람들이야 많죠. 이제 거의 다 작고를 하셨어요. 나랑 거래했던 분들은. 신쾌동 씨라고, 이리 살던 분입니다. 대한민국 1인자였죠. 또 강동일 씨라고 아실랑가 모르겠네. 전주분이었는데, 그 분이 대가예요. 그 분이 중요 무형문화재가 됐어야 하는데, 술을 좋아해. 저하고 형님 동생 했습니다만, 술을 너무 좋아해. 또 한갑득, 원광옥, 원광옥은 광주분이에요. 그 분도 돌아가셨지. 또 부산에 사는 김차남 씨. 그 분도 역시 돌아가셨고.
구례에 있는 김무길 씨, 국악대학교에 있는 김재형 씨, 변성금 씨... 이런 분들이 와서 제 거문고를 골라가요. 제가 만든 가야금은 뒤에 글씨를 새겨줘요. 무형문화재 최동식 작. 대를 물려도 된단 얘기야. 대를 물려라. 밟아서 깨기 전에는 끄떡없습니다. 제 악기는 다른 사람들 악기보다 무겁습니다. 이 판이 두꺼워요. 사실은 이 판을 얇게 해서 벌렁벌렁 해야돼요. 근데 조금 잘못하면 부서지니까 두껍게 했어. 그러니까 오동나무를 5년 이상 말린 건데도 무거워. 사람들이 무겁다고 해요. 내가 들어봐도 무겁고.
뒤로 넘어졌으면 죽었을 것이여
거문고의 줄은, 모르시는 분들은 고래심줄이라고 그러죠? 이게 명주실이에요. 명주실. 이 실을 꼬는 데는 사람이 4명이 필요합니다. 가운데에 있는 굵은 대현은 줄 가닥수가 230가닥, 명주실 230가닥으로 해서 아주 가늘지 않습니까? 이걸 다 손으로 꼬아야 돼요. 작년까지만 해도 아들이랑 같이 꼬았는디, 작년에 꼬다가 내가 앞으로 팍 넘어져 부렀어. 앞에 물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다라이에다가 연 자새를 놓고 거기에다 실을 합사를 해놨는디, 갑작스레 넘어진 것이여. 뒤로 넘어졌으면 죽었을 것이여. 앞으로 팍 쓰러졌는디 일어날 수가 있어야지. 우리 아들내미가 아이고 아부지 왜 그러냐고 그러길래, 정신은 있으니까, 가만히 있어봐 이놈아, 하고 보돕시 일어나서 작업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 작업 할라고 하니까 자꾸 그 생각이 떠올라요. 또 쓰러지지 않을까.
그 작업이 무리가 되더라구요. 다른 공장 애들을 불러와서 하니까 아침 5시부터 일어나서 작업할 준비를 싹 해놔야 된단 말이여. 그러면 낮에는 좀 쉬어야 하는디, 또 감독을 안 하면 일꾼들이 일을 못 해요. 몇 번 실을 회전을 해서 비벼 가지고, 이만하면 합사를 해야되겠다 판단을 해야 돼요. 세 줄이 돌아갑니다. 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다가 마지막에 합사가 되는 거여.
명주실은 솥에다 넣고 수증기로 찌는디, 송진 있잖습니까? 소나무 방망이. 거기에다 실을 감고 쪄내요. 옛날에는 소나무 순을 탁 잘라서 마대 자루에 집어넣고 어깨에다 짊어지고 내려와서, 껍질을 벗겨서 그 위에다 실을 감어. 지금은 기계로 감지만 그때는 그 추운 겨울에 참 미쳐요. 눈이 와서 실이 다 얼어요. 옆구리에다 끼고 싹싹 감으면 배도 아프지만 손은 오죽 시려워요? 그렇게 감아서 솥에서 수증기를 쐬면 여기 있는 송진을 실이 싹 먹어요. 명주실이 송진을 먹으면 소리가 기가 막혀요.
지금은 그렇게 해서 가져가면, 송진을 척척할 때 안 내놓으면 실이 부러져요. 송진을 먹었으니까. 하지만 20년 30년을 가도 좀벌레는커녕 땀도 안 먹어요. 나중에는 그냥 반질반질반질혀. 그래서 막 몇 년을 쓰잖아요. 지금은 그렇게 해다 주면, 부러진다고 뭐라고 혀. 실이 희끗희끗허다고. 그렁께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말어.
악기도 좋은 오동나무 무늬로 해서 옹이가 있어서 때워서 갖다 주면, 에이~ 때웠다고 안 산다고 혀. 사실은 그게 좋은 악깁니다. 재래종! 요새 인공 재배한 오동나무는 날씬하게 빠졌어요. 재래종 오동나무는 오래되면 이끼가 끼어요. 그렇게 풍상을 맞어가며 모질게 큰 나무가 좋아요. 신품종은 이끼가 안 껴요. 비료를 주니까 금방금방 커요. 그러니까 나이테가 이 따위로 넓어요.
요즘 학벌위조 나오지 않습니까? 속으로 많이 배워야지 얼굴만 이뻐가지고 뭐하겠습니까? 나는 원래가 그런 것 싫어하는 사람입니다만, 이 거문고나 가야금은 나무가 제일 중요해요.
요즘엔 한 달에 한 대 팔 동 말 동
거문고를 만들 줄 알면 가야금도 만들 줄 알고, 현악기는 다 만들 줄 알아요. 이것은 아쟁이고, 이것은 정악에 쓰는 법금인데, 줄 사이의 간격이 멀기 때문에 빠른 곡은 연주할 수가 없습니다. 산조 가야금은 째즈 식으로 연주가 가능하죠.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악깁니다. 이건 ‘슬’이라고 하는 악기인데 ‘여자’를 뜻하죠. 금은 남자고. 그래서 금슬이 좋아야 잘 산다고 하잖아요. 이런 건 PVC로 만든 거예요. 깨끗하죠? 소뼈는 긁으면 돌이라서 가루가 나오죠. PVC는 찍찍찍 소리가 나요.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렇게 악기만 만들다 보니 언제 연주를 하겠습니까? 사실 연주를 좀 배웠어야 하는데....우리 딸들은 전공을 했죠. 큰딸은 가야금하고 거문고, 작은딸도 가야금, 아쟁. 전북대학교 한국음악과 나와 가지고. 그놈들이 계속 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캐나다에 가 있어요. 영주권 받아 가지고. 그래도 내가 거문고 만들어서 자식들 다 대학 보내고 해외연수까지 다 보냈어.
거문고도 팔리기만 하면 괜찮아요. 지금은 때가 아니야. IMF 온 이후로는 안 돼. 잘 아실지 모르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전통문화를 장려를 했어요. 그 전에는 그냥 명맥만 유지를 해왔어요. 국악원 같은 데 몇 대 파는 것말고는 수요가 없었는데,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 ‘우리 것을 알자’ 그때부터 보급이 되기 시작했어요. 국악원도 활성화되고 학교도 활성화되고 그랬죠. 노태우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어요. 작년 재작년까지만 해도 매 달 거문고 한 대씩은 팔았는데, 매달 300만 원만 들어와도 괜찮잖아요? 도에서 매달 지원되는 것도 있고 하니까. 그런데 요즘엔 한 대도 못 팔 때가 많습니다. 국악원 같은 데 한 대 팔 동 말 동. 그래도 언젠가는 또 때가 오겠죠?
더러 거문고 가야금 구경하러 오는 사람은 있지만,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저는 늦게 시작했지만, 우리 거문고 가야금 업계에서 그렇게 뒤지지 않았다고 자신합니다. 지금도 전국일주니, 내고향 큰잔치니, 촬영했던 방송 테이프가 그대로 있어요. 나만큼 테레비에 많이 나온 사람 없습니다. 라디오 방송도 엄청 했죠. 내가 전라북도 전통공예인협회 회장을 10년이나 했어요.
한 우물 판 외길 인생
좋았으니까 지금까지 했죠. 재미있었고, 옛날 속담에 ‘우물 두 개 파면 무너진다’고 하잖아요? 그러고 우리 아버님이 훈장이셨어. 서당 선생! 항상 근면하고 항상 자기를 낮춰라. 낮추면서 살아라. 그리고 참아라. 어떻게나 엄해가지고, 참고 견디라고 하셨어. 그때는 ‘강’이라고 해서 다 외와야 했어. 동몽선습도 외고 명심보감도 외고. 명심보감을 지금도 보면 전부 좋은 말뿐이 없습니다. 그대로 살면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지. 우리 아버님 항상 하시는 말씀이 ‘참고 견디고 이해하고 살아라. 내가 너에게 줄 돈은 없다.’ 그랬어요. 실제로 저는 논 한 마지기 안 갖고 나왔어요.
참 말 그대로 ‘외길인생’이죠. 저는 그래요. 참 악착같이, 억척같이 살아왔어요. 그러다 보니까 성공을 했어요. 문화재도 되고. 문화재 될 때도 뼈를 깎는 아픔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누가 다 서류도 대신 해준다는데, 저는 싹 다 제 혼자 했어요.
이 집에서 산 지도 오래 되었어요. 관통로에서 국악사를 한 30년 했는데, 인건비 나가죠, 집세 줘야죠, 전기세 수도세...뭐 보통 한 달에 150만 원은 나가. 그래서 그냥 집으로 들어와 버렸지. 우리 아들이 마흔 두 살이니까...한 40년 넘었지. 가업을 잇겠다는 아들은 둘째아들인데, 대학 나와 가지고 지금 거문고를 만들고 있는데 내 보기엔 시원찮어요. 힘만 있어 가지고 막 깎아버리니까...중요한 건 기술이 있어야지. 지가 어깨너머로 배웠으니까 서서히 알아서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