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9 |
[명인명장] “풍상을 겪은 나무라야 ..-2
관리자(2007-09-15 11:51:35)
거문고 악기장 최동식
“풍상을 겪은 나무라야 소리가 좋지요”
구술 최동식 ㅣ 정리 김선경ㅣ 사진 유백영
틀어질 대로 틀어져야 본래의 모습이 나오는 것일까요? 최동식 명장의 집 지붕. 늦여름 햇볕에 오동나무가 하얗게 타고 있습니다. 저렇게 석 달 동안 뼛속까지 몸을 태우고, 다시 석 달 동안 찬이슬과 서리를 맞고, 다시 석 달 동안 눈보라 속에서 뼈 시린 추위를 견뎌내고… 그렇게 5년을 견디며 온 몸이 틀어질 대로 틀어져서야, 비로소 오동나무 본연의 수굿한 울림소리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진이 빠질 대로 빠진 나무는 대팻날을 살짝만 대어도 사그락!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몸을 날려보냅니다. 아마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겁니다. 40년 동안 대팻날을 손에서 놓지 못한 것은.
거문고 악기장 최동식(무형문화재 제 12호) 씨. 오동나무와 명주실을 벗삼아 살다 보니, 그의 몸에서도 세월이 독한 진이 다 빠져나간 듯합니다. 삿된 욕심과 들끓는 욕망을 벗어 던진 맑고 투명한 목소리. 거문고 소리처럼 낮고 둥글고 깊게 여울진 소리. 최동식 명장이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밥만 먹이고 이발값만 주었지
나는 스물다섯 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어요. 좀 늦게 배웠죠. 장가가고 나서부터 했으니까. 그 전 얘기를 할라믄....그 전 얘기를 자꾸 해싸니까, 우리 각시가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 허지 말라고 당부를 하더라고. 자꾸 그런 얘기 해싸면 듣기 싫다고.
근데 사실 그 때 얘기를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않습니까? 그걸 알아야 된다 그 말이여.
제가 30대까지만 해도, 결혼해 가지고 마누라 놔두고 혼자 집을 나왔어요. 내가 태어난 곳은 장수 계남이고 군대 갔다 올 때까지는 거기 살았지. 군대 갔다 와서 처삼춘한테 가야금 만드는 걸 배우기 시작했어요. 처삼촌은 전주 사람이에요.
혼자 나와서 가야금 일을 허는데, 월급을 줍니까? 밥만 먹이고 머리 깎는 이발 값만 주었지. 우리 처삼춘이 배를 곯고 있는 실정인디, 월급 달라고 말할 수가 없어. 그냥 밥이나 먹자, 그랬지. 그때는 내밥 먹고 배우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응게.
우리 처가 쪽에 밥해주는 조대석이라고 있었어. ‘야 대석아, 오늘 내가 물건 팔아왔는데, 가자!’ 그러고 가는 거야. 그 당시 가야금 한 대가 3,4천 원 했었어. 그런디 당시에 술이나 먹었으면 괜찮았지. 교회에 빠져 가지고 술이고 담배고 하나도 몰라. 길바닥에서 풀빵 하나 사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그렇게 저렇게 한 3년이 지났나? 계남에 있는 마누라가 아들을 낳았다고 연락이 왔어. 지금 마누라들 같으면 난리가 뒤집어지지. 당장 이혼한다고 그러지. 그런디 돈이 있어야 집을 가지? 안 그러면 못 가지. 아, 그러니 우리 각시는 얼마나....시골에서 우리 어머니랑 둘이...우리 어머니가 성질이 사나웠어요. 남편이란 사람은 집을 나가버리고. 나라도 옆에 있었으면 좀 괜찮았을 텐디. 그때는 남자들이 물지게를 양쪽에다 지고 나르고 그랬는디, 내가 그 일을 못하니까 각시가 물지게를 이고 나르고 그랬지.
그랬는데 어느 날 각시가 애기를 업고 뭘 하나 이고 왔어. 그래서 ‘뭐요 그게?’했더니 허허..그게 쌀이었어요. 쌀. 차암...눈물이 날라고 하지만 어떡합니까? 부모님 대대로 못 사니까 하는 수 없지. 공장 한쪽의 공장방, 지금처럼 이렇게 넓기나 합니까? 거기에서 살았죠. 전주 서서학동에 살 때. 가운데는 주인집이 살고 한쪽은 국악사 공장이 있고, 우리가 한쪽방에 살았지. 그 공장을 우리 처삼춘이 한 거지. 조카가 생겼으니 어쩌겄어? 쫓아내지도 못허고 그렇게 살았지. 사는 것이 완전히 거지여, 거지. 지금 얘기하면 완전 거지죠 뭐. 거지생활을 하다시피 하면서, 밥이나 먹자 했지.
김명칠 선생은 참 대가였지
그런데 열심히 하다 보니까, 우리 처삼춘이 나보다 한 살이 적어. 군에서 영장이 날아왔어. 군대 가야지 어떡합니까? 가야하는데, 국악기 공장하다가 빚을 졌단 말이여. 그래서 내가 말했지. 내가 갚을 테니까 군대 가쇼. 한 푼 두 푼 벌어서 빚도 갚고 면회도 가고, 그런 세월 속에서, 군대 갔다 와서 처삼춘은 서울로 갔어. 원래는 서학동 장승백이서 일을 했는디.
그 전에는 태평동 전매청 있는 디서 김광주 선생이 가야금 만드는 일을 했었고. 내가 직접 가보기도 하고 배우기도 허고 그랬는디. 그 옆에가 바로 누에고치로 명주실 만드는 공장이 있었지.
김명칠 씨라고, 지금 우리 가야금업계에서 아는 사람이 몇 안 돼요. 내가 배운 김광주 씨가 김명칠 씨 아드님인데, 저도 김명칠 씨는 얼굴은 못 보고, 그 분이 만든 거문고, 그건 봤어요. 거문고 뒤에다가 풍류(시)를 써놓고 김명칠이라고, 밝을 명자, 일곱 칠자를 써놨더라고요.
제가 그것을 김광주 선생한테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 아버지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2대가 만든 거죠. 그러고는 대가 끊겼어요. 김광주 씨는 딸만 둘을 낳았어요. 딸들이 일본 가서 살아요. 김광주 선생은 돌아가시고 사모님도 일본 가서 딸들이랑 살아요.
제가 김광주 씨를 만났을 때, 저는 그때 이미 국악사를 만들고 경영을 하고 있었어요. 전주 전동에 살면서. 그런데 한 고물상에서 김명칠 선생 거문고를 발견하고 내가 사기로 딱 해놨는데, 서울에 있는 그 누구냐, 대금 부는 이생강 선생 동생이 와 가지고 그걸 그냥 나 몰래 사가 버린 거여. 내가 사겠다고 점을 찍어 놨는디. 그때가 70년대였는데, 그때 돈 20만원 갔으니까, 참 비싼 거였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 현이고 안족이고 괘고 싹 그대로 붙어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거문고를 하니까 내가 사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 사람이 ‘따블’로 사가 버린 거여. 그러니까 팔지. 하여튼 김명칠 선생은 참 대가였지. 지금도 그 분 솜씨는 못 따라가요.
참 눈치 더럽게 얻어먹었겠구나
그렇게 허고 인자 돈도 많이 벌고, 결혼도 혀서. 인자 시집그렇게 일을 배워서, 옛날 도청 앞에서 아마 전국에서는 최초로 국악사를 운영했을 거요. 한 30년 전에. 그런데 돈이 없으니까, 체곗돈이라고 있어요, 달라돈! 달라돈을 빌려요. 가야금 10대가 주문이 들어왔다면. 제 텃밭이 광주였어요. 광주는 매주 갔어요. 광주, 대구, 서울. 서울에 10대 가지고 올라가면 3일 걸려서 싹 팔고 내려왔어요.
그때 고생을 생각해보면 말도 못하죠. 밤 10시 반까지 작업을 했으니까. 지금은 그렇게 일 시키면 다 도망가버리죠. 밤 10시 반까지 작업을 해가지고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면 서울역에 4시 반, 다섯 시 정도에 도착해요. 겨울이라 캄캄해요. 그때는 시발택시가 있었는데 돈이 없으니까 탈 수가 없었지. 달라돈을 만 원만 주시오. 그렇게 몇 만 원 빌려서 올라가야지. 물건을 팔아도 현찰로 주는 게 아니에요. 부쳐주께, 그러면 어떡하겠어요? 그냥 내려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서울에 사는 처이모집에 가서 잤죠. 돈이 없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참 눈치 더럽게 얻어먹었겠구나 싶어. 이렇게 쪼그만 골방에 같이 끼어서 자야 돼. 밥 얻어묵고. 눈치라는 것은 생각을 못했지. 생각을 안 해야지, 그 생각을 하면 처이모집에 못 가지. 돈이 없는데 어떡허겄어. 차암, 지금 젊은 사람들, 50대 넘은 사람들 고생했다고 허는디, 비교가 안되죠.
그때 당시 같이 고생한 사람들이 우리 처삼춘 조정삼, 김희우, 이형수...그 정도지. 80년대 이후로는 편해졌어요.
그렇게 해서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 되면서 국악 붐이 일어나 가지고 그때부터 이제 명인한테 가야금 거문고를 팔았죠. 나는 일 안하고 국악사 관리하고 그랬지. 내가 문화재 되려고 하니까, 내가 일 못한다고 모함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심사하는 사람이 ‘대패질 한 번 해보쇼’ 그래. 내 참. 그래 내가 대패질을 싸악 했더니, 이 양반이 잘 하시는 분이그만 모함했다고 화를 내더라고.
재료가 좋아야 소리가 잘 나요
가야금이든 거문고든, 첫째는 재료가 얼마나 좋으냐가 제일 중요하지. 제가 항상 하는 얘깁니다만, 7,80%는 재룝니다. 공력도 있지만, 첫째는 재료가 좋아야 소리가 잘 나요.
좋은 재료를 구하려면 산골짜기를 돌아다녀야 돼요. 아니면 사찰 같은 데를 가면 오동나무가 한 주씩 있어요. 그런디 그걸 사 가지고 끌고 내려오는 것이 문제지. 요새는 그런 일들을 안 할라고 하니까. 그러니까 일꾼들 사서 포크레인으로 와이어 줄 대가지고 끌어내려서 갖고 오죠. 그런디 사찰 옆에 있는 나무는 안 팔라고 해요.
오래된 재래종 오동나무에는 이끼가 끼어요. 저는 주로 재래종만 써요. 지금도 더러 좋은 나무들이 있지만 안 팔라고 하니까 못 사오죠. 저는 그 전에 구해올 때, 운암에 배 타고 들어가서 오지 골짜기에서 나무를 구해오고 그랬는데, 그런 경우는 배를 타고 나오기가 참 어렵습니다.
또 무주 진안 장수 같은 데 들어가서 구해오기도 하고, 고산 골짜기에 가서 구해오기도 하고 그랬죠.그렇게 나무를 가져와서 제재소에서 빠개 가지고 한 5년 이상 말려요. 옛날에 젊었을 때는, 주문은 막 들어오지, 물건은 없지, 그러니 어떡허겠어요? 그러니까 연탄난로를 놓고 그 주위에서 말렸어요. 오동나무를 가로 한치 두 푼에, 세로 일곱 치로 쪼개서 쭉 세워서 연탄난로에 말렸지. 속은 긁어내고, 그렇게 말렸어요. 그래서 나무에 물기가 없어지면 그때부터 만들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5년 이상 지붕에다 말려요. 눈, 비 맞혀가면서. 왜 눈비를 맞히냐면, 눈비를 맞혀야 나무의 진이 다 빠져요. 바람에 풍화되고 햇볕에 틀어질 대로 틀어지고 했을 때, 나무가 좀 곰삭는다고 하죠. 햇볕을 많이 쬐면, 강했던 나무의 심줄이 느슨해져요. 나무가 단단하면 소리가 잘 안 나요. 가야금은 그래서 나무가 오래될수록 소리가 잘 납니다.
나무결 같은 것이 느슨해져야 연장도 잘 받아요. 대패질을 하다 보면 ‘생것’을 깎다보면 싹! 싹! 소리가 나는데, 한 5년 간 말린 나무는 사그락! 사그락! 소리가 나요. 그러니까 내가 일하기도 편하고 대패질도 잘 되죠. 생것들은 틀어진 부분을 바로 잡아놓아도 다시 돌아간단 말이에요. 그런디 한 5년 말린 나무는, 우리도 늙으면 힘이 없잖습니까? 나무도 마찬가지예요. 오랫동안 햇살에다 말려놓으니까 이렇게 틀어졌던 것도 반듯하게 잡아집니다.
지금은 그래서 그런 식으로 만듭니다. 저만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가야금 거문고 만드는 사람들이 보통 3,4년 이상은 말립니다. 그래서 소리가 좋죠. 소리가 잘 나고 만들어놓으면 품위가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