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9 |
[특집-책] 책, 영화 속에 들어가다
관리자(2007-09-15 11:47:44)
●괴테의 소설 중에 『친화력』이라는 작품이 있다. 1800년대 초반 ‘느림의 시대’ 작품이어서 읽기에 편하지만은 않지만,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명료하다. 본래 화학에서 쓰이는 용어인 친화력(두 개의 원소로 분리될 수 있는 두 개의 물질이 서로 혼합될 때 원래의 결합을 버리고 다른 물질의 원소와 새로이 결합하는 현상)을 인간관계에 그대로 적용하여, 사람 사이에도 서로 끌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는 내용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만나게 될 때 그 영화에 더욱 이끌리게 된다. 그리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감독에 대해 ‘친화력’을 느낀다.
‘영화 속의 책’이라는 개념부터 명확히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게 좋겠다. 여기서 ‘영화 속의 책’이란 책을 각색해서 영화를 만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책이 잠깐 언급되거나 몰래 숨어 있지만 영화 전편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책을 각색해서 영화를 만드는 경우에는 영화를 보며 실망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책을 읽으며 마음껏 펼쳤던 상상의 세계, 사유의 세계가 하나의 화면으로 고정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영화 속의 책’은 그 책에 애착을 느끼는 관객을 은밀하게 빨아들인다. 감독-작가-관객으로 이어지는 친화력 3각형이 완성된다.
‘영화 속의 책’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책이 영화에 얼핏 보이거나 언급되는 경우가 그 하나요, 제목으로 암시되는 경우가 그 둘이요, 언급되지도 않고 제목으로 암시되지도 않지만 영화에 모티프로 작용하는 게 그 셋이다.
첫 번째 경우의 예로 대표적인 영화는 워쇼스키 형제 감독의 <매트릭스>를 들 수 있다. <매트릭스>의 앞부분을 보면 네오(키아누 리브스 분)가 해커들과 비밀 디스크를 거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책 안에서 그 디스크를 꺼낸다. 그 어떤 책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쟝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다. 영어로 하면 ‘simulation’, 우리말로 하면 ‘가상세계, 허상세계’ 정도 되겠다. 『시뮬라시옹』은 현대사회의 속성 중 하나인 ‘가상성’을 분석한 책이다. 그리고 <매트릭스>는 가상세계 속에서의 인간 삶의 조건과 가능성을 탐구한 영화이다. 영화 속에 잠깐 비칠 뿐이지만 『시뮬라시옹』이 영화 <매트릭스>의 구상에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워쇼스키 형제는 과연 이 책을 몇 번 읽고서 영화를 만들었을까?
이와이 순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에서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언급되는데, 이 영화의 내용 자체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여정에 다름아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감독 민규동은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니체의 말을 빌려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게 삶이었단 말인가. 몇 번이라도 좋다. 끔찍한 생이여, 다시!’
두 번째 경우의 예로는 김해곤 감독의 영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들 수 있겠다. 제목 자체에서부터 확연하게 밀란 쿤데라의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르며, 쿤데라의 소설에서 ‘가벼움’이 삶의 유한성, 혹은 불확실성을 의미하듯, 이 영화에서의 ‘가벼움’ 또한 사랑의 유한성 혹은 불확실성을 씁쓸하게 변주하고 있다. 변승욱 감독의 영화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은 제목 자체에서 이미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의 냄새가 감지되며, 힘겨운 삶에 부대끼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며 사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는 내용 측면에서의 유사성도 확인된다.
세 번째의 경우로는 우디 앨런의 근작 <매치 포인트>를 들 수 있겠다. 테니스 강사인 ‘크리스’는 부유층 회원인 ‘톰’과 친해지고, 그의 여동생 ‘클로에’를 만나고 사귀면서 상류층의 삶에 포근히 안착한다. 그런데, ‘톰’의 애인, 육감적인 여자 ‘노라’를 만나면서 균열이 일어난다. 가난뱅이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그녀에게 급속히 빠져드는 크리스. 그러나 신분 상승 욕망을 버릴 수는 없다. ‘클로에’와 결혼하고, 장인의 회사에 취직하고 금세 중역의 자리를 꿰차는 크리스. 그 사이에 ‘톰’은 노라와 헤어지고 먼 친척과 결혼한다. 노라는 미국에 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고, 배우 오디션에 연거푸 낙방한다. 그런 절망 속에서 다시 만난 크리스에게 집착한다. 크리스는 노라를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마약과 금품을 노리는 범인으로 위장하여 노라의 맞은 편집 할머니를 죽이고, 우발적인 양 노라를 집 앞에서 죽인다. 인생에 있어 노력도 중요하지만 행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믿는 크리스는 덤덤한 눈길로 상류층 삶을 이어나간다. 영화의 절정 부분을 보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사람 가운데 라스꼴리니코프가 이웃집 노파를 살해하는 장면을 연상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궁금해진다.
세상사 서로 관계없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마는, 특히나 예술작품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한다. 그런 주고받음을 통해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영화를 보게 될 때 관객은 영화 속으로 좀더 깊이 있게 빠져들 수 있으리라.
성진/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현재는 논술강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