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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9 |
[최승범 시인의 풍미기행] 서울길에서 만난 동치미 맛
관리자(2007-09-15 11:16:46)
[최승범 시인의 풍미기행]  서울길에서 만난 동치미 맛 어린시절엔 동치미보다도 ‘싱건지’라는 말이 입에 익었었다. 동치미는 한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의 옛 문헌엔 동침(冬沈)·동침(凍沈)·동저(冬菹) 등으로의 한자 표기다. 김장김치와는 달리 삼삼하게 담근 물김치였다. 그래, 겨울 삼동에 먹으면서도 싱건지라 불렀던 것인가. 고향을 떠나 밖으로 돌면서는 싱건지보다도 이른바 ‘표준말’인 동치미를 선호하게 되었다. 집사람도 동치미라는 말을 일용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음식점에서도 일반적으로 동치미라 일컫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좋아했던 싱건지의 입맛은 늙바탕에도 동치미의 입맛으로 이어져있다. 그만치 평생을 두고 좋아하는 먹거리의 하나인 셈이다. 어려서는 겨울삼동에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알았던 이 먹거리가 오늘날에는 한여름에도 ‘운수 좋은 날’이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세상 참 좋은 세상이라고나 할까. 지난 8월초의 서울길에서 였다. 해학수필가(諧謔隨筆家)로도 유명한 김진악(金鎭嶽)교수, 도서출판 「시간의 물레사」 권호순(權好順) 대표와 함께 점심 약속이 되어 있었다. 「63빌딩」의 커피숍(Beans & Berries)에서 만나, ‘점심은 무엇이 좋을까’ 입을 떼기가 바쁘게 김 교수가 일어선다. ‘두 말 말고 나를 따르라’ 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돼지갈비집을 소개하리란다. 차에 올라 강서구쪽으로 20여분을 달렸을까, 넓은 로터리 옆 이색적인 3층의 큰 걸물 앞에 차가 멎었다. 알고보니, ‘발산역 3번 출구’의 앞쪽이다. 식당 이름은 「화로 참숯 불구이」(전화 02-3663-3292). 아래층 문을 들어서자 이건 숫제 한 식당의 실내라기보다는 큰 기업체의 무슨 작업장 같다는 인상이었다. 아래층만도 2백 명 남짓이 않을 수 있는 식탁·좌석이 배치되어 있다. 그 식탁마다엔 놋화로 숯불을 둘러앉아 네 사람이 즉석 불구이를 즐길 수 있고, 환기설비(후드·다크·신축성 호오스)도 갖추었다. 냉방도 잘 되어 식당 안 공기는 쾌적하기만 하다. 숯불 돼지갈비(1인분 9천원)에 냉면(5천원)을 청하였다. 상차림엔 싱싱한 야채(상추·깻잎·부추)와 마늘·된장·김장김치, 그리고 큰 오지그릇에 담긴 동치미가 놓였다. 김 교수는 동치미 맛부터 보라는 성화다. 앞에 놓인 빈그릇에 국자로 동치미 맑은 국물과 그 속의 배추·무·파·잣·배 등을 적당량 덜어내어 옮겼다. 국물 맛이라니, 청량담소(淸凉淡素)란 이런 맛을 두고의 이름인가. 어린시절 겨울밤의 싱건지의 저 맛에 비길 바가 아니다. 입안이 산뜻해 지는 것은 같다해도, 뭔가 입안을 도는 향기가 귀품스럽다. 배춧잎·무쪽·배 한쪽을 건저 먹어도 신신하고 사근사근하기만 하다. 겨울철의 동치미를 어떻게 이렇듯 저장·보관할 수 있었을까. 경이(驚異)롭기까지 했다. 참숯불에 석쇠 놓아 구워 먹는 돼지갈비도 흔치 않은 맛이다. 김 교수는 ‘오늘의 갈비 맛은 여느 때의 것보다도 덜하다’며 고개를 갸우뚱하였으나, 권대표는 ‘이런 맛 처음이라’ 했고, 내 입맛에도 맞아떨어진 미미였다. 냉면 2인분을 셋이 나누어 먹고 화롯불에서 꺼낸 고구마까지 후식으로 즐겼다. 이래저래 포만한 배를 쓸자니, 이 식당의 ‘세계적인 맛’으로는 돼지갈비보다 동치미를 내세우고 싶다. 저 동치미의 맛은 오늘도 내 입안을 강그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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