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8 |
[명인명장 | 내가 살아온 세상] 침선장 최온순 "더이상 좋은 순ㄴ 없어 바느실 허는 것이"
관리자(2007-08-14 19:58:50)
침선장 최온순
“더 이상 좋을 수는 없어 바느질 허는 것이”
구술 최온순 ㅣ 정리 최정학ㅣ 사진 유백영
지금이야 넘쳐 나는 것이 옷이지만, 50년도 채 안된 과거에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족과 자신들의 옷을 직접 해 입었습니다. 바느질이라는 것이 여성들에겐 고된 가사일 중의 하나에 불과했겠지요.
그러나 바느질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열세 살 때 직접 저고리를 해 입어 동네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하더니, 결국은 평생 바늘을 손에 달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1998년 전라북도지정 무형문화재 제22호 침선장 보유자로 지정된 최온순 할머니입니다.
올해 나이 일흔하나. 이제는 바느질을 그만 둘 때도 되었지만, 오늘도 최온순 할머니의 손에는 바늘이 들려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바느질 허는 시간이 젤로 행복한 시간이고, 바느질을 허므는 아픈 것도 다 사라지고 잡념도 없고, 그렇게 혔는디. 내가 이것을 어떻게 그만둬”
하고 싶은 일을 평생 동안 했으니,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온순이가 지가 지 저고리를 해입었단다
군산시 옥구면 임피면 술산리에서 9남매 중에 여덟째로 태어났어. 호적이 37년도에 되고, 지금 나이로는 2년 후에 저 12월 28일로 되았지. 아 구남매나 된게, 그리고 임피읍내에가 면사무소가 있고 우리는 임피역있는데가, 10리도 더되는데가 면사무소가 있으니까, 아저 구장더러 가서 허라했댜. 옛날이는 구장이라 했어, 지금은 동사무소 통장 그런 사람더러 구장이라 했어. 그 지역을 맡은 구장. 그 사람더러 가서 출생신고 좀 허고 오라고 그렇게 했댜 옛날에는 그렇게 했어. 첫딸을 낳다던가 허야 귀허다고 딸낳아도 그렇게 허는디, 나는 여덟 번째 딸인게 뭐 그렇게 귀했겄어. 그리고 죽을랑가 살을랑가도 몰라가꼬 늦게 호적도 허고.
그렇게 허고 쭉 인자 초등학교를 댕기는디, 늙은 어머가 바느질을 해준게 신식 바느질을 안해주지. 신식바느질은 이렇게 저고리 기장도 인자 짧게도 입고 그런땐디. 신식바느질을 안해주고 그렁게 인자 내가 맘에 안들었어. 그래서 내가 해입는다고 그렇게 허고 열세살 때, 초등학교 5학년땐가 되는디 내가 해입었어. 내가 해입고서는 친구네 집에를 가니까 그 친구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가 헌 솜씨가 아니었던 것이지. “너 저고리 누가혔냐.” 그래서 “제가 혔어요.” 그러고서내는 막 얼굴을 붉힌게. 막 나를 앞뒤로 둘러서 시어놓고는 막, “아이고, 온순이가 이렇게 혔단다. 온순이가 지가 지 저고리를 해입었단다.” 그랬더니 막 챙피해 죽겄네 친구들은 많은디 얼굴을 뻘개져갖고. 그것이 내가 생생허니 머리에 떠올라 그렇게 했다든 것이. 그때가 5학년땐가 됐을꺼여.
그렇게 허고 그 뒤로도 바느질 많이 했지. 그러고 인자 6학년 졸업허고는 6.25였었어. 그래가지고 인자 진학은 못허고 우리 동네는 도시에가 있는것도 아니고 한 십리씩 나가야 있거든. 여그서 기차는 있었어. 그런디 폭파, 6.25 이리역 폭파 사건으로 인해서 인자 기차가 안다니지. 그렁게 우리집에서 군산학교를 갈라믄 30리는 걸어야고, 이리로 올라믄 20리는 걸어야는디. 인자 6.25로 인해서 학교는 못가고, 6.25가 지난 가을에쯤 양재학원이라고 이리에가 있었어. 문화양재학원. 그걸 인자 우리 마을에서 사람들이, 친구들이고 언니들이고 가길래, 나도 인자 거그를 따라서 갔어. 그때는 한복학원은 있도 않고, 그 학원이 쪼금 여성들헌티는 갈만한디다 그런정도 혔어. 그렁게 인자 중학교는 못가고 거그를 갔어.
그때는 교복도 다 혀입었어
거기를 가가꼬. 예과 본과를 졸업을 했어. 거길를 가는디, 우리집이서 20리를 걸어야 혀, 거거를 갈라믄, 이리를 갈라므는, 임피 술삼리에서 20리를 걸어가야 익산이 나와. 익산 거그 문화양재학원 갈라믄. 학교가 양재학원이라고 해야 창고에다가 뭐 옛날 판자만 있는 책상 하나씩 놓고 학원이라고 그렇게 했어. 그리도 학생은 많았어. 한 30명씩 그렇게 있었어. 그걸 갈라믄 그냥 집이서 새벽같이 밥을 먹고 도시락 하나 싸가지고. 막 넘 가는디로 막 따라거 가는거여. 근디 길에가 다 걸어서 가기 때문에 사람은 많앴어. 남자 여자 헐것 없이 다 이리로 가느냐고 그렇게 간게, 그걸 따라서 가가꼬. 점심 때되믄 그 차디찬 도시락을 기냥 하여튼 그렇게 맛있고 먹고 그렇게 다녔어. 거기서 인자 많은 걸 배왔지. 양재, 양재 학원 이니까. 한복학원은 없었어. 그 시절에는 이리에는 한복학원은 없었고, 그냥 양재학원만. 그것도 초창기였을꺼여. 그때 인자 6.25 직후 세상이 시끄럽고 긍게, 학교를 제대로 못가는 사람들이 그냥 놀을 수는 없응게 양재학원에 갔어.
그때는 와이샤츠도 사서 별로 안입고 만들어 입었어. 와이샤츠를 젤로 많이 헌거 같애. 와이샤츠, 바지, 또 애들 옷, 여자 브라우스, 그런 것을 주로 했어. 그렇게 헌게, 그것도 어느정도 헌게 그냥 그것도 조금 그러더라고. 그때 내가 와이샤츠를 허로 어느 가게 쪼금 있었기도 혔고 그런디. 또 그때도 어떻게 생긴 것인고 쫌 아펐어. 그리서 참 갔다가 얼마 안있다 도로 오고 그랬어.
그런디 그때는 교복도 다 혀입었어. 광복에다 물들여서 이 껌정 남학생 교복을. 근디 원불교서 운영허는 일산 선생님이라고 그 선생님이 운영허는 고아원이 있었어, 고아원. 그때 나하고 어떤 사람허고 서니. 최정옥이라는 사람허고, 이 최온순이 허고 또 어떤 사람허고 이렇게 서이 거그 가서 그 고아원 학생들 광목에다 염색을 혀가꼬 교복을 해줬어. 추석당한다고 교복을 허라그러더라고, 추석빔으로. 추석이 당한다고 이 광목이 국가에서 나왔는가봐. 그것을 거그서 검정물을 들이고 있더라고. 들여가지고 그것을 손질을 혀서 교복을 허는디. 거 가서 교복을 몇 달간 혔을꺼여. 몇 달간 그 교복도 혔어.
그렇게 허고 인자 나와가지고 그래저래 허다가. 인자 바느질을 열심히 허게 되았지. 이 한복은 그치지 않고 그냥 허고, 이 양재학원을 나오니까 한복허는디 많은 도움이 되지, 배운것이라. 어 지금은 한복학원이 생겼거든, 긍게 학원에 가서 제도허는 것이랑 보믄, 양재학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것이 훨씬 순리대로 허고, 말을 알아 듣것더라고. 도움을 많이 봤어. 양재학원 도움을 많이 봤어.
당신 손은 하여튼 히얀혀
그렇게 허고 인자 돈도 많이 벌고, 결혼도 혀서. 인자 시집을 가니까. 스물두 살 때 갔었는디. 내 옷은 한복은 다 해입었지 인자 스물두살이나 먹었으니까. 그때는 너나할 것 없이 자기옷은 자기가 혀입었어. 자기옷은 자기가 혀입었어. 그렁게 뭐 바느질 허는 것이 큰 별스런 것도 아니고 그냥 혔지. 근디 시집을 딱 가니까 열 네식구 있는데로 시집을 갔었어. 그때는 가정이 그렇게 했으니까. 형님이 육남매 났지. 내가 또 애기하나 났지. 또 일하는 일꾼있지. 시누이 있지. 하여튼 열네 식구 밥을 해먹었어. 그렇게 허니까 그래도 형님이 주로 부엌일이랑은 당신이 많이 허시고, 나더라는, 그때는 식구들이 다 한복을 입었으니까 바느질이나 하라고 그렇게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부엌일은 그렇게 많이 허지는 않았어.
그랬는디 우리 시누가 과년 차갔고. 혼기가 되아갔고 인자 시집을 가야하는디. 옛날에는 농지기라고 저고리도 열개, 앞치마도 열개, 버선도 열개, 평생 입을 옷을 하여튼 다 혀가다시피 그렇게 시집을 갈라믄 그렇게 했어. 혼수가. 그렁게 인자 중간에 없어져가꼬 이렇게 되았지. 그렇게 혔는디, 그 내가 인자 분가를 해야하니까. 작은 며느리니까 분가를 해야하니까. 시어머니께서 “너는 바느질만 혀라” 이렇게 허드라고. 그렁게 여그는 이렇게 혀라 저그는 저렇게 혀라 해가꼬 바느질을 많이 혔지. 일년간 허는 동안에 나도 모르는 바느질도 배우고, 우리 시어머님 솜씨가 좋고 참 얌전허시고, 잘 갈쳤어. 옆에다 놓고 이렇게 해주면서 이렇게 재단해라 이렇게 해라 알켜주고. 이렇게 해서 시누 결혼 준비허는 옷 허느라고 많이 혔어.
그렇게 헌게 내가 인자 바느질 잘하는 사람이 되아가지고 동네사람들이 옛날에는 바느질이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 그냥 허기는 했지. 자기꺼 자기나 혔는디. 그래가지고 이웃집 사람들끼리 입소문이 인자 퍼져가지고 그 사람들이 나한테 부탁을 많이 혔지.
그전이는 우리 가족들 옷만 했는디, 그 후로 남의 옷을 허게 됐어. 남의 옷을 허니까 인자 수입도 있고, 날 새고 바느질 하는 날은 보통이고. 옛날이는 예를 들어서 지금 같이 야유회를 간다든가 하므는 한복을 꼭 혀입고 갔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겄지만, 하여튼 그래가지고 봄 가을 당하믄 그 사람들 옷을 해주느라고 날밤 새는 날이 많고, 저녁에도 그냥 옷감 갖고와서 “낼아침에 꼭 안갈라고 했더니 가게 되았다”고 옷을 꼭 해달라고 그러믄, 아니 “밥허는 시간을 줘야 밥이 나오지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허믄 어떻게 하냐”고 하므는, 그렇게 됐다고 막 해돌라믄, 잠을 안자고 해노므는 아침에 와서 막 입고 좋아해요. 그러믄 나도 보람도 있고, 좋고. 그렁게 우리집 양반이 “당신 손은 하여튼 히얀혀” 그렇게 칭찬도 해주고. 그렇게 많이 혔어.
그러고 인자 가사에 도움도 되고, 애들이 용돈달라고허믄 그냥 돈없단 소리 않고 주기도 허고. 애들 교육시키는디 큰 도움은 못됐지만, 그래도 도움이 됐지. 그렇게 해서 쭉 헌게 인자 지들헌티 나는 피해준 것이 미안허지. 좁은 방에서 바느질을 헐라고 허믄, 시끄럽고 수선스럽고, 밥도 제시간에 못해주고 그렁게 애들헌테 미안허고. 그러나 애들이 삼남매가 바르게 잘 커줬어. 그렁게 고맙지. 긍게 저들이 다 크고 공부도 끝나니까, “어머니 너무 수고하신게 바느질좀 안허믄 안되겄어요. 우리도 이만치 인자 할일을 할 수 있으니까 인자 그치믄 좋겄네요.” 그렇게 허고, 내가 인자 외출도 못허고, 바느질 헐라믄 외출도 못허고 그러지. 그러니까 인지 우리집 양반도 애들도 교육도 끝났응게 인자 그만하라고.
그렇게 해서, 그래도 나는 바느질 허는 시간이 젤로 행복한 시간이고, 바느질을 허므는 아픈 것도 다 사라지고 잡념도 없고, 그렇게 혔는디. 내가 이것을 어떻게 그만둬 허고, 그러믄 내가 내손으로 헐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서 전시회를 한번 혀봤으면 좋겠다. 너들이 그때 인자 외국 여행댕기고 그럴때였어.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보내준대. 그래서 “나 외국여행 싫다. 내가 할 수 있는,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만들어서, 내가 전시회나 하나 열어 둬라.” 인자 애들헌티 가족회의에서 그렇게 했어.
바느질을 그렇게 놓을 수가 없더라고
그렇게 헌 다음에 한 일년을 준비를 했어. 그때가 95년도 그때쯤 됐지. 그때는 인자 늦기도 허고, 그만해도 될 때고, 그래도 그냥 바느질을 그렇게 놓을 수가 없더라고. 해야지. 그래서 한 일년간 준비를 했어. 내 나름대로 그때까지는 친정어머니 시어머니헌티 배웠지. 스승님헌티는 안배왔어. 그때까지는. 스승님헌테 배울지도 모르고 그냥 책만 사다가 나혼자 했지. 그러고, 93년도엔가 테레비를 보니까 테레비에서 한복 기능사 자격증 시험이 있다고 그래. 그래서 인자 서울에 사는 우리 동생헌테, “그런 책이 있다더라, 그 책 좀 사서 보내주면 어떻겄냐.” 했더니, 세권으로 된 책이 있어. 지금도 그걸 보고 공부허지만. 그걸 사가지고 그때 손자 키면서 공부를 혔어.
그때는 몇살이나면 쉰일곱 살 먹었을 때네. 쉰일곱 살 먹었는디, 인자 바느질은 못허지 애기 키운게. 애기 키워야지 밥해먹어야지 그렁게 며느리하고 같이 살고 그렁게. 그랬는디, 인자 애기 자고 그러믄 저녁에 일어나서 인자 식탁에 앉아서 나는 공부허고, 아들은 그 옆에방에서 공부하믄서 “어머니 주무시지, 피곤허신디 주무시지 뭔 책을 그러게 봐싸요.” 그런디. “상관말어, 너는 니 일이나 하고 나는 내 일이나 혀.” 나도 그 예들어서 살림을 혀도 내 살림이 아니잖어. 며느리 살림이잖여. 그렁게 내 속으로 재미가 없지. 그렁게 나도 공부를 해야겄지.
그래서 그렇게 공부를 허고, 시험을 보러. 여그 그전에 공고가 있었어. 여가 공고가 있는디, 그때 그런 시험을 기능사 시험을 여그 공고에서 보는디. 그 접수를 허로 간게. “어? 그런 시험은 없는디.” 그러더라고 그서 “아 있다고 해서 왔는디 왜 없냐고.” 그랬더니, “그럼 당신 하나 접수헌다”고 그러더라고, 하튼 접수를 해돌라고 그랬더니, 그걸 딱 인자 시험요강을 보더니 55세로 마감이더라고, 그런디 내가 57세가 됐거든. 그래도 하여튼 그래도 나 볼란다고 그렇게 허고, 우리집 양반이 차에다 태서 여그다 놨는디. 고등학교 학생만 있는거여.
농고 공고 뭐 그런디, 상고 그때 상고가 많았거든. 그런 고등학교 학생만 시험보러 왔는디, 내가 딱 들어가서 앉었응게, 시험감독이 죽겄는게벼. 이 안경을 쓰고 서나는 돋보기를 쓰고 이러고 앉었응게, 둘이 막 서갖고. 야들은 쓰고 나갔는지 안쓰고 나갔는지 다 나가버리고 없는디 나만 앉었거든. 시간이 안됐응게 나는 앉었지. 그랬더니 “아주머니 시간 다됐는디”, 그리서 “알았어요. 내 옆이가 있으믄 나 신경써요. 죽겄구만, 왜 내게만 있냐”고 그랬더니. 인자 벨이 울리더라고 그래서 냈어.
그래도 인자 내가 공부해서 아는 것이 많이 나왔어. 오엑스 문제도 나왔는디, 지금 거시기 애들 수능시험보드끼 그렇게 생겼는게벼 아마. 그런 시험은 내가 또 첨보지. 그서 인자 시험을 봤어. 그랬더니 인자 우리집 양반이 “떨어져도 괜찮어. 당신이 시험봤다는 것이 그것이 장허네” 그렇게 허고서나는. 그래서 며칟날 발표가 있잖어. 생년월일허고, 수험번호하고 누르믄 그게 나오드만. 요새도 그렇게 헌다데. 그래서 그렇게 눌른게 요렇게 나온거여 “죄송합니다. 귀하께서는 연령탈락입니다.” 연령탈락이댜. 어, 55세로 그게 허는데, 내가 57세로 봤잖어. 어떻게혀 그냥 말았지. 그렇게 허고. 내 그때 책으로 공부허는 것은 처음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