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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8 |
[명인명장 내가 살아온 세상] “더 이상 좋을 수는 없어 바느질 허는 것이” Ⅱ
관리자(2007-08-14 19:56:08)
침선장 최온순 “더 이상 좋을 수는 없어  바느질 허는 것이” 구술  최온순 ㅣ 정리  최정학ㅣ 사진  유백영 박물관이란 박물관은 다 다녔어   그 후로 인자 며느리허거도 같이 안살고 그렇게 해서 작품을 준비해가꼬, ‘전라도의 평민의 옷’, ‘전라도 호남지방의 평민의 옷’, 그 후로 인자 내 나름대로 박물관이란 박물관은 다 다녔어. 전시 준비허느라고 나 혼자 준비허느라고. 광주민속박물관, 국립박물관, 온양박물관은 뭐 수차례 갖다오고. 뭐 작품헐라고 하는데 맥히믄 스승이 없으니까 박물관에가서 쳐다봐야 하는거여. 박물관에가서 쳐다보는디, 진열장에가 들어있지 밖에 나와있는게 없잖여. 만져도 못보지, 펼쳐도 못보지.   굴건제복 허는디. 굴건제복, 이게 부모님 돌아가셨을 적의 슬픔을 마음에 안고 입는 옷이여. 상복은 껌정옷도 상복이라 할 수 있고, 흰옷도 상복이라고 헐 수 있고, 그러나 이 굴건제복은 뾰쪽뾰족허기도 허고, 머리에다가 수질 요질 다 갖춰서 입는 것을 굴건제복이라고 혀. 이것을 허는디 그렇게 힘들었네.   요것을 어떻게 했는가를 몰라갔고, 안동박물관에도 가고, 하여튼 박물관이란 박물관은 다 꿰고 돌아다녔어. 거기다가 하여튼 일년 동안 신경을 썼어. 그랬는디 인자 이사람 저사람더러 내가 굴건제복을 해야겄는디 허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했더니 우리 친구가 저 성산면에가 자기네 시아제가 하나 있는디 그사람이 노옹렬 씨여. 그 양반이 그걸 하시더라고 거그 가보라해서 거그를 우리집 양반하고 전화번호 하나 갖고 찾아가는디.   임피 읍내까지는 인자 길이 좋으니까 갔는디, 거기에서 차타고 뭐 3키로쯤 오다가 주요소 있으믄 거기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틀어가지고, 하여튼 어떻게 거그를 찾아가는디 힘이 들어가꼬. 그 할아버지도 잘은 알켜줬지, 차는 어디에다 받치고,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오므는 세 번째 대문에 파란페인트 칠헌 집이 있다고 그리 오라고.   그서 갔더니 그 양반이 옷을 깨끔허기 입고 앉아 계시더라고, 그럼서 창호지 한권을 갖고랴. 문종이, 찬지. 그래서 그것을 사갖고 갔더니, 당신이 인자 재단을 해주더라고, 나는 인자 삔으로 꼽고. 그런디 그양반 같이 잘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하여튼 전라북도에는 없어 아무리 찾아봐도. 그양반이 그렇게 해줘가지고, 거그서 그것을 내가 터득을 혔지. 그러고 집에와서 잊어버릴까 싶으니까 저녁에 또 했어. 창호지, 한지에도 또 옷을 했어, 한지로. 잊어버리니까 자꾸 해야지.     그런 것을 첨봤다 이거여   그러자, 말이 어떻게 쪼끔 넘어갔는디. 이 호남지방 민가의 옷, 그 돌아댕겨 보니까, 궁중옷은 다있어. 궁중옷은 박물관마다 다 소장되어갖고 좋게 놨는디. 민가옷은 있는디가 별로 없더라고. 그래서 내가 눈으로 보고 입고 만들 수 있는 그 민가옷을 만들자 그렇게 목적을 두고 그것을 했어. ‘요람에서 무덤까지’ 제목을 어머니께 받은 유산 요람에서 무덤까지 제목을 그렇게 해서, 전시를 허게 됐어. 전시를 여기 풍남제때. 그때 38회 풍남젠가 됐을꺼여. 거기서 초청전, 나늘 인자 그것을 헌다고 헌게, 그양반이 돌아가셨구만, 그양반이 나를 초청해서 예술회관에서 8일간 했는디. 그때 어떻게 인기가 좋았던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그런 것을 첨봤다 이거여 그때만혀도. 중고등학교 유치원 애들이 그렇게 많이 와서 보고. 그 팜플렛을 이렇게 한 하루에 5백장씩 해노믄 그것이 불티달아나듯이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왔어.   그렇게 허고 그것을 숙명여대 박물관에다 기증을 혔지. 숙명여대에서 한달 간 또 전시를 허고, 숙명여대에다가 기증을 혔어. 그렇게 헌게 나는 평민의 옷만 혔지. 인자 값진 옷은 못했지. 그런게 거그 선생님이, 숙명여대 김태자 선생님이 “선생님은 솜씨는 좋고 그렇지만, 말하자믄 내놓을게 없다.” 그러더라고, 평민의 옷이라 그러고, 나는 스승한티도 안배우고 나 혼자 했기 때문에, 남한테 치하는 받지만 그냥 솜씨 좋은 것으로 끝난게 그러지 말고 공부를 더 해서, 문화재도 되고 명장도 되고, 그렇게 해서 공부를 더 허라고 그러더라고. 나는 인자 숙명여대 줄적에는 바느질 도구까지 싹 주고, 나는 인자 일평생 바느질 안혀 그렇게 다짐을 허고 줬는디 인자 더허게 되았네. 내가 허고 싶어서 헌 거여 이것은   한국 복식학교 회장이라고 박경자 회장님이 있었어. 나는 스승도 모르고 그러는디 누구한티 어떻게 배우냐고 했더니, 김태자 선생님이 그 선생님허고 연결을 시켜주더라고. 그러고 복식사도 알어야 하고, 또 깊은 옷도 왕실 옷도 알아야하고 공부를 더 해야한다고. 그렇게 해서 문화재도 되고, 그렇게 혀야지 여그서 그만허믄 어떻게 되냐고. 그렁게 사람이 또. 근데 사람이 그것이 하기 싫으믄 안헌디.   나는 그거 하는 것이 좋거든. 더 이상 좋을 수는 없어 나는 바느질 허는거. 여그서 지금 제자들 갈쳐도 이럴때는 아이고 나 피곤혀 피곤혀 해도 가서 자고나믄 쏙 허니 여그를 오고 싶어요. 오믄 또 즐겁고, 하루해도 금방가고. 긍게 늙어서 그 하루해 금방 가는 것도 복이지. 그래가지고 하는디, 천부적으로 내가 타고난 것 같애. 그런 것이 누가 허라해서 헌 것도 아니고, 우리집 양반이 공직에 있으니까 생활은 다 해결할 수 있는디. 그것이 아니라 내가 허고 싶어서 헌 거여 이것은.   그래갖고 박경자 교수님헌티 3년간 복식사를 연구를 혔어. 그 선생님한테 배웠지 그렁게. 그룹으로 혀가지고 인자 조교 교수들허고 나하고 혀서 화요일날이믄 그 교수님댁에 가서 공부를 혀. 그러던, 공부허던 도중에 단국대 박물관 이 복식에 대한 바느질을 갈킨다고 그런 제보를 받았어. 단국대 석유선 박물관에서 전통복식 바느질을 가르친다고 그것을 보고, 그 교수님이 여가서 “당신이 나한테 오므는 나는 종우때기 한 장도 못줘.” 개인지도, 가정에서 하니까 못주지 학교같은데서나 줄까. 못주지 그렁게 “나는 당신이 이렇게 머나먼데서 공부혀도 종이한장도 못줘, 그러나 거기에 가므는 체계적으로 배우고 유물도 많고, 거그는 유명학 교수님들이 많으니까 거기 가서 배우라”고 그래서 거그 일년 과정으로 등록을 했어.   그래가고 배우고, 또 재차 등록해서 또 배우고. 거기는 일년 과정으로 졸업을 허믄, 내년에 배운 것을 또 배우는 것이 아니여 딴 작품을 배워. 근데 거기는 복식사도 허고, 유물을 많이 취급을 혀. 거그는 유물이 겁나게 많여. 고부자, 박성실 그분이 이렇게 일년 과정을 하믄 아주 짭짜름허게 바느질을 아주 최고로 갈쳐. 근디 거기에서 유물 접하는 것도 나는 거기가서 첨으로 접했지.   5백년 묵은 유물 어디에서 나왔다. 거기는 여기서 바느질 하믄 그냥 이렇게이렇게 혀 허는디. 거기는 몇년전에 몇백년 전에 어디에서 누구 무덤에서 출토된 무슨 옷이다. 그렇게 족보가 쫙 있어. 옷 한가지를 허드래도. 그렇게 해갖고 배운게 뭐 충분히 배웠다고 헐 수가 있지. 그러나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여 지금 마음은.   근디 그걸 배우러 갈라믄, 그때는 인자 우리집 양반 때문에 이리에 살때거든, 5시 25분차 타고서는 가방하나 짊어지고 마~악 가는거여. 그러게 타고 가면, 서울역에 9시 10분이나 도착하거든. 9시 30분에 수업이 시작이 되. 그러믄 거그서 저 8-3번을 버스를 타, 그러믄 단국대 오므는, 계단이 2백 몇 개여, 그걸 막 올라가므는, 아무리 겨울에도 땀이 막 나는거여. 그렇게를 2년을 댕겼어. 그래서 그렇게 허고 그러는 도중에 인자 여러 교수님들도 나이에 비해서 너무나 열심히 헌다 그렇게 해갖고서나는 인자 많이 나를 이뻐하고 도와줬지. 그렇게 해가지고 문화재가 된거여. 다 가르쳐주고 가야겄다   긍게 이 문화재를 막 내가 허고 싶으다고 그래서 맥없이 허는 것은 아니여. 천부적으로 타고나야 허고, 또 문화재는 바느질도 잘해야 하지만, 이 바느질이 굴건제복이 이 사람이 안허믄, 내가 노옹렬 옹헌티 전수받아서 했기 때문에 현재 그것이 살아 있지, 그림으로는 있지, 그림으로는 있지만, 손으로 전수허는데는 없거든. 내가 그렇게 알아볼라고 그래도, 책에가 그림으로는 있어. 그래도 그것을 어떻게 허는지 도면으로 된 것은 없더라고. 그래갖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허고, 나는 상례품 수의 하고 굴건제복허고, 굴건제복은 요즘에는 많이 안입지. 그러지만은 사라져가는 우리 옷을 이 사람이 이어간다, 그것으로 문화재가 된 것이여.   바느질 잘허는 사람, 남부시장에 있는 사람 바느질 더 잘혀, 돈도 잘 벌고.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 그러고 수의를 주로 허고, 지금도 수의 특강을 허고 있거든. 남자야 한세트 그거 열일곱가진가 열아홉가진가 되아, 수의가 그것을 한세트라고 글거든. 한세트하고 여자야 한세트 그러게 할라믄 석달은 갈켜야 겄더라고, 날마다 안허니까. 거의 석달을 허야 그것을 다 갈치겄드라고. 글서 저 사람들이 지금 욕봐.   수의는 내가 해서 판매도 허고, 주문이 들오니까 판매도 허고, 또 제자들 갈치기도 허고 그렇게 허고. 내가 인자 궁중복식 같은거 그런거 간간이 하나씩 작품 맨들어서 놓지. 나는, 다른 사람은 작품 내놓으믄 팔기가 무섭게 팔아쌓드만 나는 안팔어. 작품 맨들믄 내가 소장하고 있어. 그거 작품 하나썩 맨들라믄 2백만원썩 들어. 옷감도 들여야지, 거그에 부속품이 다 달려갖고 해야지. 긍게 한 작품이 완성되게 할라믄 2백만 원 정도는 잡어야 혀. 근디 거기다 내가 투자할 수가 없지. 그래도 나는 하고 싶으니까 한 작품씩 해놓지. 작년에도 한 작품. 올해도 지금 두 작품 헐라고 준비만 해놨어. 아직 여름이나 가믄 인자 해야지.   그전에는 인자 바삐 일도 하고, 활동도 많이 했는데, 외국에 다니면서 전시도 허고 그러고 했는데. 지금은 몸도 성치 못허고 허니까 지금은 한옥마을에서 제자들 갈치고, 또 활동할거 있으믄 활동허고, 그래서 뭐 특별히 크게 하는건 없어. 그리고 내가 살으믄 얼마나 살을라는지도 모르겄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가 알고 있는건 내 후배들헌테 다 가르쳐주고 가야겄다 그런 희망으로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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