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7.8 |
[신귀백 영화엿보기]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롤리타!
관리자(2007-08-14 19:35:37)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롤리타! 시벨의 일요일(1962) 갈 수 없는 나라 피겨 요정 아무개의 연기는 아름답다. 소녀의 우아한 댄싱 사이사이에 몸이 보인다. 시니어의 빙판에서 발육이 늦은 그녀의 몸을 좇던 눈에게 뒤따라오던 마음이 불편함을 알린다. 덜 자란 여성의 아름다운 동작을 몸과 분리해서 보는 수치심을 서양에서는  ‘롤리타 콤플렉스’ 라고 한다던가. 멀쩡한 남자어른이 어린 여자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예술은 자주 이 미친 콤플렉스를 다룬다. 이 미친 짓을 펜으로 갈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롤리타』는 지금은 포스트모던 문학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버젓이 꽂혀있는 소설이지만 한 동안 논란을 빚은 작품. 재미있다. 12세 소녀 롤리타에게 성적 욕망을 구현하는 대학교수가 여행을 다니면서(사실, 쫓겨 다니면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 중년 남자의 집착과 자책, 그것을 적당히 컨트롤하는 여자아이의 심리묘사가 탁월한 이 소설은 금기를 건드리기에 잘 읽힌다. 그러나 컬러로 만들어진 애드리안 라인의 영화 <롤리타, 1997>는 적당히 관음증을 자극하지만 소설의 긴장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바짝 마른 제레미 아이언스의 고뇌에 찬 얼굴은 기억나지만 소녀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어린 여배우.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에서 파마머리에 선글라스를 쓴 12살의 조디 포스터는 어린 창녀 역할을 소화해 낸다. 사악하기보다는 철없음이 컨셉이었을 것. 하나 더, <레옹>에서 단발머리에 화분을 들고 다니던 단발머리 소녀 마틸다. 노슬리브 티셔츠를 걸친 이 한참 크고 있는 여자애의 작은 젖가슴, 두툼한 입술의 압박, 깊은 눈이라니 ……. 다, 만지면 안 되는 유리그릇들. 이 두 미성년 여자 아이를 두고 레옹이나 로버트 드니로는 멋진 사나이답게 성적 욕구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군자다. 이들의 관계는 자애로움과 천진함을 교환하는 관계이기에 성에 대한 부분은 거의 무심하다(아니, 감정의 움직임이 없는 이 위로받고 싶은 고독한 중년 남성들은 무관심한 척 하는 것은 아닐까?). 어린 여자 아이를 등장시켜 세상의 구린내를 정화시키려는 외로운 주인공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는 감독의 포석이 여기 있을 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여기 어른의 초입에 에스트로겐보다 사춘(思春)이 먼저 시작된 소녀가 있다. 주인공 프랑소와즈(시벨)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열두 살짜리 기숙학교 학생. 말이 기숙사지 고아원에 맡겨진 이 불행한 여성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른다(no body :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번역되는). 혼란스러운 전투기 조종사의 몽타주로 진행되는 크레딧 시퀀스는 그의 기억상실에 관한 플레시백을 대신하는데 원인적 내용만 암시될 뿐. 이 전직 파일럿은 전쟁 후유증으로 생긴 악몽과 현기증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금기를 터뜨리지는 않고 비껴가겠다는 감독의 설정.   정호승이 그랬던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이 외로운 두 사람은 기차역에서 인연을 맺고 고아원에서 다시 만난다. 인간은 자기보존충동의 대상이 상실되었을 때, 상상적 혹은 환각적 방식으로 대체물을 찾는 법. 일요일에 만난 이 덜 자란 여자애는, 아저씨가 마들렌과 결혼한 것은 아니니 그녀가 질투할 수는 없단다. 이건 환상이 아니다. 앙큼하다. 자기 존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수동태의 중년남자 피에르는 시벨과 함께 호수 주변 숲에서 매주 일요일 데이트를 하는데, 그들의 낙원은 영화 속 언어처럼 코로가 그린 숲을 닮았다.     웹스터 여사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의 저비스 펜던튼 아저씨는 주디에게 등록금을 대주지만, 우는 아이에게 겨우 별구슬을 주는 이 선한 남자는 그녀의 한없는 재잘거림을 들어준다. 볼을 부비고 안아주기도 한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랑이다. 어떤? 물속에 비친 나무숲에 그 해답이 있을 터, 나르시시즘! 이 어린 아가씨, 나중에 아저씨와 결혼하겠단다. 사랑을 받으면 자존이 상승하는 법. 빛이 쏟아지는 큰 나무숲 호수가에서 피에르는 시벨을 통해 삶의 희망을 이어간다.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하는 것이 그 증거.   복도 많아라, 이 아저씨에게는 마들렌이라는 지적이고 헌신적인 여인이 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사회질서 속 언어에 포함되지 않는 그를 내 남자라고 믿고 피에르를 사랑한다. 그러나 과거와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그를 현실의 세계에 적응시키고자 하니 맨날 징징댈 밖에. 이 미인의 키스를 거부하는 무심한 남자는, 빠삐용처럼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괴로워하며, 마들렌이 욕망하는 바로서의 존재를 거부한다. 스카프를 맨 외로운 여자 마들렌, 아름답다. 갈 수 있는 나라. 월요일이 없는 사랑      아동애는 근친상간에 가깝게 사회적으로 금기시된다. 당연히 탈성욕화된 승화로 방향을 잡아야 하기에 이 러브스토리는 나르시시즘의 판타지로 변형되다가 비극으로 끝낼 수밖에. 나무에 칼을 꽂으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겨울 호숫가 장면은 낭만적이다 못해 허망하다. 크리스마스트리를 훔치고 교회 지붕의 수탉조각을 떼어내는 퇴행적 행위를 보이던 외로운 남자와 여자가 소통하는 방식은 마들렌을 둘러싼 타자들과 충돌하며 파국으로 치닫는데.   세상 같다. 아버지 아닌 중년 남성이 어린 여자애와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성적 위협의 잠재적 일탈자로 보는 타자들의 시선 말이다. 결국 이 가련한 연인들의 아름다운 숲은 주위 사람들의 혐의와 경멸만으로 얼음덩이의 실낙원이 되고 만다. 아동학대 내지는 성도착자로 의심받은 그와 여자아이는 낙원에서 추방되는 것. 크리스마스 저녁 촛불잔치를 벌이던 피에르는 시벨이 보는 앞에서 월요일에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육체에 대한 통제력을 갖춘 이 남자, 어린 여성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질서를 파괴한 죄목으로 사회적 사형을 당한 것. 죽은 피에르 곁에 모인 사람들이 시벨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나는 더 이상 이름이 없어요(nothing)."라고 울부짖는 엔딩. 의미화 하는 타자의 현존에 의해서만 자신을 의미화 할 수 있다는 말일 것. 라캉 아저씨의 말대로, 사랑이란 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기에, 이 여성에게는 더 이상 호명해 줄 사람이 없기에, 나씽이 되는 것. 이름 불러줄 사람이 없어 꽃으로 남지 못한 여자 아이는, 운다.     이 영화 흑백, 충분히 컬러시대임에도 흑백으로 간 것 자체가 관음을 건드리지는 않겠다는 의도. 마들렌은 속옷을 걸치고 나와도 아름답지만 이 어른스러운 아이에게는 모자와 겨울 외투를 꼭 껴입은 모습을 오래 비춘다. 욕망보다 정서에 기대겠다는 것. 마르그리뜨 뒤라스의 <연인>에 나오는 비쩍 마른 여자애의 벗은 몸은 아름다움 뒤에 따라오는 감정의 불편함을 노렸겠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끝까지 점잖음을 유지한다. 불빛에 감추어졌다 드러나는 불안한 얼굴을 한 배우의 감정을 충실히 따라가는 카메라는 주인공들을 화면의 정면에서 약간 비켜난 채로 붙든다. 당연하다. 특별한 사건이 존재하는 영화가 아니기에. 중국이 밀어붙여버린 티벳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는 티벳식 타악기 음악과 마들렌의 집 문에 붙은 모란을 그린 동양 그림은 트위스트 리듬에 맞춘 범퍼카 장면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 영화가 고민하는 부분은 ‘미국 롤리타’와 다르다는 것. -------------------------------------------------------------------------------- 대학, 오래된 TV 영화 권하는 사람, 정영일   <대부> 시리즈를 보면서 청춘을 보낸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알 파치노가 엘리트 갱으로 등장하던 시절, 평일에는 라디오를 듣고 주로 토요일과 일요일만 텔레비전을 보았을 터. 그 주말, 9시 뉴스를 시작하기 전 쯤, 콤비 저고리에 노타이 혹은 터틀넥 차림을 한 중년의 신사가 뿔테 안경을 올려 잡으면서 “이 영화 놓치지 마십시오.”, “안 보면 후회합니다.” 하면서 영화보기를 재촉했다는 사실을. 당시 영화의 세계로 이끌던 주술사는 바로 정영일(88년 작고) 선생이었다. 나, 그의 멘트와 주간조선에 실린 영화평론을 보면서 신자 아닌 신자가 되어 여기까지 왔다.     그 영화대학에는 주말의 명화, 명화 극장, 토요 명화 등 여러 학과가 있었지만 ‘빰빰 빰 빠’ 하고 거창한 관악기로 연주하던 엑소더스(<영광의 탈출> 주제곡) 시그널 음악을 들려주던 강의실이 오래도록 기억이 난다. 광고 사이 후딱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면 이윽고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MGM 로고나 혹은 횃불을 든 여신이 겨드랑을 드러낸 콜럼비아 영화사 아이콘이 강의 시작을 알렸다. 다음은 볼륨을 최대로 낮추어 더빙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여러 식구가 한 방에 살기에. 그 땐 당연히 리모컨이 없어서 한 번 채널을 잡으면 뭐든지 진득하게 보던 시절이었다. 수십 개의 채널을 가진 오늘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니 사실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오래된 TV   외국 영화를 봐야 교양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으니 확실히 정선생이 권면하는 커리큘럼은 극장에서 하는 영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기막힌 감식안은 우리들 성장의 뿌리를 뻗는 주요한 부분들이 되었다. 그 '명화극장(이라고 해 두자)'을 통해 <남과 여> <길> <태양은 가득히> <하이 눈> <북북서로 기수를 돌려라> <현기증> <에덴의 동쪽> <카사블랑카> 등 앞 세대의 교과서를 난독(亂讀)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 고전들을 통해서 영화라는 것이 그럴듯한 사건과 기막힌 화면만을 담는 것이 아닌, 표현할 수 없는 감각과 정서상태를 담기 위한 비상한 노력이라는 어렴풋한 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오래된 TV에서 만난 마릴린 먼로, 오드리 햅번, 잉그리드 버그만 등 흑백의 여신들을 후일 컬러로 만났을 때, 여신들은 할머니가 되어 있었고 흑백의 날들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금성 17인치 TV로 돈이 없어 극장에서 보지 못했던 <졸업>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을 보았고 이미 극장에서 본 <디어 헌터> <빠삐용> <자이언트> <대부>같은 영화는 몇 년 간격을 두고 복습을 했던 영화들. <시벨의 일요일>도 그렇게 오래된 명화극장에서 처음 만났고 두 번째는 2002년 EBS를 통해 만났다. 그 사이 여러 번 방영되었겠지만 정확한 것은 모르겠다. 끝으로, 모리스 자르를 기억하실 것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인도로 가는 길> <라이언의 처녀> <닥터 지바고> <사랑과 영혼> 등 영화사를 빛낸 영화들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 선수가 만든 첫 번째 떡잎이 <시벨의 일요일>라는 사실. ★ 팬 서비스   <시벨의 일요일>은 DVD나 VHS로 나온 것이 없다. 유료 P2P 다운 사이트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가 보고 싶다면?  EBS로 연락해 다시 방영해 달라든지 아니면 한일장신대 총장님이셨던 이영호 목사님(없는 게 없답니다!)이나 필자에게 연락하면 테잎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신귀백ㅣbutgood@hanmail.net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