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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8 |
[문화시평]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관리자(2007-08-14 19:22:10)
거기, 역사가 있다 이상조ㅣ전북대학교 교수   7월 3일부터 7월 29일까지 국립 전주박물관에서 열린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전은 지난 2월 서울역사박물관이 기획한 순회전으로 보물 제1499-(1)호인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을 중심으로 고종(高宗)을 포함한 후손들의 초상화를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였다.   알다시피 초상화란 미술의 많은 형식 중,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또한 한국 회화사에서 볼 때 초상화는 고려시대 이후부터 많이 그려졌다. 그리고 학자들은 초상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시기를 조선시대라 일컫는다. 유교를 실천적 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는 보본사상(報本思想)에 근거를 둔 가묘(家廟)와 영당(影堂)의 설립을 권장하였고 그 곳에 봉안할 영정의 제작이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흔히 조선시대에 제작된 초상화는 대상인물의 신분에 따라 대략 여섯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왕의 초상(御眞). 둘째는 공신상(功臣像). 셋째는 기로도상(耆老圖像), 넷째는 일반 사대부상, 다섯째는 승상(僧像), 여섯째는 여인상이다. 참고로 기로도상이란 耆-60세, 老-70세의 일반적 뜻으로 볼 때 노인들을 대상으로 그린 초상화이나, 단순한 노인이 아닌 부, 귀, 덕을 함께 겸비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제작한 것으로 대부분 화첩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처럼 초상화는 제작 의도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양식과 그 목적이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사실에 입각하고, 또한 역사적 성격을 갖는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이번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전에 나타난 인물들의 면면을 볼 때 더욱 그렇다.   이번 전시회를 보며 필자는 우리 역사의 최대 부흥기인 조선의 숙종, 영조, 정조의 시대에 찬란했던 정치와 문화의 열매들과, 그 그늘에 숨겨진 왕가의 비극, 부흥기 직후에 몰락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조선 말기의 국내의 정치상황과 그 와중에 펼치던 세계열강들과의 숨 막히던 대치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물론 직접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떠올릴 수 있는 미술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많으며 그 중 대표적으로 ‘게르니카(Guernica)'를 들 수 있다.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내란 때 프랑코를 지지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폐허가 된 스페인의 북부 도시 게르니카를 배경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피카소는 마침 그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벽화제작을 의뢰받은 차에 야만적 폭력에 대한 비판으로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슬픔과 분노를 격정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파리 만국박람회와 구미 여러 나라에서 순회전을 가지며 무차별한 야만적 폭력을 비난하고 프랑코 독재 치하의 스페인으로의 반입을 거절하며 스페인에 민주화와 자유가 회복된 후에 반입할 것을 선언하여 더욱 세계인들에게 프랑코와 독일의 야만적 폭력에 저항하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이후 민주화가 회복된 후, 81년에 스페인으로 반환된 이 작품은 예술작품의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돌이켜보면 이번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전은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초상화’라는 단일 주제로 열리기에는 다소 규모가 작았다. 그랬기에 전문가가 아닌 관람객들로선 조선시대 초상화의 양식상의 특성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와 아울러 초상화는 형태(寫形)뿐만이 아닌 마음(寫心)까지도 그려내야 한다는 당시의 화가들의 태도를 이해시키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초상화들과 함께 전시된 전북 지역에 소재한 흥선대원군 척화비(斥和碑)와 전주 이씨 관련 사진자료, 또한 조선말의 국내 정치상황을 해설하는 영상물 등은 전시기획의 방향을 자연스레 조선말의 국내 정치 상황으로 몰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조선말의 왕가의 초상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기회를 가진 것은 특기할 일이었다.   단순한 미술작품을 보며 역사를 떠올린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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