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8 |
[서평] 『선택』고백과 조언의 상담형 페미니즘
관리자(2007-08-14 19:18:33)
<b>고백과 조언의 상담형 페미니즘</b>
장미영ㅣ전주대 교수
197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사회에 ‘새로움’으로 표상되던 페미니즘은 이제 하나의 문화풍조로 확대되었다. 페미니즘에서 기본적인 가치로 추구하는 성평등도 지금은 저항과 진보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갖춰야 할 교양이자 상식이 되었다.
군가산점 논란, 호주제 폐지, 성매매 방지법 제정, 출산장려정책 등 최근 들어 여성과 관련된 사안들은 전국민의 시선을 붙들었고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렇듯 여성을 둘러싼 환경이 급속도로 바뀌면서 최근에는 페미니즘이 새로운 시대의 대안적 가치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김신명숙의 『선택』은 여성 학자들만을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맞이해야하는 여성 일반 또는 남성 모두를 위한 길잡이로서의 페미니즘 입문서이다. 한국 여성의 일반적 삶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 제기를 시작으로 하는 이 책은 주로 영미페미니즘을 토대로 하는 선명한 분석까지를 제시하면서 일상의 경험과 밀착된 페미니즘을 통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체감적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이 책의 강점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에세이 제목처럼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문제의식과 전망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여성의 자아, 사랑, 성과 외모, 결혼, 직업, 엄마 되기 등 6가지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문제로서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독자들은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삶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가 깊어진 것처럼 보이는 요즈음, 한편에서는 ‘여성 상위시대’니 ‘여풍’이니 ‘역차별’이니 하는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용어나 ‘신인류’니 ‘알파 걸’이니 하는 여성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는 용어가 난무한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도 한국의 보통여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일상의 문제들은 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이전시대의 어머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가정과 사회를 작동하고 있는 가부장제 권력의 완강하고도 끈질긴 메커니즘이 여전히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아픔과 고민들은 여성의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 권력의 폐단으로 나타난 다양한 모습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 붙인 ‘32개의 도전’은 현재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국내외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이자 동시에 저자가 문제시한 가부장제의 폐단을 지적했던 선각자들의 행적으로서 저자의 시각에 힘을 실어주는 후광의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의 각 장은 마치 상담실을 찾아온 내담자의 고민을 적어 놓은 녹취록과 같은 형태로 여성 문제를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이어 후면에는 그 고민에 대한 상담사 언니의 충고와 조언이 담긴 편지글 형태로 문제에 대한 분석과 해법을 싣고 있다. 이것은 고백 형태로 된 지극히 사적인, 여성의 자기 서사와 여성 문제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냉철한 이론적 관찰을 함께 살필 수 있게 하는 이중적 서사 전략이다. 이로써 각 장은 여성 삶의 현장과 페미니즘 이론이 밀착된 형태로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들의 오해와 얄팍한 이해를 넘어 서는 한편 자칫 상아탑 속에 갇히기 쉬운 학문의 대중적 확산까지를 효과적으로 수행해내고 있다.
이 책의 후미에 놓인 ‘남자에게’ 할애된 장은 남성의 삶이 여성의 삶과 별개가 아님을 역설한다. 남자들은 여자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행복하지 않은 그만큼 남자들이 더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남자에게 ‘가장’이라는 직위를 부여하면서 특권만 준 것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평생 책임져야 한다!’는 숨 막히는 의무도 함께 부과함으로써 남성들을 여성 못지않게 억압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남자들을 남자다워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더 사랑스러워질 수 있게 한다. 지배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두 주체로 만나 진실로 교감하며 사랑할 수 있도록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운동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페미니즘은 사랑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한때 과격한 페미니스트로 알려졌던 김신명숙의 『선택』은 그동안 그녀가 실천적으로 수행했던 페미니즘 운동과는 사뭇 다르다. 저자는 그 이유를 ‘대중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페미니즘의 현 주소를 돌아보기 위해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데서 기인 한다’고 설파한다. 이 책에서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위한 또 다른 선택이 있음을 자각하게 하는 데서 그치고 용감하게 탁월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실천의 용기는 여성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누군가 큰언니 같은 마음으로 여성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으로 여성들의 상처가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가는 의문으로 남는다. 가부장제가 옥죄는 덫을 피하는 방법, 가부장제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방법,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방법,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방법 등은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이의 존재만으로는 상당히 버거운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페미니즘의 성장과 더불어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과 도전도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성차별주의, 여성혐오주의도 가부장제 못지않게 우리의 일상생활을 현재와 다르게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페미니즘의 실천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에 페미니즘은 변혁을 위한 비전 제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비전을 현실화하는 실천적 전략을 함께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장미영/ 현재 전주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다. 논저로 『페미니즘 문학론(공저)』, 『여성문학의 어제와 오늘(공저)』, 『색깔 있는 문화(공저)』, 『여성과 미디어(공저)』, 『멀티미디어시대의 여성담론(공저)』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