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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7 |
[문화현장] 문학적 열정의 새로운 불꽃을 위하여
관리자(2007-07-16 01:52:46)
『김형수 AALF 운영위원장 서면인터뷰』 문학적 열정의 새로운 불꽃을 위하여   시인이면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형수 2007 전주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AALF) 운영위원장과 서면인터뷰를 통해, 이번 AALF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형수 시인은 스물두 살 때 광주에서 5.18을 목도하면서 일대 개벽을 겪은 세대에 속한다. 문단에 진입한 후 늘 시대적 사명감 같은 것을 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청년위원장을 거쳐 지금은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역 정신의 건강성을 모아서, 조선작가동맹의 손을 잡고, 아시아 아프리카 연대로 가자’는 주장을 펴왔다. 우리 문학이 자기 확장을 꾀할 방향이 여기에 있다고 본 것.   그는, 2004년에 남북 문학인 교류가 시작되어, 2005년에 평양에서 민족작가대회를 가졌고, 2006년에 남북해외 문학인이 함께 하는 6.15민족문학인협회가 결성되었으니, 올해부터 아시아-아프리카 연대를 꿈꾸는 것이 자연스런 수순이라고 말한다. AALF는 어떤 계기로 기획되었나요? AALF를 소개하자면?   AALF를 요청한 것은 한국 문단이라고 봅니다. 계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문학 내부의 요인으로서 민족문학 운동의 자기 확장이 필요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문학은 오랜 국가적 민족사적 내홍 속에서 성장하다가 민간정부가 출현하고 탈냉전 탈근대로 이어지는 문명사적 전환의 분위기 속에서 국경 너머, 민족사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쏟게 됩니다. 저희 작가회의가 세계작가와의 대화를 시작한 것이 올해로 17년째이고, 작가회의 내에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이 출현한 것이 1994년입니다.   이후, 고민들이 차츰 심화되어서 이라크전 때는 소설가 오수연 씨를 반전평화작가로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 5월에는 광주 망월묘지에서 팔레스타인, 이라크, 베트남, 몽골 등 5개국 작가들이 모여서 아시아작가들의 선언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아시아문화네트워크’ ‘아시아문화유목’ 등 여러 개의 단체가 출현했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들의 연대를 꿈꾸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입니다.   다른 하나는 환경적 요인인데, 소위 ‘문화의 세기’를 맞으면서 지자체들이 다투어가며 수많은 문화축제들을 기획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학을 소재로 한 축제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서 AALF가 출현했습니다. AALF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우리는 세계 속의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한국 근대문학의 중요한 숙제 중 하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분단의 질곡으로 이어지는 수난의 시대를 통해 우리는 근대교양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언젠가 김수영이 말한 “일본을 필터로 삼아서 빨아들인 유럽의 지성”이 한국 시민정신의 요체였지요. 문학도 처음에는 유럽의 지성을 나침반으로 삼아서 인류사 속의 보편적 가치의식들을 만나고, 그것과의 연대감 속에서 균형감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고은 세대가 즐겨 사용한 ‘전후문학’이라는 용어 안에 변방을 넘어 국제 감각을 얻으려 했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4.19 이후 민중의 성장을 겪으면서 주체적 관점, 혹은 제3세계적 관점이라는 ‘또 다른 길’을 찾게 되지요. 한국의 문예지에서 1960년대면 이미 아시아-아프리카 특집 같은 것을 마련합니다. 광주민중항쟁을 겪은 후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작가대회에 관심을 쏟으면서 김지하 시인이 로터스 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신경림 시인이 일본에서 개최된 동 대회에 참가하기도 합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작가연대가 냉전시대의 산물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꿈꾸는 것은 그런 진영적 블록화와는 성격을 조금 달리 합니다. ‘시장과 이윤 확장의 세계화’가 아니라 ‘정신적 가치 확장의 세계화’로서 지구촌 동병상련의 연대를 의미한다고 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 시민 연대를 이루자는 것이 목적인 셈인데, 작가들이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를 대라면 저는 언젠가 유네스코에서 연설한 자끄 들로르의 말을 인용할까 합니다. “세계는 우리가 사는 마을이다. 만약 한 집에 불이 나면, 우리의 머리 위에 있는 모든 지붕들이 위험에 놓인다. (…) 우리 모두는 전체적인 책임 가운데 각자의 몫을 담당하여야 한다.” 이번 축제의 목적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로그램은?   ‘인류의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라는 주제가 메인 행사의 첫 머리에 떠오를 것입니다. ‘인류의 고통과 슬픔’이라는 연약한 어휘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들과 만나면 즉각 평화 즉 정치적 상상력의 ‘모드’로 돌아갑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유럽 문학의 고갈과 정치적 상상력의 고갈이 맞붙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을 요한다고 봅니다. 유럽 문학은 2차 대전의 상징물이었던 ‘나치주의’와 대결하고 있을 때 전성기였으며, 중국문학은 ‘문화혁명’과 대결하면서 전성기를 얻습니다. 오늘날 문화적 흥행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탈정치적 현상들은 금세기의 미디어들이 실시간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듯이 삶의 진실, 세계의 진실에 전혀 값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단지 자신의 영혼의 괴물들하고만 싸우는 존재인 것처럼 믿게 하는 온갖 현란한 정신사조들을 흔들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이 주제 안에 숨어 있습니다.   저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정치적 상상력을 잃지 않고 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작가들이 인류가 처한 당대적 현실의 심층에 밀착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한 많은 무거운 이야기들이 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축제가 세계 문학계에 갖는 의미가 있다면?   행사 구상 단계에서 <세계문학사를 다시 쓴다>라는 표현이 곧잘 등장하고는 했습니다. 괄호 안에 ‘전주에서’라는 술어가 전제되기 때문에 과장된 표현이라 다들 웃지요. 그러나 그런 기대가 황당한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가령, 한 시대의 미의식을 주도하는 것은 지배자의 용모라는 말이 있습니다. 몽고가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 원나라를 건설했을 때 미남미녀의 모델은 몽고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미장원이 있었다면 노란 머리를 검은 색으로 물들이고 곱슬머리는 직발로 바꾸는 미용술이 발달했겠지요.   그런데 왜 지배자의 용모가 한 시대의 미의식을 주도하는 준거 틀이 되어야 합니까? 지구촌의 모든 미의식이 강자에 의해 전횡되는 게 아니라 낱낱의 존재들을 만들어낸 자연의 용모를 기준하여 재질서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류 미학사의 새로운 요청이라 봅니다. 그럴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다면 세계문학사는 언제라도 다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지요.   또한 지상의 모든 문학이, 자신들이 만들어온 지역적 역사적 근원과 현실의 관계망 속에서만 문제를 구성하고 욕망을 확장할 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를 동시적인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들의 만남은 새로운 문학적 열정의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뜻이 좋다고 성취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니 우리가 매우 진지한 노력을 쏟아야겠지요. 한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각각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대표해서 축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와 관련해서 두 나라의 특성과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두 나라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고 말하면 다른 나라 작가들이 참여를 기피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중심이 되려고 욕망하면 할수록 자연의 질서는 훼손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조심스레 ‘우리가 심부름한다’는 표현을 사용해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 아프리카는 남아공이 네트워크의 복판에 있는 게 확실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아시아의 복판이 아닙니다. 아시아는 누구도 복판을 형성할 수 없는 지대라는 게 단점이기도 하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능력을 크게 가진 일본과 중국은 서로 필사의 경쟁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각기 제국주의와 중화주의로 주변 국가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한국은 아주 독특한 위상을 갖는데, 우리는 제3세계적 고통의 정점이라 할 만한, 남북 분단의 아픔을 현재형으로 앓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도, 북한은 지난 세기에 제3세계 연대를 가장 열정적으로 해온 사회이고, 남한은 시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아시아적 민주주의의 모델’을 확보한 나라입니다.   결론적으로 남아공과 한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이웃들을 위해 심부름을 할 수 있는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 또 경제적 형편상으로 충분조건이라 할 만한 물적 토대도 확보하고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주변들을 위해 성실한 ‘간사’ 역할을 할 만한 처지라고 봅니다. 정치 영역에서 넬슨 만델라와 김대중이 그것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전주에서 개최하는 까닭이나 의미가 있다면?   작가들은 흔히 자신의 조국을 모국어라고 말합니다. 문학의 영토가 따로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것은 국력의 크기와 달리 문학에 비옥한 땅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믿게 합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서울 명동이 정신사적으로 비옥했고, 1970년대에는 광주가 비옥했지요. 어쩌면 5.18은 그 비옥한 영토가 낳은 성취이자 상처입니다. 소위 문명사적 전환기라는 용어가 유행되는 1990년대 이후 한국은 정신사적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심하게 교란당합니다. 이런 시기에 전주가 상당한 수준의 문학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주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판소리의 고향이자 농경문화의 고장이요 전통문화의 자산들을 풍요롭게 가지고 있는데다가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 작가들을 압도적일 만큼 많이 확보하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 문학 페스티벌을 가능하게 해줄 바탕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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