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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7 |
[문화시평] 명인과 고향 관객들의 신명난 놀이판
관리자(2007-07-16 01:43:25)
명인과 고향 관객들의 신명난 놀이판                                                                                             유재호 | 전북대교수   전통예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5-6월의 저녁은 유난히 바쁘고도 즐겁다. 시간이 겹치는 여러 볼거리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할 정도로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음악과 전통무용의 공연이 많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6월 8일(토요일) 저녁이 꼭 그랬다. 여러 가지 수준 높은 -또는 의미 있는- 공연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열리는 바람에 막판까지 고심과 번복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일 오전에야 <전라도의 가락 전라도의 춤> 쪽으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해마다 열리는 이 기획 공연의 높은 인지도와 출연 명인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에 들어섰다.   어느 덧 16회를 맞이한 올해 <전라도의 가락 전라도의 춤>은 ‘명인, 고향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열렸다. 주제에 걸맞는 공연 내용과 짜임새 있는 순서 덕분에, 전체적으로, 고향에 상주하는 중견 예술인들과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명인들이 고향을 무대로 환영·답례·송별의 잔치를 베푸는 분위기였다. 전주국악실내악단이 ‘육자배기’로 명인들을 맞이하고 한벽예술단이 ‘전라도의 판놀이’로 작별을 고하였다. 명인들의 답례는 독무·대금산조·판소리·가야금산조·독무의 차례로 이어졌는데, 이 같은 순서 자체가 판소리를 중심에 놓고 기악과 무용이 그것을 보듬고 감싸안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2회에 걸친 독무의 동선이 무대 끝자락까지 걸치고 특히 대금산조·판소리·가야금산조가 전면 돌출 무대에서 이루어진 덕분에, 고향의 관객들이 아마 저마다 명인들을 직접 대면하는 듯한 뿌듯한 기분을 맛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전주국악실내악단의 ‘육자배기’ 연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시나위를 모태로 확대 구성된 실내악이 소리꾼의 창을 떠받치는 반주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리꾼의 창을 곁들인 일종의 메들리 형식으로 육자배기·자진육자배기·삼산은 반락·개고리타령·흥타령을 완주했다. 흔히 ‘육자배기’라고 하면 황병기 교수가 ‘울음 보따리’라고 수식했듯이 서민 계층의 애환을 구성진 소리로 토해 내는 육성 연기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육자배기’의 가사는 원래 우리 각자의 삶의 여정이 모두 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가변적이고 즉흥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공연에서 소리꾼은 구음에 유사한 -그래서 전혀 ‘튀지’ 않는- 차분한 소리로 보조역을 맡는 데 그쳤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열 종 남짓의 악기들이 낯익은 가락으로 전라도 특유의 한(恨)과 흥(興)을 합주하며 유별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번에 고향을 찾은 명인들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이가 아마 국수호 명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전북 완주 출신으로 1973년 국립무용단 입단 이래 40년 가까이 되도록 한국 무용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과 같은 세계 수준의 문화예술축전들, 그리고 ‘하얀 초상’, ‘노스토이’, ‘봄의 제전’, ‘명성황후’ 등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이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오거나 그의 손을 거쳤다. 따라서 그를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에서 두 번이나 직접 출연하여 명인 공연을 열고 또 닫게 되었으니, 아마 적잖은 고향 사람들이 그의 춤사위를 고대하며 잠을 설치기도 하였을 것이다.   ‘육자배기’ 연주가 끝나고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국수호 명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김소희의 입소리를 타고 그의 ‘입춤’이 호방하고도 우아한 춤사위로 무대를 장식했다. 춤의 동선이 유난히 넓은지라, 때로는 무대 전면 끝자락에서 벌어지는 춤사위가 손에 닿을 듯 클로즈업되는 느낌이 들고, 때로는 가벼운 디딤새와 더불어 그 춤사위가 무대 뒤로 아스라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안타까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관중의 아쉬움이 실린 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떠난 국수호 명인이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듯 얼마 후 다시 출연하였다. 이번에는 신라춤, 백제춤, 유교춤 등의 복원을 통하여 한국무용의 지평을 넓히는 일환으로 그가 직접 만들고 보급했던 ‘신무 II'가 무대를 장식했다. 현금(玄琴)과 적(笛)의 단아한 선율을 타고 이른바 ’춤의 신‘을 다스리는 그의 춤사위가 묘한 신비감을 자아냈다.   국수호 명인의 ‘입춤’이 끝나자 전면 돌출 무대가 마련되었다. 마치 안방처럼 꾸며진 그 자리에 전통음악 다방면의 대가이자 대금 연주자인 최상화 명인이 들어섰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대금은 신라 시대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했을 정도로 전통 악기들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러운 음색을 창출해 낸다. 그런데 이생강류가 그런 류의 신비감을 고조시키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이번에 최상화 명인이 들려 준 서용석류의 대금산조는 ‘상대적으로’ 인간 본연의 감성에 좀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육자배기’로 시작하여 ‘전라도의 판놀이’로 끝난 이번 공연과도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이어서 정읍 출생의 왕기석 명창이 ‘백발가’와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으로 고향 사람들을 만났다. 그를 두고 흔히 동편제의 호방함과 서편제의 섬세함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소리꾼이라고도 하고, 판소리계 일각에서는 조상현 명창의 전성기에 버금가는 소리꾼으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특히 좌중을 압도하는 장쾌한 육성과 관중과의 즉흥적인 소통을 곁들인 거침없는 연기력이 돋보였다. ‘심봉사 눈 뜨는 대목’ 자체의 음악성과 소리 구성이 본래 뛰어나기도 하지만, 왕기석 명창 특유의 소리와 연기가 해당 대목의 애절함, 비장함,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환희의 순간들을 유난히 현실감 있게 연출해 내는 것 같았다.   역시 전면 돌출 무대를 활용한 김일륜 명인의 ‘가야금산조’가 명인 공연의 마지막 순서였다. ‘최옥삼류 가야금산조’는 산조의 기본 구성 이외에 봉황조, 석화제, 생삼청, 경드름과 같은 세부 악상이 가미되고 우조 및 계면조가 각기 세분화되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최옥삼류 가야금산조’는 고도의 연주 기량을 요청하는데, 김명환을 동반하고 다닌 함동정월이 이후에 그 맥을 잇고 있는 이가 바로 김일륜 명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눈처럼 하얀 의상에 곱고 단아한 자태, 틈틈이 고수를 이끌어가는 듯한 여유로움,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연주를 즐기는 듯한 편안함으로 그가 ‘가야금산조’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선사하였다.   이어서 한벽예술단이 ‘전라도의 판놀이’로 정중하고도 흥겨운 고별 잔치를 벌였다. 이 공연은 아마 이번 <전라도의 가락 전라도의 춤>을 위하여 각별히 만들어진 것 같았다. 모듬북, 장구, 피리, 신디 등이 의외로 무속 또는 제의를 연상시키는 정적이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관객들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꽹과리가 등장하고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런 가운데 애교 만점의 표정 연기를 곁들인 열두 발 상모놀이가 관중의 자발적인 박수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놓칠세라 평상복 차림의 소리꾼이 진도아리랑을 열창하였다. 고향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소장 또는 중견 예술인들, 전국 또는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는 명인들, 그리고 고향의 관객들이 함께 어울리고 호흡하는 한마당, 말 그대로 신명나는 놀이판이었다.   필자에게 언제부턴가 공연장에서 무대와 객석, 연기자와 관중을 동시에 의식하며 이따금 가슴을 졸이는 버릇이 생겼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무대를 응시하며 공연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공연장의 예술적 공명을 감시하고 연기자와 관중 간의 원활한 소통을 기원하는 중간자적 입장이 되어 이따금 애를 태우게 되는 것이다. 전통음악이나 전통무용에 대한 필자 나름의 애정 및 평가와는 사뭇 다르게, 전통예술 전반에 걸쳐 여전히 대중적 입지가 취약하다는 목마름 때문인 것 같다. <전라도의 가락 전라도의 춤>이 쌓아가고 있는 연륜과 더불어 전통예술에 대한 의식과 정서, 그리고 제도와 정책에 두루 서광이 비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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