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7 |
[서평] 완벽히 잊혀진 존재,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백단향이 흐른다.
관리자(2007-07-16 01:38:38)
『리친』
완벽히 잊혀진 존재,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백단향이 흐른다.
한지선 | 소설가
아픔이 관통한다. 마음을 다독이는 연민.
마치 위태로이 견디다가 무너지고 말았던 조선의 운명과 같다.
그녀는 “나는 누구일까요?” 묻는다. 그것은 자신을 사랑한 푸른 눈의 외교관인 프랑스 남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한 질문처럼 보였다.
책은 깊은 겨울밤 화롯불을 가운데 놓고 둥글게 모여 앉은 손자 손녀들에게 할머니가 옛날얘기를 하는 듯 조근조근하다. 뜨겁지도 않으며 차갑지도 않다. 그것조차도 ‘리진’이라는 한 애틋한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을 삼키고, 받아들이고, 속으로 침잠시켜 고요히 소리하는. 문장 자체가 행여 그 행보와 몸가짐을 깰까 저어하듯 가만가만하다. 그것에서 알 수 있듯, 리진, 이 아름답고 총명한 처녀는 작가의 가슴에서 태어났다.
자, 이제 백년 전의 한 여인을 백년 후의 이 세상으로 내보낸다. -작가의 말 중에서
‘리진’은 천애고아가 되어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왕비의 사랑을 받고, 아름답고 총명한 궁녀로 자라나 프랑스 외교관의 아내가 되었던 특이한 궁녀의 이야기이며, 그를 중심으로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과 가공의 인물들이 움직이는 소설이다.
‘리진’은 특이한 이력의 한 궁녀의 이야기로 시작했으나, 작중 왕비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지니고 있는 압도적인 힘은 그 밖의 다른 서사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오직 그 외상적인 사건만이, 그 사건이 지니고 있는 정서적 절절함만이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작품 해설> 중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후에 어린 아이였을 때 궁중을 헤매던 리진의 손을 잡고, 너는 누구냐? 물었던, 그 이후로 그녀를 친딸처럼 여겼던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가 있었다.
갓 태어난 거위가 눈을 처음 마주친 대상을 자신의 어미로 알고 따라다니듯, 리진은 왕비를 가슴에 품는다. 왕으로부터 ‘리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던 궁녀. 왕비의 특별한 총애를 입고, 프랑스 초대공사의 사랑 속에서 궁궐을 떠나 파리생활을 했던 특별한 처지의 궁녀. 그런 사연 속에서 펼쳐지는 그녀의 삶과 운명은 사위어가는 한 왕조의 운명과 그 시대의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한 단면을 배경으로 하고 강처럼 흘러가며 서사의 본류를 흐른다.
100년 전에 A4 용지 한장 반 정도 되는 이야기로 남았던 여인 ‘리진’. 조선에 처음으로 파견된 프랑스 외교관이 조선의 궁중 무희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와 파리로 건너갔다는 것과, 그 조선 무희가 백 년 전에 불어를 빛나게 구사했다는…… 그러나 그 파란 눈의 외교관의 충실한 사랑에도(너무 야윈 나머지 마치 장난삼아 여자 옷을 입혀 놓은 한 마리 작은 원숭이 같아) 보이게 말라만 갔던 여인의 가슴엔 조선과 같은 운명이었던 왕비에 대한 사랑만이 있었다.
실제로 그랬는지 허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설적 사실이야 어떻든 책을 읽는 도중 늘 잠언 같은 문장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연민이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마음을 흔드는 소리는 소란 속에서도 한껏 귀를 기울이게 한다.
-외로운 이에게 어린애의 체취는 따뜻한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같다.
이 책은 나의 빠른 독서속도를 조절했다. 그래서 와인을 음미하듯 하다가, 죽피리 소리에 빠져들 듯 숨을 죽이다가 다시 내달리곤 했다. 말하자면 나는 책의 전반부에서 그렇게 잠언 같은 문구에 걸려들었다.
‘리진’은 한 궁녀의 이야기였지만, 전통과 근대라는 서로 다른 질서가 교체되던 시기에, 조선의 실패한 근대화의 안타까움과 망국의 비애가 조밀하게 직조된 역사소설이다.
책에 접근할 때는 ‘리진’이라는 춘앵무를 추는 조선의 궁중 무희, 예쁘고 총명한 눈을 반짝이는 19세의 조선 처녀에게 바짝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생각한 거에 비해 그녀에 대한 디테일함은 조용히 감춰져 있다. 그녀의 생각조차도 작가의 의도대로 움직인 듯한 느낌이다. 오히려 너무나 촘촘히 그녀의 면모를 시대 상황과 흐름에 묶어 놓아서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그녀를 만들어내고, 이끌고, 다시 떠났던 자리로 불러 들였다.
이 모든 줄기에 서사적 힘을 빌려 연민과 아픔을 끄집어냈다. 그럼에도 마치 역사적 배경에 ‘리진’ 그 아름답고 연약한 여인이 휩쓸려버린 느낌이 든다. 그것은 작가의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이 너무 지극했던 탓이 아닐까. 마치 왕비가 리진을 품듯, 종당에는 리진이 왕비를 품듯 작가 자신이 그녀를 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리진, 당신을 내가 죽였다, 고 했듯이.
그녀는 신비스럽다. 완벽하게 잊혀진, 어디에도 없는 존재이기에. 그러나 내게는 춘앵무를 추었던 조선의 궁중 무희, 프랑스 공사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아버렸던 아름다운 여인, 왕비를 어머니로 모신 지극한 딸이었던 ‘리진’이라는 한 여자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 그녀의 삶의 디테일이 오롯이 담겨진 그런 책이었기를 바랬다. 그것이 내가 맨 처음 ‘리진’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소망한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아쉽다.
한지선/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교육대학을 졸업했다. 단편 「겨울이별」로 문단에 나와, 2001년 장편소설 『그녀는 강을 따라갔다』와 2007년 소설집 『그때 깊은 밤에』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