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7 |
[신귀백 영화엿보기] 취한 말들의 공간
관리자(2007-07-16 01:24:50)
취한 말들의 공간
남한밀양
어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겠는가. 그저 맑은 햇살만 공으로 쏟아지는 곳. 그녀가 밀양으로 삶의 거처를 잡은 것은 익명성이 소멸되는 공간으로 믿었을 듯. 남편의 죽음을 망각하기 위한 곳으로 선택한 곳. 인간은 망각의 존재만은 아니다. 기억을 조절하고 또 편리한 데로 활용하는 능력이 아직 그녀에겐 자리한 듯하다.
카메라가 붙든 그 밀양의 첫 장면은 하늘일까 아니면 그저 무심히 쏟아지는 햇볕일까? 여기 한 여인이 번제가 될 어린 양을 데리고 햇빛촌에 당도한다. 남편의 고향이라고? 아니, 그것은 의미가 없다. 만만하게 본 이 시골은 그녀를 그렇게 쉽게 받아주지 않는다. 우선 자동차가 말썽을 일으킨다. 밀양에서 첫 번째로 만난 남자, 카센타 사장 종찬(송강호)은 밀양에 대해 묻는 이 과부 서울댁에게, “다른 데와 똑같아예.” 라고 말한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죽은 남편의 외도를 부정하는) 그녀가 기다린 말이다. 그녀는 이 오지랖 넓은 타자의 악센트를 따라 밀양에 들어선다.
이제 그녀가 추슬러야 할 것은, 아이. 아이는 엄마와 술래잡기를 한다. 그녀의 생존본능의 동기가 되는 아들은 엄마로부터 떨어져 나오려하고, 남편을 잃은 여자는 집착한다. 분리불안을 앓는 여성은 아이를 웅변학원으로 데려간다. 태권도나 미술학원이 아닌 왜 웅변학원이었을까? 그것은 이 영화가 입에서 뱉어지는 취한 말들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일 것.
미장원과 피아노학원 그리고 약국 정도가 다운타운을 이루는 동네라지만 여기에도 회장님이 있고 시의원이 있고 부동산 중개인이 있다. 웅변학원에서 만난 엄마들이 호프집에서 모이고, 역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이 전도 노래를 하는 곳, 밀양 여기도 남한 어디나 다 똑같다. 이, 같은 공간을 응시하던 카메라는 그녀가 평범한 여자임을 보여주는데 사소한 신경을 쓴다. 속물 종찬이 상장을 조작하고 그걸 걸어도 특별히 거부하지 않는 그녀. 부동산에도 관심이 있는,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적당한 허영을 가진 보통사람이란 것을 강조한다. 고귀함을 유지시키거나 자아를 지키는 여인으로 그리지 않고 유도리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는 전반부는 감독의 통속에 대한 탐구다.
교회, 가짜 시멘트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는 여자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직장과 가정의 일체 공간이 가능한 이 작은 동네에서 그 아이가 유괴된다. 이 금지옥엽은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친 이삭이 아니기에, 반추하는 그녀. 술 권하고 땅 권하는 사회에서 자신이 오버한 것을 깨닫지만 아이는 종적을 알 수 없다. 끝내 돌아오지 않는 아이. 한국에서의 교통사고나 유괴는 당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확률의 문제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왜 하필 나냐’고 슬퍼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원망을 차단한다. 이 극은 도덕극이 아니기에 유괴 장면은 철저히 생략된다.
대부분의 영화는 금기에 대한 욕망으로 인한 일탈에 따른 죄와 형벌을 다룬다. 그러나 여기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남편마저 잃은 여자에게 닥치는 운명은 가혹하다. 혈기를 부리지도 욕망에 치닫지도 않았는데, 아무런 금기에 대한 시도를 해본 적이 없는 여자 욥은 아이를 잃고 혼자 밥을 먹는다. 혼자 먹는 세상의 가장 거룩한 밥. 살아야 하니까. 볼륨 없는 뒷모습으로 밥을 먹고 설거지 하며 혼자 우는 그녀. 카메라는 그 앵글을 뒤에서 잡는다. 형용사를 생략하는 작가처럼 무심한 감독.
신애를 기독교로 이끄는 약사는 ‘저 햇빛 한 조각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단다. 내버려 두는 것이 애도인데, 약사는 전도가 타인의 삶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구원은 아스피린의 무게처럼 가볍다. 어떤 형태로든 타자의 삶에 관여해야 직성이 풀리는, 다른 데와 똑 같은 남한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
신애는 종교에 의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었을 것.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살겠다는 그녀의 다짐은 결국 얼크러지고 결국은 교회라는 규격화된 공간성으로 몰아넣어진다. 그러나 교회는 요나가 갇혔던 큰 물고기 같은 곳이어서 그녀를 흔들어대고 가만히 놓아두질 않는다. 교회와 그 멤버들은 참극에 대해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마음을 열라고 강요하는 것.
교회가 인격적 연대가 가능한 참사랑의 공간이란 환상을 가졌을까. 그녀는 마음을 연다. 아니, 사랑이라는 이유로 타인의 사생활에 참견하려는 사람들에게 오래 참는 척, 온유한 척 마을을 여는 시늉을 한다. 회개하고 자복하는 과정은 생략한 체 주님을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구성적 신념까지 변한 것은 아닐 것. 그녀는 일단 믿어보기로 한다. 그런 그녀에게 또 다른 강요가 시작된다. 고백하라고, 그리고 용서하라는 것. 내면적 치유를 위한 시간과 치유과정 속의 두려움을 생각지 않는 사람들에 휩싸여 귀순용사처럼 간증의 집회에 나가고. 그녀는 내처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 면회를 간다. 자신 있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그녀의 허세는 여기까지다.
용서 권하는 세상
이런 이런! 공허의 절정. 세상에, 울고 뉘우쳐야 할 놈이 눈물로 용서를 빌면 죄를 씻어 주려던 그녀의 허영은 박살난다. 웅변을 가르치던 사람의 혀라니. 이새끼는 하나님을 영접한 후로 주께서 용서해 주시니 맘 편하고 기쁘단다. 아, 넘치는 말들이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믿었던 믿음이 작은 자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그리고 폭발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평정을 잃으면 소리를 내는 법. 그녀는 이제 매너모드를 접고 인격장애에 이른 본 모습을 보여주다. 간증의 수련회에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틀거나 교인들과의 관계를 적대시 한다. 그리고 “하고 싶어 예?” 경상도 악센트를 빌려 장로를 유혹한다.
악당을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이 모든 작가의 강박관념. 그런데 잔인한 이창동 그는 매우 덤덤한 악당을 만들어낸다. 왜? 이것은 광주 이야기이기에. 때리고 죽은 놈은 맘 편안히 사는데, 피해자가 화해의 손길을 건네야 한다는 이 모순으로 가득한 취한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 거참,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는 햇빛 속에서 저렇게 촐랑거리는데, 누가 용서한다는 것인가. 누가 용서를 강요하는가.
그저 거울을 들어주는…
그 누구도 표현 못한, 표현 못할 깊이가 작가가 다루어야할 길이고 짊어져야 할 몫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이 있었듯, 이 작가는 쏟아지는 햇빛에도 괴로워한다. 이 전직 소설가가 서사를 생략하는 자리에 햇볕이 내려앉는다. 용서는 햇살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것. 그리고 용서는 비밀스럽게 하는 것. 그리고 죄지은 자 한 쪽으로 찌그러져 용서받기를 말하지 않는 것. 그저 눈이 부시면 눈썹위에 손을 올려 손처양을 하는 것, 증오가 있다면 자라는 머리칼처럼 잘라내는 것. 자라는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그래도 증오가 자라면 조용히 침묵하라는 것.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는 누군가가 손이 모자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울을 잠깐 들어주는 것뿐. 누추한 마당에 쏟아지는 햇빛 그 아래 흔들리는 강아지 풀, 감독은 세련된 언어를 버리고 메타포로 마치고 만다. 좀 어정쩡하게 가기로 한 것 같다. 언어도 카메라도 너무 컨셉을 잡으면 불편하다고 시비를 걸었던 사람답다.
꼰대가 만든 공간 · 시간· 인간
기행의 흔적
<밀양>은 맑은 햇빛을 마음 놓고 받아들이는(인위적 조명이 없는) 작은 세트장 같은 영화. 원수의 딸이 두들겨 맞는 것을 보아야 하고 또 미장원에서 시다로 일하는 이 아이에게 머리를 맡겨야 하는 아주 꼬막만한 동네, 밀양. 바다에서 먼, 역사적 흔적에서 비켜간, 산업화나 근대화에서 가장 먼, 식민과 근대성 그 어떤 상처에도 얽매이지 않을 공간으로 밀양을 고른 것. 햇빛만 쏟아지는 도시를 그는 용케 골라냈다. 정읍이나 김제라 해도 다를 바 없는.
<초록물고기>의 막둥이가 살던 일산은 압축된 근대화로 대표되는 공간이다. 그들 형제의 꿈은 아직도 시골이라 생각하는 일산에서 그저 소박하게 식구들끼리 식당 하나 열고 사는 것이었는데. 그 원주민들 어디에서 살아갈까. <박하사탕>은 두고 온 시간성의 성찰. 1980년 광주에서 누구나 자유롭지 못함을 이야기 한다. 의정부의 낡아빠진 아파트의 <오아시스>는 그 판타지로 하여 지역적으로 특별한 언급을 하기는 좀 그렇다. 역시 그가 들여다보는 공간들은 하나같이 저 아래다.
찌질한 남자들
이창동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시다바리들로 누구도 주체가 되지 못하고 나쁜 남자도 못되는 군상들이다. 그리고 이 동네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없는 시대란 말일까.
<초록물고기>는 막둥이(한석규)가 갈 곳 없는 제대병에서 몸을 굴리는 바닥 깡패로 칼침 맞고 사라져가는 이야기다. 전화기에 대고 다리 아래에서 초록물고기를 잡던 기억을 형에게 이야기 하던 그. 그 작은 형이던가, 전주사람 이호성이 연기한 장애인을 비롯, 만나면 싸우던 누추한 가족들. 임신한 심혜진이 그 식당 곁 버드나무를 보고서 막동이의 사진을 보고 오열하던 장면은 꽤 인상 깊다.
20세기의 마지막에 남긴 작품, <박하사탕>에서는 똥을 만지고 누추한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영호(설경구)의 이야기. 그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그는 분명 ‘교양’ 없는 사람이다. 하긴 이 사람들과 ‘말’을 해 무삼하리. 한참 월드컵으로 난리를 치던 시절에 만든 <오아시스>에서 “저걸 보고 그게 서냐?”고 묻는 종두의 형과 종두는 국제 찌질이들. <밀양>에서 다방레지의 빤스 색깔이 궁금한 종찬(송강호)이 그래도 제일 건전한 우리의 이웃.
이건 좀…
그의 영화는 주조(鑄造)가 아닌 천 번을 두들긴 단조(鍛造)의 칼이어서 긴밀하고 빈틈없는 세공을 자랑한다. 그러나 <밀양>에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장면은 이창동도 제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하사탕>에서 “나 돌아갈래.” 하고 악을 쓰는 것 이것 역시 이창동의 취향은 아닌데, 조용조용 말하는 그도 한번쯤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가 보다. 아쉬운 부분. 그러나 <밀양>은 모르는 놈은 몰라도 좋다, 는 자신감이 붙은 듯하다. 좋다.
장관시절, 조중동 기자들이 물고 뜯으면 이창동은, “선수끼리, 왜 그러시냐?”고 되물었다고. 계몽적 성격의 영화들이 그를 공직으로 불렀을 법. 그러나 계몽의 대상이 되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자신은 안 그런 척 해도 교양 좀 있으라고, 생각 좀 하고 살라고 말하는 그는 영락없는 꼰대다. 창동형! 맨날 단조만 부르는 노래 말고 락과 힙합 같은 들썩이는 영화, 아버지랑 함께 웃을 수 있는 따뜻한 영화 한 편 맹글어 주시길.
신귀백ㅣ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