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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7 |
[이종민의 음악편지] "멀리 떠나는 길 위에"
관리자(2007-07-16 01:18:36)
"멀리 떠나는 길 위에"                                         이종민ㅣ전북대 교수·전주전통문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장   지난 5월 모처럼 서울 나들이에 깜짝 반가운 창극 하나 만났습니다. ‘우리시대의 창극’ [청]이 그것입니다. 국립창극단 국가브랜드 공연. 동초 탄신 100주년 기념공연. 청소년공연예술제 개막공연. 거창한 타이틀만큼이나 볼거리가 풍부한 창극이었습니다. 사설이나 창에 조금 어설픈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화려한 무대와 역동적인 연출만으로도 창극의 가능성과 판소리의 현대화 잠재력을 아물러 확인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작년 소리축제에도 초청되었지만 무대조건 때문에 연출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특히 1막과 2막 마지막 부분을 해금연주로 마무리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창극이라면 좀더 풍성한 볼거리를 위해 봉사 눈뜨는 황성잔치의 떠들썩함으로 끝맺음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절정을 피하고 차분한 에필로그를 부록처럼 제시하며 막을 내리는 것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1막 마지막에서도 인당수에 빠지는 격정적 장면 뒤에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를 맞으며 심청이 어딘가로 향해 가는 장면을 배치한 것 또한 매우 전략적인 연출로 여겨졌습니다. 관객들로 하여금 심봉사나 심청, 그들 삶의 우여곡절을 통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볼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일까? 그 의도가 무엇이든 이 두 마지막 장면은 특히 해금의 가슴 저린 연주 덕에 더욱 우리들 마음에 또렷이 남을 것 같습니다. 1막 마지막 부분은 [저 멀리 흰 구름 자욱한 곳], 2막은 [먼 길 떠나는 사람은 뒤돌아본다]로 끝나는데, 첫 곡은 해금을 신디가 감싸주고 두 번째 곡은 해금이 더블베이스와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두 곡 모두 해금 연주는 안수련이 맡고 있는데 그의 2004년 앨범 [수련 I]에 실려 있는 곡 [삶, 소유]의 앞부분을 변형시킨 것입니다.   그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창극에서 원용하고 있는 부분이 훨씬 더 서정적입니다. 원곡 [삶, 소유]는 제목부터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프롬(Erich Fromm)이 제기하고 있는, 존재(Being) 자체를 위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소유(Having)에 얽매인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음악을 통해 고민해보겠다는 것일까?   이 곡에 관한 글도 어설프기만 합니다. 곡 자체에 대한 인상을 상당히 해치고 있는 것입니다. 법정스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 중 적당한 부분을 발췌 인용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을 나기는 대목입니다.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生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 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질문을 잘 해야 적절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설픈 화두는 참선이나 사색은커녕 씁쓸한 미소만 자아내게 할 뿐입니다.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챙겨야 할 것이 연주나 녹음작업만이 아니라는 게 이런 데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거에 비해 이 창극에서 동원하고 있는 제목들은 얼마나 근사한지요? 너무 멋을 부리다 정작 그 장면의 내용과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게 된 점이 없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것마저도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목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곡 자체도 그렇습니다. 원곡은 후반부에서 해금의 ‘깽깽이’적 특성이 두드러져 앞의 서정적 아름다움을 상당히 앗아가 버립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한참 전에 이 음반을 구입하고도 즐겨듣지 않았던 게 이런 것 때문이 아니었나싶습니다. ‘소유’를 중시하는 인생의 지꺼분한 모습을 그리려다 그렇게 된 것이라 해도 그렇습니다.   이 부분을 잘라낸 창극 [청]에서의 서정적 연주는 말 그대로 우리들 심금을 울려줍니다. 우리음악에 애써 등 돌리려는 사람들 귀도 깜짝 잡아끌 수 있을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창극 [청]에는 많은 길이 등장합니다. 곽씨부인 상여 나가는 길. 심봉사와 심청이 밥 빌러 가는 길.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저 세상으로 가는 길. 맹인들 황성잔치 찾아가는 길. 심봉사가 눈을 뜨고 딸 심청과 함께 도화동 찾아나서는 길 등.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인생살이를 나그네 길이라 이르는 것도 이 때문일까? 길을 나섬은 꼭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리 누가 떠미는 것도 아닌데 결국 내려와야 되는 산길 거친 숨 몰아쉬며 기어오르듯 목이 마르고 발이 부르터도 신발 끈 조여 매고 나서는 것은 그 터덕거리는 발걸음 위에 해금 소리 하나 얹을 수 있다면 아 집시의 바이올린!   이런 생각하며 하루 종일 이 안수련의 연주를 듣고 있습니다. 저 멀리 정수년의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지난 2000년 왜 해금연주를 듣고 처음 음악편지를 써야겠다고 결심을 했는지, 그 까닭을 새삼 알 것만 같습니다. 작곡자 이용탁은 이번 공연에서 지휘를 맡았으며, 신디에 오세진, 더블베이스에 김소현과 한현정이 힘을 보탰습니다. 해금을 맡은 안수련은 해금연구회 악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수년, 강은일, 김애라 등과 더불어 해금의 연주 영역을 한껏 넓혀가고 있는 촉망받는 연주자입니다.   이 곡 들으시며 길로 이어지는 우리들의 삶 한번 뒤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곡 제목에서 그런 것처럼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는 법이랍니다. 우리들 인생만큼이나 먼 길이 또 어디 있겠는지요. ※ http://e450.chonbuk.ac.kr/~leecm로 접속하시면, 그동안의 음악편지와 음악을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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