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7 |
[초록이 넘치는 生生 삶 만들기] 도시에서 농사짓자
관리자(2007-07-16 01:09:47)
도시에서 농사짓자
이정현 | 전북환경운동연합 정책기획국장
장마철이다. 간간히 내리쬐는 햇빛이 반갑기는 도시 사람이나 들녘의 농부나 마찬가지다. 비가 그치면 작물은 몰라보게 자란다. 뿌리에서 모은 물을 힘껏 빨아 올려 잎으로 보내 햇빛을 받아 활발한 광합성으로 유기물을 만들어 내며 부쩍부쩍 자란다. 농부의 고된 수고로움과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을 만큼 작물은 자라고, 작물이 자란만큼 환한 웃음과 기쁨이 자란다.
사람의 유전자는 본능적으로 자연을 향한다. 자연을 동경하고 자연 속에서 채집하고 농사를 짓고 싶은 꿈을 마음에 담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귀농을 꿈꾸지만 누구나 다 농부가 되지는 못한다. 실제로 전주 귀농학교를 거쳐 간 도시인은 약 250명 정도인데 막상 귀농을 시도했거나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람은 약 10% 정도라고 한다. 농촌의 현실이 어렵고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 중 81.5%가 도시에서 살고 그 중 52.5%가 아파트에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벗어나는 일은 대안적인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용기와 준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손으로 ,내 노동으로 생산의 주체가 되고 싶은 꿈을 이루기는 정녕 어려운 일일까? 그렇지 않다. 조금만 노력하면 농부의 느낌과 만족을 도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좀 더 적극적인 사람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주말 농장이나 먹을거리 생협의 생산자들과 연계해 농사를 지어볼 수 있다. 씨를 뿌리고 물과 거름을 주며 싹을 틔우고 벌과 나비가 꽃을 오가며 수분을 해줘야 열매가 맺는 것도 배운다. 아이들에게 정말 멋진 자연학습장이 된다. 작물이 자라면서 아이들도 잘 자란다.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이 얼마나 맛이 있는지 아는 아이들은 땅과 농부의 수고로움을 배우면서 넉넉한 아이로 커간다.
하지만 이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한때 유행했던 주말농장도 도시인들의 특성을 고려한 프로그램이 없는 획일적인 운영으로 시들해져 마땅한 곳을 찾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도시의 텃밭은 어떨까? 단독주택 단지는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빈터나 공유지에 텃밭을 만들 수 있도록 시에서 장려하고 주변의 어르신들과 함께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다. 나무가 있는 공원주변에 텃밭을 가꾸면 도심 비오톱의 기능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숲 아래 있는 뙈밭처럼 보기도 더 좋다.
콘크리트 옥상도 근사하고 소출이 많은 텃밭이 될 수 있다. 안 쓰는 화분이나 스티로폼 용기, 재활용할 수 있는 상자만 있으면 가능하다. 텃밭상자는 12리터 정도의 부피와 25~30cm이상의 깊이만 있으면 고추와 토마토, 감자모종을 한 개씩 심을 수 있다.
4월 22일 지구의날에는 작물화분, 이른바 상자텃밭을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한 적이 있었다. 5월 12일에는 서울숲에서 몇 배의 상자텃밭을 만들어 더 많은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완성품을 만들어 드리는 게 아니고 과정을 스스로 제작해보면서 집에 가서 스스로 만들 수 있도록 했다. 나중에 꼭 사진을 찍어 과정과 결과를 보고하기로 약속을 받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로 성황이었다. 대개는 공짜니까 그렇게 몰려들었다고들 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흙을 만지며 작물 모종을 조심스레 심는 그들 표정을 보니 꼭 공짜 때문이라고만 느껴지지 않았다. 개중에는 마치 맡겨놓은 것을 찾아가는 듯한 당당한 태도도 있었고, 재배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얼른 얻어가고픈 마음만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며, 하나 더 얻어가고파 집요하게 눈치 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사람들의 모습은 흙으로부터 소외된 여러 가지 모습들이 아닌가 싶다. 흙이 사라지면서 지구온난화만 촉진한 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도 삭막해졌다. 전통적으로 대물려 오던 농경사회의 흙 공동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직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는,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 개인들의 사회로 편입된 것이다.
도시농업 텃밭농장엔 여느 주말농장과 달리 푯말이 없다. 물론 경계선 줄도 없다. 농장 간판조차 없다. 자기 밭은, 자기가 심은 작물을 보고 아는 수밖에 없다. 간혹 가다 게으른 도시농부가 잡초 밭이 되어버린 자기 밭을 몰라보고 남의 밭에 가서 자기 밭에 누가 엉뚱한 것을 심었다고 항의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래도 푯말이나 경계선을 띄우지 않는다. 푯말을 박아놓으면 무슨 공동묘지 같아 흉물스럽고 네 밭, 내 밭 따지는 경계선을 만들자니 영 정이 없다.
주말마다 막걸리 잔치를 벌이며 이웃과 친해지고 수확철마다 농사지은 것으로 잔치를 벌이며 저마다 농사 자랑과 농사 얘기로 동지가 되어간다. 그리고 농장은 농사 때문이 아니라도 언제나 들를 수 있는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하기에 잃어버린 흙 공동체 모습을 닮아간다. 이렇게 흙은 사람 사는 모양까지도 변화시키게 마련이다.
회원 중에는 나이가 들수록 썰렁해지는 부부관계가 농사라는 공통 화제가 생기면서 집안에 화기가 되살아난 경우도 있고, 결혼한 지 꽤 되었어도 생기지 않던 아이가 텃밭 농사 후 생겨 텃밭을 더욱 사랑하게 된 도시농부도 있다. 물론 꼭 텃밭 때문은 아닐 테지만 텃밭 농사 후 아이를 가진 경우가 그 외에도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역시 인간은 흙과 연결되어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도시텃밭은 일종의 무주공산과도 같다. 차지한 사람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의사가 병원에 텃밭을 만들면 원예치료 텃밭이고, 학교에 텃밭을 만들면 체험교육 텃밭이고, 경로당에 텃밭을 만들면 소일거리 텃밭이고, 교도소에 텃밭을 만들면 교화 텃밭이 된다.
더 특수하게 구체화할 수도 있다. 텃밭지기에 따라 누구는 천연염색을 잘하면 천연염색도 배우면서 농사를 더불어 즐기는 텃밭이 되고, 누구는 목공을 잘하는 사람이면 공방이 함께 있는 텃밭이 되고, 누구는 화가이면 그림이 있는 텃밭이 되고, 누구는 음악가라면 음악이 흐르는 텃밭이 되고, 누구는 천체과학자라면 밤에 별을 관측하는 텃밭이 될 수 있다.
또 다르게 예를 들면, 실업자들을 위한 자활 영농 텃밭이 될 수도 있고, 노숙자 장애인을 위한 텃밭이 될 수도 있다.
말로는 잘 와 닿지 않는 도시텃밭, 도시농업. 이것은 실상 흙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다름없다. 다만 흙이 있는 시골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도시의 콘크리트를 거둬내고 흙을 다시 살리자는 말이다. 그리하여 흙의 부드러움, 포용성, 생명성을 되살려서 우리의 도시를 살아 숨쉬는, 인간답고 자연다운 공간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꿈을 꿔보자는 것이다. 벌써 6월이다. 지금 도시 곳곳에서는 도시인들의 경작본능으로 온통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