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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7 |
[명인명장·내가살아온세상] “쬐깐한 놈이 열여덟 살 때부터 상쇠를 했지 ”
관리자(2007-07-16 01:02:44)
“쬐깐한 놈이 열여덟 살 때부터 상쇠를 했지 ”                                                             구술  유명철 ㅣ 정리  김선경ㅣ 사진  유백영 이팔청춘, 열여섯의 나이에 이미 ‘소년 상쇠’로 이름을 떨친 유명철 명인. 여린 손에 꽹과리를 잡은 지 어느덧 50년쨉니다. 그의 스승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전라북도에서 내로라하는 ‘굿쟁이’들만 모인 풍물패의 상쇠였던 아버지, 그 아버지 밑에서 부쇠를 했던 강태문, 쇳가락으로는 전국에서 따라올 자가 없던 지창근, 판굿의 일인자 기창수....하지만 가장 큰 스승은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상쇠 뒤에서 꽹과리도 없이 ‘농구’를 한 지 몇 개월만에 부쇠 자리를 차고 들어앉더니, 1년이 채 안 돼 상쇠 이름으로 ‘원정공연’을 다녔던 유명철. 그는 타고난 굿쟁이였습니다. 거듭되는 불운으로 한때는 손에서 꽹과리를 놓은 적도 있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현역으로 돌아온 그는, 굿판을 떠났던 7년 세월이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기량으로 사람들을 혼을 빼앗았습니다. 역시 굿은 타고난 재주와 신명에서 비롯되는가 봅니다. 전라좌도 부들상모의 명인, 유명철 선생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굿치는 걸 봤어    내가 태어난 곳은 남원시 금지면 사매면 삼백 몇 번지라고 하는데, 번지는 모르겠고....거그서 열세 살 먹을 때까지 살았어요. 초등학교 졸업까지는 거기에서 했지요.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남원시 금지면 상귀리 87번지서 살고 있고, 본적은 82번지요. 거기에 우리 조부님도 사셨고, 아버님도 사셨고, 그런디 인자, 어머니가 외가 동네로 피난을 갔대요. 일정 때. 일제 때 우리 조부님이 독립운동을 허셨거든. 그래서 쫓겨다닌 거라. 가사가 풍비박산되니까, 우리 아버님이 어머니를 처가에다가 보내놓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산 것이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해서 유치장에 살고. 가족을 못 살게 하니까 나를 거그(외가동네)에서 낳았대요. 낳아가지고 거그서 열세 살 묵을 때까지 살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다시 왔지. 갈 때는 어머니가 친정에 오빠도 계시고 하니까 살았는데, 친정 오빠도 돌아가셔서 의지할 곳이 없어져버렸지. 근디 여그는 작은 아버님들도 다 계시고 일가들도 많이 있으니까 다시 인자 시가 동네로 온 거지. 아버님은 6.25때 돌아가셨어요. 52년도에. 아버님은 큰상쇠를 하셨어요. 나는 큰상쇠를 못했는데. 큰상쇠가 뭐냐면, 전라북도 도에서 인정을 한 대표팀 상쇠로 전국을 돌아다님서 대회에서 1등을 허고 다녔어요. 그때가 1948년도 정부수립 되면서부터 허셔 가지고, 52년도까지 하셨지. 허시다가 6.25를 만났고 잠시 쉬시다가, 다시 허시다가 인자 돌아가셨지.   45년도에 해방이 되어 가지고 46년도에 처음으로 서울 창경원에서 전국대회를 했었대요. 그때는 창경원이라고 했잖아요? 지금은 창경궁이지만... 그때 전라북도 선발팀으로, 말하자면 상쇠로 가서 무조건 거기에서 1등을 했대요. 그 후로는 인자 가는 곳마다 그 팀을 데리고 다니면서 좌도를 했지. 그때는 어른들 말로 선발 시험을 보는데, 전라북도 대표팀을 뽑는데 여러 군데서 왔대요. 정읍서도 오고 진안, 장수서도 오고, 금산, 그때는 금산이 우리 전라북도였으니까, 그런데 남원이 그 중에서 좌도 잘하는 사람들을 싹 뽑아가지고 1등을 했답니다. 그때만 우도가 좌도한테 맥을 못 췄답니다.   저는 어려서 아버지가 굿치는 것을 봤어요. 왜 봤냐면, 그때 아버지가 상쇠로 있던 그 단체를 국가에서 허가를 내줘 가지고 포장치고 돈 벌러 다녔거든. 그러다가 남원에도 오셨단 말이여 그때. 근디 광고 돈다고 하죠? 일본말로 마치마리. 그걸 하고 다니면서 우리집에까지 와서 태평소를 불고 치고 이런 걸 내가 봤거든. 그런 것만 봤지, 아버지가 허시는 것은 사실 한번도 못봤지. 그런 것만 봤지. 팔려갔으니까 치라면 쳐야지 어쪄?M   아버지가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집에는 별로 안 계셨어요. 하도 없이 살아서.... 우리 증조부님 계실 때는 그 근방에서 우리집이 젤로 부자였대요. 그런디 할아버지가 인자 그 재산을 독립운동하면서 다 쏟아부은 거지. 자식들한테 뭐 하나 주지도 않고....아무 것도 안 줘분 거여. 그러고 인자 당신은 돌아가시고, 10년이나 유치장 살면서 고문 받아가지고 돌아가시고, 남은 자식 4남매는 전부 다 까막눈 만들어놓고 돌아가셨지. 그렇게 아무 것도 없이.   밑천도 뭣도 없으니까, 아버지는 오직 벌어서, 왜정 시절에는 왜놈들 때문에 아무 것도 벌도 못하고 그러다가 해방이 되니까 굿치고 돌아다니면서 돈을 악착같이 모았지. 그래가지고 그놈으로 모도 논 사고 뭣허고 그랬지. 오죽해야 내가, 우리집은 방 하나, 부엌 하나, 변소라고 저어그 담벼락 밑에 하나 있고, 그 변소에다가 돼지 키우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방 하나, 부엌 하나!   그런디 그때는 넘들이 소 몰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 그래서 왜 우리는 소 안 키우냐고 어머니한태 물어보니까 어디에다 키울 거냐고 하시더라고. 그렇지만 먹고 사는 것은, 그 시절에 보리밥 안 먹고 쌀밥 먹은 집은 우리집밖에 없었거든. 아버지가 돈을 벌어가지고, 하도 고생을 해놔서, 인자 편허게 잘 먹을라고. 시골 농사꾼 논 열 마지기허고 밭 서마지기는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그것 딱 사놓고는 일 안 하신다고 독우물(옹정리)에서 제일 상머슴을 데리고 살았어요, 아버지가. 하도 젊어서 일을 많이 허고 고생을 많이 해서. 그것 농사 지어봤자 머슴 새경으로 다 나가버리니까 우리는 뭐 먹고 살어? 아버지가 다시 굿 쳐서 벌어 가지고 우리는 먹고 살았지. 그렇게 편허게 살라고 허다가 6.25를 만나부렀다고! 그래서 6.25때 그렇게 되부렀지.   그때도 안 돌아가실라면 안 돌아가실 수 있었는디, 6.25가 나니까 굿을 못 치게 했지. 칠 수가 없었지. 그러다가 52년도에 휴전이 돼 가지고 좀 잠잠해질 쯤에 그때 정월달에 굿을 쳤던 모양이야. 그때만 해도 정월달에 ‘뜰밟이’라고, 마당밟이라고도 하고 지신밟이라고도 허는데, 정초에 집집마다 발로 밟음서 액을 막는 것이 있었는디, 이 근방에서는 순창이 아조 심했어. 전라남도 옥과 같은 디도 그랬고. 그 사람들은 자기동네 사람들이 굿칠 줄 알아도, 잘 치는 기술자들을 사다가 동네사람들헌테 굿을 보였지.   그런디 그때 순창군 팔덕면....거기서....마을 이름이 생각 안 나는디, 그 마을에서 아버님을 초청을 했어. 그런 굿은 혼자는 못 허거등. 부쇠도 있어야제, 마을사람들이 못 맞춰서 쳐주니까 장구도 데려갈 사람 있어야제, 그래서 인자 장구는 금산 사는 최상근 씨라고 있었어요. 이 분이 전국대회 나갈 때 셋째장구 친 사람이거든. 그 분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가 항상 그 분을 데리고 다니셨대요. 부쇠는 저의 스승이였던, 아버지의 부쇠 강태문 씨라고, 그런 분들을 데리고 굿을 치는데, 그때는 굿 칠라면 지서에다가 마을에서 허가를 얻어 가지고 쳐야 하는데, 허가 과정에서 밤굿은 안 치기로, 그때는 산사람(빨치산)들이 많이 있으니까 밤굿은 안 치기로 조건을 달고 마을사람들이 허가를 얻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밤굿은 안 쳐야 될 것 아니야? 낮에만 치기로 했으니까 낮에만 치고 말아야 허는데, 다 치고 마지막 날에 판굿을 하는데, 판굿이라고 하면 그 상쇠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량을 전부 다 보여주는 것이 판굿이여. 지금이니까 간단간단하게 해서 그렇지, 옛날에는 그것 아니었어. 한번 치면, 저녁밥 먹고 딱 치면은 새벽 3시경에나 끝나거든. 그런디 그것을 해뿔자고 그랬던 모양이여 마을 청년들이. 지서에서 허가 얻은 것 없애불고 그냥 술먹고 그러니까 굿을 쳤던 모양이여. 팔려갔으니까 치라면 쳐야지 어쪄? 그래야 돈을 받지.   그런디 그 이튿날 불려들였던 모양이여. 굿친 사람들, 대표자들 싹 다 불려가서 죽도록 두들겨 맞았어. 아버지가 그 후유증으로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지. 그렁께 일찍 돌아가셨어. 아버지가 쉰셋에 돌아가셨응게.   부쇠였던 강태문 선생은 우리 아버님보다 세 살 아래였는디, 그 분은 아편을 허신 양반이여, 아편! 그러니까 그때 두들겨 맞았을 때도 아편을 맞아부렀대요. 그런디 아버지는 안 맞은 거라. 그 분들이 맞으라고 하니까, 한 방이라도 맞으면 중독되는 건 줄 알고 아예 아버지는 안 맞았대요. 그러니까 아편 맞은 사람은 다 괜찮았는디, 혼자만 안 맞아가지고 혼자만 병이 들어부렀지.   열여섯 묵으니까 굿이 허고 싶더라고   그래서 강태문 선생님한테서 제가 배웠죠. 열여섯 살 묵으니까 굿이 허고 싶더라고. 옛날 어른들이 봄에 못자리 허고 나면 화전놀이를 허고 그러거등, 꽹과리 장구 치고 노시다가 잠깐 쉴 동안 내가 한번 쳐보고 그러면, 그 분들보다 내가 낫어!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 가지고, 어머니도 이걸 좋아하셔가지고, 그래 너도 배워봐라, 그래서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강태문 선생한테 데려다 줬죠.   그때 강태문 선생은 독우물에 사셨는디, 지금으로 말하자면 행정 명칭이 옹정리여. 독아지 옹자, 샘 정자 해서 옹정리! 그런디 지금도 독우물이라고 해야 잘 알아들어. 그런데 그동네 사람들이 굿쟁이가 하도 많아가지고, 아버지가 전북 대표로 서울 나가실 때 그 동네에서 나간 사람들이 근 10여명 정도가 되었대요. 부쇠가 그 동네에 있었제, 소고치는 분도 네 분이나 그 마을에 있어제, 징수가 두 분 다 들어갔제, 대포수까지 다 해서 열한 명인가 들어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옛날에는 독우물굿, 독우물굿 하면 아주 유명했대요. 그래서 우리 아버님도 독우물 사람으로 인정을 해준다고. 독우물에 안 살았는디 “독우물 유한준이요”그랬당게. 제가 다니면서 들어보니까 그렇더라고. 너도 독우물 사냐? 그러더라고. 느그 아부지가 독우물 사람 아니냐고. 그만큼 독우물굿이 전라북도에서는 이름이 났어요.   그래서 내가 독우물로 갔는디, 지금은 누가 찾아오면 일대일로 가르쳐 주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고, 당신이 굿치는 데 데리고 가서는, 내가 굿을 칠 테니까 내 뒤에서 나 하는 것을 보고 배워라는 식이여.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아버지가 쓰셨던 상모를 아버지 밑에서 굿을 치던 장희덕이라는 분이 와서 가져가셨대. 필요 없으니까 어머니가 주셨겠지. 그런디 우리 아부지거니까 참 좋았을 것 아니요? 그래서 이 양반이 그걸 쓰고 다닌 거여. 근디 우리 어머니가 아들이 배운다고 하니까 그걸 다시 주라고 하니까, 그걸 안 주고 어디서 쓰던 것을 줬어. 그놈을 갖고 오라고 해서 내가 정월 초이튿날 저기 전라남도 담양, 담양읍 천변리라고 있는데, 그 동네에서 이 강태문 선생님을 모신 거여. 그래서 나를 데리고 간 거라. 맨 처음에! 열 여섯 살 묵어서. 만으로 열 여섯이요, 집 나이로 열 일곱 살 묵었어. 농구를 해야 상쇠를 헌대요   원래 상모가 이런가보다 하고, 반주 장씨(장희덕)가 준 상모를 갖고 갔는데, 강태문 선생이 이렇게 보더니 말씀도 안 하시고 혀만 쯧쯧 차고 마시더라고. 왜 그런고 했더니 아주 못쓰는 거여, 말하자면. 진자라고, 상모 꼭지가 있는디, 그걸 나무로 깎아야 밤이슬을 맞고 비를 맞아도 잘 돌아가는디, 그것은 놋쇠더라고. 놋쇠는 이슬만 맞아도 안 돌아가부러. 글고 닳아져쌓고. 어두워지면 안 돌아가부러. 밤이슬 맞으니까. 고놈을 갖고 가서 그걸 쓰고, 당신 뒤에 나를 세우드만. 원래 상쇠 뒤에 부쇠가 스는디, 부쇠를 제 뒤에다 세우는 거여. 그걸 농구라고 허는디, 제가 그 농구를 허는 거여. 꽹과리도 없이, 꽹과리 채 하나만 들고, 상모 쓰고 앞에 선생님이 허는 것만 보고 그대로 따라서 허는 거요. 꽹과리를 치면 굿을 배려버리니까 안 준 거여. 이 양반이 말씀은 안 하셔도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거여. 내 뒤에 세워놓고 나 허는 걸 보고 배우라고 헌 것이지.   그렇게 5일간을 따라 댕겼어요. 그렇게 농구생활을 했었어요. 제일 처음에.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농구를 해야 상쇠를 헌대요. 농구 안 헌 사람들은 상쇠를 해도 헛상쇠다 그것이여. 그래서 농구를 그렇게 5일간 따라 댕겼는데, 5일째 되던 날이 담양 장날인데, 그때가 자유당 때여. 근디 거기에 국회의원 나올라고 허는 사람이 있었는디 서울 대한극장이 그 분 것이라고 하더라고. 상댕히 부자인디, 그 집에서 인자 장날 아예 자리를 잡아가지고 판굿을 치는 거여. 거기서 상쇠가 굿을 치면서 알아서 개인놀음을 허래요. 생전 꽹과리 한번도 안 쳐본 사람을. 그래서 그냥 뒤에서 보고 했던 것을 그냥 했지 뭐. 지금도 제가 체격이 작은 편이지만 그때도 작았어요. 제 나이 또래에 비해 제가 좀 작았어요. 만 열여섯 살 먹었는디 작아! 그 쬐깐한 것이 굿을 치니까 돈을 많이 벌었어. 징을 딱 엎어놓으니까 관객들이 거그다가 돈을 막 주더라고. 난생 처음으로 굿치고 돈을 벌어봤제. 나는 생각도 안 했는디, 그 징수가 돈을 딱 개려갖고 요것은 니가 번 것이여, 허드랑게. 담양 사시는 분인디 저를 줘불더라고. 긍게 누가 냄새도 못 맡었제.   그렇게 해보고 인제 그 뒤에 다시 또 일주일간 굿 허는디 거그서 이틀 동안 뒤에 또 따라다님서 했지요. 그러고는 그 해 순창으로 넘어와서 몇 군데 다니고 뭣허고 그러다가 꽹과리를 주시더라고. 부쇠 뒤에다가. 그때 부쇠가 왕판옥 씨라고 남원에 사시는 분인디, 그 분이 부쇠고 그 분 뒤에다 저를 세웠어. 근디 그 이듬해에는 왕판옥 씨를 빼버리고 저를 부쇠로 세우시더라고. 2년! 그러면서 그 이듬해 선생이 남원읍 조산리(현재 조산동)로 이사를 오셨어. 조산리라는 마을에서 농악을 헐란디 잘허는 선생을 모셔야겄다 해서 이 선생을 모셨어. 이 선생이 원체 돈도 없고 아조 가난해도 그런 가난이 없어. 우리 아버지는 몇 년 돌아다님서 해가지고 논도 사고 그랬는디 이 양반을 그렇게 못해. 왜냐? 아편을 싹 해부러서 없어! 돌아가실 때까지 동냥치처럼 사시다가 돌아가셨어.   근디 인자 이 양반을 조산마을에서 자그만 오두막집을 하나 줘가지고 양식도 주면서 살게 헌 거여.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을 가르쳐서 조산 농악단을 데리고 여수 오동도에서 열리는 전국농악대회게 나갔는디, 그때는 상이용사들이 대회를 주관했어. 농악경연대회를 붙여놓고 오동도 입구에서 입장권을 팔더라고. 돈 받아가지고 허드라고. 그때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미국서 넘어온 백푸대라고, 누런 가마니떼기가 있는디, 그 자루에다 막 돈을 집어넣드라고. 아예 입장권을 사들 않고 그냥 돈으로 넣어. 상이용사들이 갈쿠리 차고. 그때 정읍서 한 팀 가고, 우리 가고, 곡성에서 기창수 씨라고 하는 분이 큰상쇤디, 그 분허고 다섯 팀인가 왔드라고. 그때 갈 때 내가 셋째 쇠 헐 때여. 왕판옥 씨가 부쇠, 내가 셋째 쇠. 넷째 쇠는 저보다 나이 아주 많이 먹은 분이 했고. 그 대회에서만 셋째 쇠를 했제, 마을 댕길 때는 저를 부쇠로 세우시더라고. 그렇게 한 1년간 부쇠를 했지. 뭐 1년도 아니고, 정월에만 나가니까, 정월 초사흗날에 나가면 음력 2월 보름쯤 되면 집에 들어와요. 한 40일 정도 허죠. 40일 다 굿을 치는 건 아니고, 이 마을에 가서 하루 치고 또 쉬었다가 저 마을 가서 치고. 그렇게 배워가지고 나중에는 제가 상쇠를 해버렸지. 왜냐하면 우리 선생님이 몸이 쇠약해서 굿을 못쳐 부렀어요. 그래서 어려서, 열여덟 살 묵어서부터 상쇠를 했죠. 제 뒤에는 영감님들이 따라 댕기고, 허허허! 학업도 중단하고 굿쟁이가 된 거지   아마 소질이 있었던가봐요.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아조....학교는 다닐 수가 없게 돼버렸지. 중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아버지가 제 열 한 살 묵어서 4학년 때 돌아가셨는디, 어머니가 살기가 복잡허니까 우리를 데리고 본래의 고향인 상귀리로 돌아온 거여. 근디 아부지가 논 다섯 마지기 밭 서마지기 구입하면서 빚을 좀 얻었는디, 그 빚 갚느라 학교도 못 댕겼지. 그렇게 고생을 했어요. 고생을 허고 아주 호밀밥만 먹고 살고...비참했어요. 지금은 어떤 사람들이 별미로 꽁보리밥 먹으러 가잖아요? 나는 그것 안 먹으러 가. 어찌나 질려버렸는가 못 묵겄어요. 그렇게 학업도 중단허고 굿쟁이가 된 거지, 굿쟁이가. 기창수 선생허고의 인연은, 저희 아버님허고 기창수 씨허고 같은 선생헌테 굿을 배웠대요. 굿 동기여. 기창수 선생님이 연세를 몇 살 더 잡수셨어요. 그러니까 똑같이 배워가지고 그 분은 곡성에 터를 잡고, 우리 아버님은 남원에 터를 잡고, 완전히 인자 결별된 거제. 그런데 뿌리는 한 뿌리 아닙니까? 한 선생한테 배웠으니까. 그런데 지금이니까 그렇지, 옛날에는 판굿을 못 치면 상쇠 인정을 못 받았어요. 일주일이 됐든 5일이 됐든, 그 마을에 팔려 가가지고 맨 마지막에 판굿을 쳐야 그 이튿날 올 때 일당을 주지, 판굿을 못 치면 일주일 내내 고생해도 돈을 안 줘요. 돈도 못 받고 떨려나와. 그런디 나는 강태문 선생을 따라다니기는 했는디, 그 동안에 판굿을 배왔겠어요? 알기는 싹 아는디, 순서를 몰라. 알기는 알아도 아직 미흡한 것이 많은디 그것을 제대로 전수를 못해주고 돌아가셨어. 그래서 그걸 기창수 선생님한테 가서 배웠죠. 그래서 제가 본래 꽹과리 잡고 허는 행동, 상모 돌리는 모든 기반은 강태문 선생헌테 배왔고, 판굿은 기창수 선생한테 마스터하고, 쇳가락은 그 중간에 우리 아버지 밑에서 셋째 쇠 했던 분이 진안 용담 사셨는디, 그 분 존함이 김자 수자 동자여, 김수동. 그 분이 셋째 쇠였는디, 가락이 아조 좋아. 상모 돌리는 기술은 없는디 가락이 아조 좋아. 59년도에 추석을 앞두고 금산에 사는 최장근 선생이 농악단체를 하나 만들었어요. 포장치고 돈 벌라고. 옛날에 아버님 밑을 따라다니던 분들 중에 살아있는 분 몇 분허고, 그 분의 제자들, 그리고 제가 스카웃을 당했죠. 저를 스카웃해서 제가 셋째 쇠를 쳤어요. 아버지 밑에서 셋째 쇠 쳤던 분이 상쇠, 넷째 쇠 쳤던 분이 부쇠, 제가 셋째 쇠를 했죠. 그래가지고 3년간 포장거리를 다녔어요. 그렇게 조금 다니는디 4.19혁명이 60년도에 났잖아요. 그래서 집에 와서 단체가 해산은 안 되고 잠시 쉬었어. 그러자 또 몇 개월 다니다 보니까 5.16군사혁명이 나서 또 쉬었어. 그런데 그 동안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제 1회가 있었는디, 말하자면 61년도여. 덕수궁에서 있었어. 그런디 전라북도 대표팀으로 그 단체가 옴싹 갔죠. 그것도 전주에서 예선을 봤어요. 옛날 공설운동장에서 예선을 봤는디 정읍서도 나오고 김제서도 나오고 우리도 나오고 그랬는디 우리가 1등을 헌 거라. 그래서 덕수궁으로 갔어. 제가 그때 셋째쇠로 따라갔는데, 그때 우리 전라북도 대표팀이 1등을 했어.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는 제일 처음에 46년도부터서 1등을 허고 다니셨고, 저는 인자 상쇠를 못허고 셋째쇠를 허면서 1등을 했지. 그때가 민속경연대회 1회였다고 하드만. 73년도엔가는 개인상을 탔는디, 그때 막 통일벼가 나와 가지고 인자 쌀이 자급자족이 되니까 전국적으로 각 시군에서 농악경연대회를 했어. 전라북도에서도 제1회 농악경연대회를 했는데, 그때 남원 대표로 내가 상쇠를 해가지고 개인상을 탔지. 그때가 1회 전북 농악경연대회. 지금도 그것을 계속 하고 있잖아요. 그 대회예요. 인자 굿을 안 쳐부러야겄다!   결혼은 내가 일찍 했어요. 스무 살 먹어서. 언제냐면 그 최장근 농악 다닐 때. 단체 다닐 때였는데, 처음에는 남자들만 단원을 구성해가지고 다니다가, 나중에 여성농악단이 생겼거든. 그러니까 관객들이 모도 여성농악단한테 가. 그래서 우리도 여성농악단에서 꽹과리 치는 사람, 장구치는 사람을 뽑아가지고 남녀 혼합단체를 허고 다녔어. 그렇게 다니니까, 제가 집에서 종손이고 우리집에서 아주 저를 늦게 두었어요. 어머니 연세가 많고. 왜 나를 늦게 뒀냐면 우리 어머니가 애기를 열셋을 낳았대요. 그런데 열셋 중에 열을 죽였대요. 쬐끄만 할 때 모두 홍역으로. 그래서 나를 맨 마지막에 낳았는데, 어머니랑 같이 댕기믄 싹 다 손자라고 허지 아들이라고 허는 사람 없었어요. 몇째 손자요? 이래.   그러니까 빨리 손을 보고 싶어라 허제. 내가 종손이라. 그런디 하필 단체를 가니까 맨 여자들허고 다니잖아. 그러니까 잘못하면 저런 여자들 데려오면 살림도 못허게 생겼고, 그러니까 서둘러서 장가를 보낸 거라. 그래서 장가를 스무 살 때 갔어. 정월 달에 애기 낳고 군인을 갔제. 군인 가서도 장가 안 갔다고 하니까 또 믿데. 그래서 지금 내가 예순여섯 살인디, 딸내미가 마흔다섯 살 묵었어. 우리 친구들은 학교 보내고 그런디 보기에 심란스러워.   결혼허고도 굿을 계속 허고 다녔는데, 내가 군인 가니까 그 단체가 해산 됐어. 핵심이 나였는데, 왜 그러냐면 다들 나이가 많고 내가 나이가 제일 어린데, 어린놈이 개인놀음 같은 것 허니까 내가 다 손님들을 데려와. 그러다가 내가 군인을 가니까 안 될 것 아니요? 그러자 인자 여성농악단이 막 도처에서 나타나부렀어. 그러니까 다 손님들이 고리 가불제. 그래서 단체가 해산되고 6월달에 군대를 갔지. 군대 갔다 오니까 아무 것도 안하시고, 2월인데 굿도 안 치시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인자 내가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단체를 만들고 또 매년 전라북도 농악경연대회가 있어가지고 고등학교에 가서 가르쳤제. 구례 농고에서 3년 동안 학생들 가르치고, 남원서 수지중학교에서도 한 2년 가르치고, 남원 운봉 축산고등학교에서도 한 2년 가르치고, 전주농고에 가서도 가르치고...그러다가 인자 집에 좀 요상한 일이 생겨가지고....이상하게 일이 꼬이드만. 내가 돈을 주고도 상대방한테 사기꾼으로 몰렸어. 내돈 주고 내가 몰려가지고 검찰청에 불려댕기기도 했고, 또 우리 애기가 교통사고가 나서 하나가 그냥 죽기도 하고. 또 그냥 막 집안이 으시시허드라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저허고 친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해줘요. 내가 너하고 친하니가 이런 말 해준다고 하면서, 전부 다 떠도는 말들이 “명철이가 재수가 없는 것이, 정초에 대가리를 하늘에다 돌리고 댕기니까 재수가 없다”고 그런다는 것이여. 그 말을 듣고 보니까 그것도 그럴싸 해요. 그래서 아닌 게 아니라, 굿을 안 쳐버려야겠다! 그래서 굿을 81년도부터 안 해버렸어요. 안 쳤어요. 제것을 곡성 사는 사람한테 다 줘버렸어. 니가 내것 갖고 해라고. 가방까지 전부 다 줘버리고는 안 해부렀어, 아예. 7년간을 아예 안해버렸지.   팜플렛을 보니까 마음이 달라지드만   안 했더니, 88년도에 서울 정동에 있는 공간사랑에서, 그때 당시 이영환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를 그 무대에다 올린 것이여. 나는 안 하고 있는디. 소개를 해준 사람이 그렇게 무대를 마련허면 헐 것이라고, 그 사람을 속인 것이여. 홀린 것이지. 전부 다 허가 내서 팜플렛 다 나눠주고 해놓고는 저한테 사람을 보낸 거지. 5일간 독무대여. 주야로 오후 2시, 저녁 7시 공연. 긍게 열 번 공연을 해야 허는 것이지. 거그는 공간이 작잖아요. 한 백 석 정도 될 거여. 그 입장권이 싹 날짜별로 나간 거여. 입장권까지 다 매매를 해놓고는 연락을 헌 것이제. 나는 안 가부렀지. 안 간다고. 그런디 몇 사람을 보냈어. 그래도 안 되니까 당신이 직접 왔더라고. 그날이 공연날인디 그날 왔어. 이명준이라고 허는 분허고 같이 집에 와서는 우릴 죽이든지 살리든지 해도라 그거요. 아, 팜플렛 갖고 온 것 봉게로 그날이 공연이여. 내 사진을 어디에서 입수해다가 그렇게 해놓고는...그걸 보니까 마음이 달라지드만. 그런디 내가 뭐가 있어야지. 이 사람들 차로 다시 곡성에 가서 내 도구 달라고 하니까 마침 아주머니가 있어. 가방이 있더라고. 그놈 그대로 갖고 서울 가서 보니까, 이미 낮공연은 틀려부렀지. 사과문을 가득 붙여놨드만. 근디 내 공연을 아주 길게 극장 앞에다 해놨어. 그래서 인자 했죠. 근데 상모를 내 취향에 맞게 해놨는데, 곡성 사람이 또 자기 취향에 맞게 바꿔서 상모가 안 돌아가. 그래서 저녁공연은 엉터리로 허고 저녁 내내 다시 만들어가지고 그 이튿날 했더니 모두 놀래드라고. 그렇게 몇 년 안 해부렀는디 넘의 걸 갖다가 실수 하나 없이 헌다고. 지금도 그런 말들 많이 들어요. 아주 이상한 분이라고. 임실서 왔다는데 굿을 괜찮게 허드란 말이여   그러고는 또 안 했어. 그런디 88년도 공연허기 전에, 내가 굿 안허고 있을 때 남원에서 삼동굿이 대통령상을 탔어. 그 말 허기 전에 내가 이것은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해. 기사에 내도 좋고 안 내도 좋은디, 사람이 역사는 바로 잡아야 허거든. 내 것을 왜곡을 허는 사람이 있어.   그때가 남원에서 삼동굿놀이가 민속경연대회를 나가가지고 대통령상을 받았어. 그때는 내가 굿은 안 헐 때여. 98년돈가? 좌우간 그랬을 거여. 굿을 헐라믄 뭣이든지 들러리로 농악이 필요해. 이 사람들이 나를 믿고, 내가 상쇠할 걸로 믿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양기승 선생님이라고 그분이 총연출자였는디, 김성범이라고 현재 시의원 허는 분이 있어. 그 분허고 네 분이서 우리집을 오셨더라고. 와서 그런 얘기를 싸악 해요. 올 7월달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가는데 남원 삼동굿놀이가 발탁되었다, 니가 와서 보조역할을, 농악이 인자 보조역할이니까, 보조역할을 해줘야겄다. 그래서 내가 그 얘길 했죠. 자기네들도 나가 굿 안 헌다는 말은 듣고 왔어. 그래도 우리가 설득허면 올 거이다, 헌 것이지. 사실 내가 마음을 비워버리고, 기구까지 전부 다 줘버리고 있는디, 도저히 못 허겄다고, 그러면서 임실 사는 양순용 씨가 떠올랐어. 내가 양순용 씨를 어디서 맨 처음 만났냐면 순창에서 뜰밟이 헐 때, 제가 군 제대해서 스물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먹어서 제가 상쇠를 허고 여수 사는 조동구라고 있는디 그 친구를 장구로 데리고 갔어. 풍산면 반월리라고 허는 디서 초청이 들어와갖고 굿을 치고 있는데, 그때만 해도 양순용이란 사람은 이름도 안 들어보고 아무 것도 몰랐지. 그런데 굿을 치고 있으니까 어떤 모르는 사람들이 서인가? 그때는 가방이 없었제. 책보에다가 기구를 싸서 들고 댕겼어. 그런디 그런 보따리를 든 젊은 사람들이 서이서 우리굿을 보러 왔더라고. 그런디 마을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 저 사람들이 장군리서 굿을 치고 여그로 온 사람들이다, 그려.   그때 순창이라는 데는, 상쇠를 사다가 굿을 치고 있는데, 다른 팀이 들어와서 그 사람들보다 굿을 잘허믄 그 사람들이 떨려나가. 굿을 그렇게 했어. 근디 요놈들이 나를 떨려낼라고 여그를 왔어. 근디 되덜 못허지. 굿을 보니까. 그니까 말도 못허고 가버렸다고.   나는 거기 왔다 간 줄 몰랐는데, 몇 년이 흘러가지고 제1회 전라북도내 각시군 농악경연대회를 하러 갔는데, 임실서 왔다는데 좀 괜찮게 허드란 말이여 내가 보니까. 그래서 허고 나오길래 내가 만났어. 보니까 임실 같은데 굿을 잘 헌다고 말이여. 그러냐고 통성명을 허는데 보니까 양순용이여. 죽은 양순용이여. 나이도 등등헌 것 같은데, 따져보니까 나보다 한 살 많고 내가 한 살 작더라고요. 우리 친구로 지내고 좋은 일 있으면 서로 부르고 그럴 테니 오니라. 아 그럼 좋다고! 그 사람은 무대가 임실배끼 없었어. 나는 그 전에 전국을 돌아댕기고 별짓 다허고 댕긴 사람이고. 필봉농악이 대사습 장원을 했지   근디 그때 무렵에 내가 굿을 안 친다고 헐 때, 데모가 한창 일어날 땐디, 그 놈들이 다 굿 배우러오는 놈들이여. 근디 서울에서 굿을 배우러 오는디, 그때 이보형 교수라고 있었어. 그때는 문화재 관리국이었는디, 거그서 전문위원을 데리고 나를 취재를 왔어. 이보형 교수가 문화재 관리국에 있었어. 거그 사진기사랑 뭐랑 데리고, 장구치는 김병섭 씨라고, 정읍사람인디 서울로 이사 가가지고 돈암동 사거리 4층 옥상에다가 조립식으로 장구를 가르쳤어. 이 양반을 데라고 왔더라고. 근디 그 전에 이보형 교수가 저한테 취재를 왔어요. 제 덕을 많이 봤지. 저한테 취재해서 논문 쓰고...근디 그 분뿐만이 아니고 많이 연구를 했어요. 교수님들이. 심우성 교수허고 이보형 교수가. 근디 이보형 교수가 특별히 저한테 관심을 더 줬었지. 학교에서 제 소문도 많이 내고. 그래서 학생들한테 너는 유명철한테 배워라 그랬는데, 그때 저는 굿을 안 헐 땐디, 이 양반이 그걸 몰랐어요. 그래서 나한테 온 놈들을 다 임실로 보낸 거여. 임실 양순용한테 다 보냈어. 거그는 여건이 산골짜기 계곡마을이라 동네사람들이 그렇게 굿을 좋아허고 그랬단 말이여. 그니까 회관을 딱 내주고 학생들이 회관에서 좋아라고 배웠지. 그니까 인자 꼬리가 꼬리를 물어. 한 3년간은 저를 찾아오더라고. 근디 보내고 보내고 허니까 동네사람들이 나중에는 싫어라고 했어. 너무나 날짜를 많이 잡아 묵어서.   여하튼 양순용이허고 그런 인연인디, 삼동굿 상쇠가 필요허다고 하길래 그 사람들 차를 타고 양순용이를 데려다가 줬어. 내 대신 니가 상쇠를 해라. 그러니까 자기 스타일대로 가르친 학생들 싹 불러다가 대회에 나간 것이, 그것이 대통령상을 탔잖아! 그때부터 인자 양순용이가 떴지! 그걸 계기로 해가지고 전라북도 대표팀으로 임실 필봉농악이 선정이 됐어. 81년도인가 언제 제주도에서 전국민속경연대회가 있는디, 전라북도 대표팀으로 임실 필봉농악이 뽑혀서 가게 됐지. 거그도 복잡헌 사연이 있는디, 여그서 다 말할 필요는 없고!   대사습 제4회 때 우리 좌도농악도 우승을 한번 해보자, 그래서 필봉농악이 나갔는디, 그때는 내가 상쇠을 허고 양순용이가 부쇠를 허고 그래서, 그때 인자 필봉농악이 대사습 장원을 했지. 처음부터 제대로 굿을 다시 잡아줘야겄다!   그 후 다시 공식적으로 활동을 헌 것은, 내가 92년도부터서, 그때부터서 이보형 교수네 뭐 이런 사람들이 당신이 안 하면 농악은 소멸된다, 꼭 해야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시작을 허게 된 거여. 그러자 인자 굿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자꾸 생기고, 그래서 아이고 너그들을 봐서라도 내가 꼭 해야겄다. 근디 그 사람들이 어디서 배워갖고 온 굿들이 다 틀렸어. 그래서 아, 안되겠다. 제대로 처음부터 굿을 다시 잡아줘야겄다, 그래서 그때부터 헌 것이여.   지금 인자 나한테 배운 제자들은 나름대로 자리 잡아가지고 하고 있제. 광주에서도 굴림이라고 허는 공간을 가지고 남원농악의 뿌리를 내리고 있고, 또 광양이나 순천 여수에서도 또 그러고, 전주에도 놀이패 우리마당 같은 몇 개 단체가 다 제실에서 만나가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거지. 수원에도 있고 안산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어요. 그래도 가르치기는 가르쳤어도 공간사랑 이후에 공연은 제가 안 했는데, 제일 인자 공연을 처음 언제 했냐면, 문화저널 주관으로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그것도 한 해는 제가 사양해서 안 갔어요. 근데 몇 회째인가는 몰라도 그때부터 시작해서 근 몇 년을 또 했지. 그때 반응들이 대단했지. 공식적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고, 그러다가 인제 97년도에 정식으로 애들 단체를 가르쳐가지고 제가 발표를 했었죠. 남원농악 이름으로, 유명철 발표회를 했지.   그때 우리 마을의 넓은 터를 잡아가지고 집에서 했는디 아주 굉장했지. 그때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간판을 내걸고 했고, 그 이듬해에는 대전 한밭 농악경연대회에 제가 상쇠를 허고 데리고 가서 대상을 탔지. 그리고 인자 그 뒤로는 농악대회를 제자들을 다 보냈죠. 저는 인자 지도만 하고. 제가 앞서서 헌 것보다는, 배웠으니까 배운 사람들이 앞서서 허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좌도굿으로는 나 하나밖에 없어   남원시립농악단이 99년도 1월 9일에 창단됐는디 이 건물을 시립농악단 건물로 줘서 지금 전수관으로 사용하고 있지. 원래는 전수관도 아니고 시립농악단 연습실이여. 그걸 지금 사용하고 있지. 우리 단체가 작년도에 도문화재로 지정 받으면서 시에서 인자 전수관 지어줄라고 서두르고 있다고 하대. 돼봐야 알겠지만.   돌이켜보면 뒤늦게나마 굿을 시작허길 잘헌 것 같어. 좀 아쉽긴 아쉬운데, 만약에 제가 굿을 안 쉬고 계속 했으면 남원농악이 더 자리를 잡았을 텐데, 그것이 좀 아쉽지. 그런데 희한하게도 굿을 안했을 때는 굿이 하나도 생각 안 났어. 근디 다시 이 세계에 뛰어드니까 늦었지만 지금도 괜찮다! 그런 생각이여. 무대공연도 힘닿는 데까지는 부르면 갈 계획이여. 작년에도 전라도명인이라고 명무전을 서울에서 했는디 잘 돼가지고 올해의 예술상을 받었잖아. 창원 가서 앵콜 공연도 하고 남원에서도 하고 그랬는데,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오고...풍물 명무전이 있으면 꼭 나를 찾습니다. 왜냐면 좌도로는 저 하나밖에 없으니까! 잘 허든 못 허든간에, 보기 싫어도 부를 수밖에 없지, 허허허!   저는 지금도 제자들헌테 그래요. 첫째 거짓말 허지 말어라. 나 살아왔던 그대로를 성실하게 국악으로 답변해주고, 또 한 가지 기술을 배우더라도 제대로 배워서 보여줘라. 그것만 당부합니다. 저는 배울 때 그런 말 해주는 스승님들도 없었어요. 그냥 보고 따라서 하기만 했지. 지금처럼 일대일이 어디 있어?   인자 남원농악 전수관만 지어지면 배우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 수 있고 또 저는 제자를 잘 둬서 농악으로는 유일하게 가락보를 만들어서 냈습니다. 다들 놀래요. 또 남원농악 족보도 만들어냈고. 앞으로 계획이 딱 하나 남은 것이 동영상으로 완전히 남원농악 완판을 만들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올해 못하면 내년에 꼭 할 생각입니다. 저는 특별히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제자가 없어요. 실력들이 다 비슷비슷해요. 그중에 아, 이놈이 그래도 낫구나 싶은 사람은 있지만 남들헌테 말허기는 싫고. 저는 대를 이을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너무 많아서 걱정이죠,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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