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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7 |
[특집·등대] 푸른바다의 하얀 보석Ⅲ
관리자(2007-07-16 00:49:28)
‘등대가 없었던 그 시절의 바다’                                                                       허희철 | 사진작가 ● 배들의 안전항해를 위하여 어둠속에서 불을 밝히는 등대와 등대지기는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존재다. 그런데 변산 바닷가 마을에서 나서 바다를 놀이터 삼아 멱도 감고, 낚시도 하고, 때로는 어살에서 고기도 잡으며 자랐지만 정작 이 아름다운 등대에 대한 추억은 나에게 없다. 그 당시 변산 바다 어디에도 등대는 없었다. 그렇다고 등대를 찾아 여행길에 오른 적도 없고, 등대지기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 이렇게 등대에 대한 추억거리가 전혀 없는 내가 문화저널로부터 등대이야기 좀 해달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응하게 된 것은 등대가 없던 까마득한 옛날, 변산 바다의 지정학적 위치, 아주 복잡하고 조난 위험이 큰 해양환경, 그리고 서해바다 지킴이 개양할미 전설, 죽막동제사유적 등의 고찰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과 바다와의 관계, 항해술 등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을 같아서다. 먼저, 지도를 펴보면 알 수 있듯이 변산반도는 서해로 불쑥 돌출돼 있다. 그런데 돌출된 끝단에서 다시 한 번 더 돌출된 곳이 있다.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적벽강 사자바위가 바로 그곳으로 예사롭지 않은 지형이다. 마치 사자가 포효하며 바다로 돌진하는 듯한데, 이곳 절벽 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 수성당이 있다. 이곳은 서해바다를 연 개양할미라는 여신을 모신 해신당이다. 개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굽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며 수심을 재고 위험한 곳을 표시하고, 또 풍랑을 다스려 이곳을 지나는 교역선이나 고기잡이배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또, 1992년 전주박물관은 개양할미의 전설이 있는 이곳 수성당 주변을 발굴하여 이곳이 선사시대이래로 바다에 국가적 제사를 지내왔던 곳(죽막동제사유적, 유물은 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임을 확인했다. 이는 우리 문화에서 구술(口述)이 지닌 실증적 힘을 웅변하는 예이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 대상은 중국제 도자기, 석제 모조품과, 수령신앙(水靈信仰)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토제 말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해신(海神)임이 분명하며, 중국이나 일본으로 항해하는 배들의 안전을 위해 지리적으로 중요한 이곳에서 해신에게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가하면 연세대사회발전연구소는 몇 해 전 심청전의 근원설화인 전남 곡성군 오산면 관음사 연기설화의 고증과정에서 인당수로 알려진 인단소를 바로 이곳 해역으로 비정한 바 있다. 이는 심청이가 전남 곡성에서 선인들에 이끌려 섬진강을 따라 남해로 내려가 완도 청해진을 거쳐 다시 부안 쪽으로 북상해 중국으로 가던 도중에 바로 이곳 위도 앞바다(임수도 부근)에 있는 인당수에 빠졌다는 설화의 내용을, 즉 인당수=부안설을 새롭게 제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서해바다 창조주 개양할미의 전설이 서려 있고, 우리의 먼 조상들은 왜 이곳에서 해신에게 제를 올리며,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안전항해를 기원했을까? 먼저 이곳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면, 北으로는 하섬, 누에섬, 솥뚜껑섬, 비안도, 고군산군도가 점점이 떠 있고, 西로는 인당수로 임수도, 위도, 南으로는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따라 격포 닭이봉, 봉화봉, 봉화봉 너머로는 고창 동호, 영광의 산허리가 걸쳐있다. 지정학적으로 이곳 수성당이 위치한 지점은 선사시대 이래로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해로상의 중요 지점이었으리라 여겨지며, 삼국시대가 되면 초기백제의 근거지인 한강하류유역으로 북상하는 기점이 되고, 5세기 후반 백제가 남천한 후에는 웅진과 사비로 들어가는 금강입구를 감시하기에 용이한 지점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술이 발달되지 못했던 6~7세기 이전에 배들은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주요부분을 추적하면서 항해했을 것이고, 특이한 형상으로 돌출되어 있는 이곳을 항해상의 주요한 표시지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또한 이곳의 해양환경을 살펴보면 연안반류(沿岸反流)가 흐르고, 주변에 섬들이 많아 물의 흐름이 복잡한데다 조류도 빠르고, 바람도 강해서 항해의 위험이 큰 곳이다. 옛사람들은 이처럼 항해의 위험이 큰 이곳에서 안전 항해를 기원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곳 해역에서는 근래에만도 경악을 금치 못할 대형 조난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1931년 한 해 동안에 세 차례에 걸친 풍랑으로 어선 500여 척과 어부 600여 명이 치도 앞 바다에서 사망하였고, 1958年 음력 3월 15일에는 위도-곰소간 여객선 통도호가 침몰해 그 배에 승선한 위도주민 62명 중 두 사람만 생존하고 60명이 실종됐다. 또, 1993년 10월 10일 10시경, 위도를 출발한 서해훼리호는 위도와 격포 사이에 있는 임수도 부근에서 침몰해 292명이 사망했다. 거대 막강한 개양할미의 신력으로도 어쩌지 못한 통한의 조난 사고였다. 그래도 바다는 사람에게 유리한 생존배경이 되어 줄 것이고, 사람들은 개양할미의 보호 아래 바다를 누빌 것이다. 허철희/ 1951년 전북 부안 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 충무로에서 광고기획사를 운영하며 부안의 자연과 삶, 문화유적 등을 사진에 담아왔다. 2003년 환경미술 ‘물展’과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핵없는 세상’ 사진전을 가졌다. 지은 책으로는 『새만금 갯벌에 기댄 삶』이 있다. 현재는 부안생태문화활력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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