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7.7 |
[특집·등대] 푸른바다의 하얀 보석Ⅱ
관리자(2007-07-16 00:48:38)
째보선창과 등대   “추억이 깜빡인다”                                                                  이복웅 시인 | 군산문화원원장 ●조선조 숙종 27년(1701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를 보면 금강의 강줄기가 죽성리(지금의 죽성동)의 서쪽 낮은 산 아래로 흐르고 있는 조그만 포구를 일컬어 째보선창이라고 부른다. 선창이라는 말은 원래 배가 닿는 곳을 일컬어 부른 말이다. 부두라고도 하나 이는 근대식 선착장 시설로 상선들이 들락거렸고 일제강점기부터 주로 부두라 부르게 되어 어쩐지 친밀감이 덜하고 선창이라고 하면 비린내가 다닥다닥 늘어 붙는 갯바람이 한번쯤 휘돌아 가는 잔주름이 역사처럼 기록된 이웃 사람들의 얼굴 모습같이 정감이 드는 말이다. 지도를 자세히 보면 둔율, 송창, 개복에 있는 야산에서 모아진 물줄기가 둠벙(沼)이 되었고(옛 옥구군청 자리) 이어서 큰 내를 이루어 째보선창으로 흘렀다. 좀더 자세히 보면 아흔아홉 다리(지금의 송경교)에 버금가는 다리가 영동파출소 근처를 표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째보선창에서 해망정 기슭까지 작은 배가 즐비하게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째보선창은 조선말까지 수산물은 물론이거니와 삼남의 농산물까지 상인들에 의해 서울 지방으로 보내지는 중요한 선창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째보선창은 옛날 이곳에 째보(언청이)라는 힘센 장사가 있어 외지에서 이곳에 오면 이 째보에게 지금으로 말하자면 자릿세나 텃세쯤을 상납해야 했으며 언제나 두려운 사람이었을 것이라 해서 이곳을 째보가 있는 선창이라 부른데서 연유하고 있으며, 둘째로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볼 때 금강의 강줄기가 백마강을 향해 흐르다가 옆으로 살짝 째져 흐르고 있는 지점에 선창이 있어 이를 두고 째보선창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어원의 변천을 들 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 군산의 옛지명이 진포였으므로 진포가 찐포, 째보로 어원이 변천되어 내려온 말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째보선창은 서쪽으로 출입하는 선창으로 번창했으며 시민들의 애환과 낭만이 삶의 본질로 오랫동안 자리하여 왔으나 이제는 세월과 함께 매립되어 그 자리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시멘트 건물만이 우두커니 들어서 있어 옛모습은 오간데가 없다. 1899년 개항을 한 군산은 갈대숲이 무성한 갯벌 밭이었으며 많은 산과 산 사이는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허허로운 한적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을 근대항으로 축항하는 데는 일제가 만경평야와 호남의 쌀을 자국으로 반출하려는 정략적인 계획이 있어서였다고 그렇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08년에 발행된 「부지군산」, 「동학과 군산」 편에는 동학군의 진로차단을 염두에 둔 군사기지항으로 군산을 물색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개항당시 군산항으로 반출된 쌀은 1만9천여 석이었으며, 1934년에는 200만석으로 급격히 늘어나 우리나라 전체 쌀 반출량의 53%가 군산항을 통하여 나갔다. 따라서 1930년대 군산은 쌀의 군산으로 불리울 만큼 풍성했으며 각처에서 군산으로 군산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했다. 작가 채만식의 「탁류」는 이 시대를 풍자적으로 묘사해 우리의 농촌자본과 민족자본을 수탈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군산은 이렇게 일제에 의해 개항의 속도가 급속히 빨라졌으며 개항에 따른 봉건시대의 마감과 더불어 신문물이 군산을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1896년 기독교가 호남최초로 군산에 상륙하여 포교가 실시되었는가하면 기독교와 더불어 서양의학(예수병원)이 들어오고 교육(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 또한 서당 중심의 내방교육에서 제도교육으로 전환되었으며 유교사상에 찌든 여성상이 신여성이라는 문물제도 속에 전통과 서양문물과의 충돌이 있으면서 군산은 새로운 문화시대를 접하게 된다. 이러한 신구문물이 교차되면서 군산은 어느 도시보다도 빠르게 성장하였다. 특히 군산항을 통해서 쌀을 반출해가기 위해서는 배들이 자유롭게 입출항할 수 있는 항로 표식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개항과 함께 등대를 세우기 시작하여 어청도, 말도에 유인등대를 세웠으며, 군산항으로 오는 항로에 부표와 등입표를 설치하였다. 가장 왕래가 번잡한 째보선창 앞에 등대를 세우고 전마선으로 등대불을 밝히기 위한 등유를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째보선창 등대는 낭만의 명물로 자리하게 되어 마도로스의 파이프에서 내뿜는 연기 속에 아련한 풋사랑의 추억을 되새기기도 하고, 선창가 주막집에서 목메어 부르는 육자배기 소리와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이 비내리는 선창가 등대 불에서 깜박거리기도 했다. 배를 타고 고기잡이 떠난 사랑하는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한 여인의 소박한 모습이 담긴 곳도 바로 이 째보선창 등대가 아니던가. 세월이 무수히 비껴간 째보선창 등대 앞에서 역사의 끄트머리를 쥐고 휘청거리는 그때를 돌이켜 본다. 이복웅/ 1979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군산문화원 원장과 전북문화원 연합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한국문인협회이사, 국제 펜클럽이사,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