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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 |
[특집] 6월 민주화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아직도 귓가에...
관리자(2007-06-14 11:44:53)
6월 민주화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아직도 귓가에... 올해는 6월 민주화 항쟁이 2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987년 6월 10일, 전두환 정권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4.13호헌 조치를 빌미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6월 민주화 항쟁은 결국 6월 29일 당시 여당의 대선후보였던 노태우의 직선제 개헌 선언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약 20여일의 이 기간 동안 우리 국민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독재타도와 민주 세상을 외쳤습니다. 강산이 두 번 변했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그날’ 온 국민이 외쳤던 함성에 대한 기억은 너무 희미해져버렸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6월 민주화 항쟁 20주년’을 기념해, 당시 항쟁의 현장의 한 가운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날의 외침’을 들어보았습니다. 6월 항쟁 20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나' 이재규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부대변인 글 | 이재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부대변인 20년이라니! 87년 6월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니 우선 흘러간 시간의 무게가 압도해온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우리 주변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9시 뉴스 앞머리를 독점하던 절대권력자 ‘각하’를 대신하여 너무 권위가 없어져 오히려 문제인 ‘대통령님’의 대비된 풍경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87년 이후 한국사회는 또 다른 방향으로 고속질주해왔다. 2007년의 6월, 현재의 시점에서 ‘그날’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6월의 시간들이 남달랐던 이들에게는 바로 어제일인 듯 기억이 생동하겠지만 현재를 살아가기 바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6월은 역사책에나 나오는 아득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60년대 생인 우리 세대가 ‘배웠던’ 4.19와 6.25도 당시에는 선사시대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는데, 세계가 한 시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며, 분초를 다투는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세대에게 6월항쟁은 고구려나 조선시대처럼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는 단지 과거의 일 중의 하나일 뿐일 것이다. 90년대 이후의 젊은 세대에게는 고리타분한 공적 역사보다 서태지나 박찬호의 등장이 더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일 지도 모른다. 87년 6월의 기억은 그렇게 박제화된 유물로 남을 운명의 시간들인가. 물론 동시대를 살았어도 각자의 주관적 의식과 체험에 따라 그 시대의 부피는 다르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4.19세대, 6.3세대, 5.18 세대와 같은 시대구분법이 과도한 범주화의 한계를 넘어 한 시대의 주류 정신을 분명하게 담아내듯이 87년의 6월항쟁은 그 이전과 이후를 구획짓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6월항쟁 20년 민주화 20년>이라는 말이 한짝으로 붙어 다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이들은 6월항쟁으로 한국사회에 민주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6월항쟁의 전취물인 직선제로 치러진 87년 대선에서 군사독재의 공인 후계자인 노태우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승계하였기 때문에(그 당시의 표현으로는 ‘죽쒀서 개준’) 형식논리상으로 짧게만 본다면 6월의 국민항쟁은 실패한 투쟁이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형성되고 확인된 국민들의 민주화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연쇄 폭발하면서 87년의 노동자대투쟁을 불러일으키고 이후 각 부문에서 활발한 민주화 작업이 진행된 점, 87년 대선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88년 총선과 이후의 정치과정에서 민주화운동이 시대의 대세를 규정지었다는 점에서 6월항쟁은 20여 일의 전국적 시위 양상으로만 국한 지을 수 없는 연속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때처럼 ‘공공의 적’을 향한 공분 때문에 생면부지의 사람과 어깨를 걸고, 차들만 다니는 것으로 알았던 대로를 마음껏 내달렸던 해방공간, 모든 기존의 질서가 멈춰버린 진공지대는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이는 그때가 좋았다며, 향수에 젖은 표정으로 말하곤 한다. 그 말이 확실한 적의 존재, 군사독재의 재림을 바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광주 오월항쟁에 이어 사람들을 특별한 일체감으로 묶었던 그 ‘대동’의 기억들이 사무치게 그리울 만큼 지금 우리 사회가 흩어진 개인의 처절한 생존장으로 변했기 때문인가. 민주화 20년의 세월이 무화될 만큼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와 버린 것일까. 6월항쟁의 공과를 따져 묻는 논리적인 점검 이전에 우리들 마음속을 휘젓고 다니는, 그런 쓸쓸한 감성의 바람소리를 먼저 듣게 된다. 여기 6월항쟁의 전개과정을 일일이 기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87년 6월항쟁은 전국을 휩쓴 민주화 열풍이었다. 저 멀리 역사적 뿌리를 들이대자면 한국전쟁 이래 냉전체제, 정치군부의 권력독점이 지속되어 온 남한 사회에서 4.19 이래 가장 전투적인 군중시위가 독재권력의 후퇴를 끌어낸 일대 사변이었다. 4.19와 5.18의 학습효과로 훨씬 진전된 민주화의식을 갖게 된 국민들이 전국적 동시궐기를 통해 지배세력을 일정하게 무력화했다. 총칼 아래 엎드려 있던 대중의 잠재되었던 의지가 폭발적으로 드러나면서 미국과 지배세력은 크게 당황했다. 80년 5월처럼 다시 군부의 무력을 전면에 내세워 체제 정비를 하는 것이 효율적인 대처일 것인가, 이런 여러 고민 끝에 나온 것이 6.29선언이라는 타협책의 제시였다. 일부 산발적 반발이 있긴 했지만 6.29 후 군중시위는 거기에서 멈추었다. 어떤 이는 그때 더 밀어붙였어야 한다는 사후평가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87년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가 집권하자 야당세력, 자유 부르조와의 한계가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라며 민중적 코스를 관철하지 못한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또 어떤 이는 6월항쟁의 성공원인으로 비폭력 평화시위 방침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것은 일면적인 해석일 수 있다. 학생과 재야 등 시위를 선도했던 세력과 강경진압에 나선 지배세력의 폭력성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넥타이로 상징되는 중간층의 광범한 참여가 확대되었고 이것이 전 국민적 항쟁을 끌어낸 요인 중 하나가 되기는 했지만 여러 현장에서 민중들의 투쟁 의지는 지도부의 ‘계획’과 ‘지도’를 훌쩍 뛰어넘는 역동성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전국 곳곳에서 경찰서와 세무서, 방송국이 습격을 받았고 불타올랐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당시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자생적인 대중의 열기를 방조하는 것 이외에 정교한 민주화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다. 야당 지도자를 뛰어넘을 수 있는 국민적 지지와 신뢰를 조직할만한 정치력도 아직 준비되지 못했다. 후일 집권과정에서 드러났지만 야당정치세력도 군부독재 패퇴 이후의 전망과 준비 세력의 측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대중도 잠재된 분노를 폭발적으로 드러내기는 했지만 6.29선언의 수용에 대한 반응에서 보이듯 민주화의 전망에 대해서 대통령 직선제 이상의 비전을 갖고 있지 못했다. 만일 후보단일화 등이 성사되어 1987년에 선거를 통해 정치군부를 몰아냈다면 어찌 되었을까. 역사에 대해 사후적으로 이랬을 것이다 가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나 당시 기득권세력(정치군부, 재벌, 일부 중간층)과 민주화세력(일부 야당, 중간층, 기층민중)은 선거 이외의 장에서 더욱 가파른 대치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경로를 밟았을 경우 한국사회는 어느 방향으로 나갔을까. 당시 정치군부가 김대중에 보인 반감, 재 쿠데타의 가능성, 민주화세력의 조직화 정도를 비춰볼 때 진퇴를 거듭하면서 한국정치는 격렬한 과정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6월항쟁의 진가는 6월항쟁 이후에 비로소 나타났다. 6월항쟁의 세례를 받은 각 부문에서 민주화의 전망이 실제적인 것으로 심화된 것이다. 노동, 교육을 비롯해 여러 부문에서 민주화의 실질적 내용을 챙기려는 대중운동이 새롭게 조직되었다. 물론 정치는 우회적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으로 이어지는 15년의 시간을 에돌아가는 동안 전투성을 유지했던 야당세력은 지배세력에 포섭되기도 하고, 또 타협하면서 급진적 방식이 아닌 점진적 방식으로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이 우회 때문에 낳은 새로운 문제도 적지 않았다. 어쨌든 정치의 측면에서는 민주화의 시대정신이 유지되면서 지방자치제가 부활하고 이제는 주민소환제의 도입까지 이를 정도로 권력의 ‘제도’ 민주화는 일정하게 진행되었다. 87년 타협체제의 산물인 현행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하고 헌법적 보완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국민들의 참여방식도 다원화되었다. 87년 6월항쟁이 거리의 참여가 주를 이뤘다면 이제 UCC와 블로그, 휴대전화로 무장한 광범한 네트워크가 정치제도의 앙상한 뼈대를 대체해가고 있다. 형식적 민주화의 측면에서 보면 다양한 견제와 감시가 가능해졌고 예전처럼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이 등장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상당히 진척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회적 민주화가 가져온 후과로 사회적 양극화와 신자유주의의 범람을 들면서 그 처방으로 6월항쟁의 재연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6월항쟁세력이 다시 뭉쳐야 한다는 현실적 주문도 있다. 이성의 영역에서는 여러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대책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며 또 그렇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순정한 사람들이 이상적 민주주의 체제를 꿈꾸었던 ‘순결한 날’들, 그 첫사랑 같은 민주주의운동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기에 한국자본주의는 너무 많이 배불러 버렸고, 정치지도자들도 너무 많이 드러나 버린 것이 아닌가, 낙담이 앞선다. 그러나 다시 어쩌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길을 찾던 그때의 열정을 다시 복원할 수 없다 해도 아직 갈 길이 남았다는데, 주섬주섬 옷을 챙기며 우리는 또 어디론가 길을 따라 나선다. 이재규/  전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정책실장, 6월항쟁 당시 전주에서 비대위 활동을 했다. 현재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부대변인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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