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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 |
[특집] 6월 민주화항쟁 20주년 종교인으로 시위대의 맨 앞에 선 최인규 목사
관리자(2007-06-14 11:27:11)
종교인으로 시위대의 맨 앞에 선 최인규 목사   “6월 항쟁의 정신 잊어선 안됩니다” 글 | 최정학 기자 87년 6월 항쟁 때 종교인들의 역할이 컸다. 제복을 입은 신부와 목사, 수녀 등은 시위대의 맨 앞에서 맨몸으로 전경들에 맞섰고,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종교인들의 이런 모습이 시위대에게는 큰 힘이 됐다. 당시 최인규 목사도 시위대의 맨 앞에서, 6월 한달 간을 거의 길 위에서 보냈다.   “87년 당시 분위기는 사회전반이 굉장히 억압되어 있었죠. 그러다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의 분노가 폭발되기 직전의 매우 역동적인 상황이 됐었습니다. 여기에 불을 지핀 것이 4.13 호헌조치였죠. 당연히 군부독재를 끝내고 민주주의를 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6월 항쟁이 일어날 즈음 최인규 목사는 전주시 팔복동에 ‘전주일터교회’를 개척해 목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학생운동과 교단운동을 하다 목사가 되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동자교회’를 개척했던 것. 자연스럽게 여러 사회단체의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그 때를 ‘정치적인 민주화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을 비롯해 진정한 사회의 민주화를 꿈꾸고 활동하던 시기’라고 기억했다. 1987년 당시에는 전북인권선교협의회 노동분과 위원장과 전북목회자정의표방실천협의회 총무 등 종교활동을 통한 사회운동을 펴고 있다가, 6월 항쟁의 단초가 된 박종철열사고문치사진상규명투쟁위원회와 4.13호헌반대투쟁 활동을 하게 됐다. “6.10항쟁은 전국적인 집회였기 때문에 이것을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워낙 급박한 상황에서 대중집회를 조직하고 성사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당시 우리지역의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간부들이 수배되는 등 활동에 제약이 많았었거든요.” 1987년은 정치적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던 시기라 시민단체의 활동이 절실했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시민단체들의 역량이 있던 시기도 아니었다. 결국 6월 10일에는 시민단체 100여명과 대학생 100여명, 종교인들 100여명, 농민과 노동자 100여명이 모여 500여명 정도로 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6월 10일 첫 시위를 하는데 경찰과 대치한 상태에서 4,5백 명이 버텨내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맨 앞에 제복 입은 성직자들과 나이 지긋하신 사회단체 지도자들이 버티고 있으니까,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았죠. 경찰들도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기 힘들었구요. 경찰이 해산을 몇 차례 시도하고 포기하면 그때서야 본격적인 시위가 이루어졌어요.” 민주화에 대한 열기는 금세 시위대의 숫자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순식간에 숫자가 늘어났어요. 그때 즉석에서 모금운동을 했는데, 코아상가하고 중앙시장 상인들이 백만 원이 넘는 돈을 모아줘서 분위기도 한껏 고무됐었죠. 어떤 분은 손에 금가락지까지 빼서 주기도 했으니까요. 종합경기장에서 시작해서 민중서관 사거리까지 오면 그 사이 시민들이 엄청 불어나고 본격적인 집회가 시작됐었어요. 그러면 주변 상가에서 물이나 빵 같은거 나눠주고, 또 어떤 시민은 마스크를 사서 나눠주고 그랬어요.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나 물건 같은 것으로 참여하는 시민들도 많았던 거죠. 어떻게 보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서로 통했다고 할까, 시민들이 혼연일체 속에서 즐겁게 대동세상을 느낄 수 있었던거죠. 그때 ‘아 광주가 이랬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찰들도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할 만큼 시위의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도저히 경찰만으로는 시위대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 규모가 커진 것. 시민들에 의해 무장해제 되는 일도 비일비재해, 주요 관시설을 지키는 일 정도만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다. 때문에 시위대에는 전두환 정권이 군대를 동원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번지기까지 했고, 시위대 내부에서는 시위를 조금 자제하자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1987년 6월의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기는 6월 29일 노태도 당시 여당(민정당) 후보의 직선제 개헌 선포와 함께 막을 내렸다. “6월 민주화 항쟁은 가시적으로는 직선제를 쟁취해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6월 항쟁에 물론 운동권의 주도적 역할이 있긴 했지만,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점이죠. 시민들의 역량을 재평가 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대중운동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거든요. 6월 항쟁 이후에 대중을 중심에 둔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을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쉬움도 있다. 최인규 목사는 6월 항쟁을 통해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기와 의식을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상시적 운동의 주체로 조직화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직선제를 쟁취하긴 했지만, 이를 토대로 민주정부, 자주정부를 출범시키지 못했다는 것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제도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진전이 됐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삶 속에서 생존권적 민주화나 사회적 민주화는 아직까지 이룩하지 못했죠. 아직 우리사회에는 차별받는 사람들도 많고, 빈부의 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잖아요.” 최인규 목사는 현재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6월 민주화항쟁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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