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6 |
[특집] 6월 민주화항쟁 20주년 시위현장 걸개그림 그린 화가 송만규
관리자(2007-06-14 11:26:03)
시위현장 걸개그림 그린 화가 송만규
“가슴이 움직였던 그날, 다시 벅찹니다”
글 | 최정학기자
“6월 항쟁은 어느 날 불쑥 터져 나온 돌발적인 운동이 아니었어요. 지난 시기의 정치 사회적인 현상들에 대한 잠복된 응어리들이 국민들의 항쟁의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지역의 문화예술패들도 그 현장에서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면서 타부분과 연대활동을 했습니다.”
시위의 현장에서 한 장의 대형 걸개그림이나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 갖는 파괴력은 그 어떤 것 보다 크다. 6월 민주화항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영정 그림을 보고 분노했고, 민중의 염원을 담은 깃발아래 모여 하나가 되었다. 송만규 화가가 참여한 작품들이었다.
우리지역의 민중미술패는 1983년 말경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땅’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미술로부터 소외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시민미술학교’ 활동을 토대로, 이후에는 노동현장이나 농촌현장에 미술동아리를 만들면서 삶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미술을 통해 그들의 사회적 메시지를 표출하도록 했다.
그들의 활동이 쉽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미술패 활동이라는 것이 전국적으로도 두어 곳 밖에 없던 때여서 생소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일거리도 많았어요.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불법적인 해고가 비일비재하고, 근로조건도 열악하기 짝이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야말로 가열찼어요. 공권력의 탄압은 거의 비인간적인 수준에 달하는 상황이었구요. 농촌에서도 소 값은 물론 농산물 값이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경이다보니까 농민회를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투쟁들이 있었죠. 미술패는 이런 노동자 농민 단체뿐만 아니라 제야단체들과도 연대사업을 해왔어요. 아직 조직이 탄탄하지 않은 상태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상황이 활동을 계속하게 할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당시에도 미술패의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없었지만, 결코 상황 탓만을 할 수는 없었다.
“그때 고문 수자 중에 숨진 박종철 열사와 연세대 시위 도중에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대형 영정 두 점을 그렸어요. 이한열 열사 추모집회는 코아백화점 앞에 있는 도로를 점거해서 진행했는데, 지금은 철거가 되서 없어진 중앙시장에 있던 육교가 연단이 되고 그 난간에 이 열사의 영정을 걸어서 추모제를 지냈죠. 깃발은 미술집단에서 제작했구요.”
영정 그림이나 깃발은 현수막이나 천을 사서 건물 옥상이나 실내에서 제작했다. 경찰이나 정보기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이 제작한 유인물 인쇄를 협조해준 업주가 구속되기도 할 만큼 당시의 상황은 급박했다.
“행사 포스터의 경우엔 주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직접 제작을 했는데, 밀폐된 공간에서 수 백장을 찍고 나서 고개를 들면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나고 소변을 보면 허옇게 나타날 정도로 독한 휘발성 액체를 사용하면서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당시의 절박한 상황과 달리 그림을 제작하는 손길만은 신나고 즐거웠다.
“당시에 제가 깃발제작을 하기로 했는데, 회원들이 거의 떠나가 버려 혼자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다후다’던가, 그 천을 오방색으로 300장 가량 제단해 와서 그간에 제작된 판화를 찍었어요. 그 천은 흡수력도 좋고 뒷면까지 비쳐서 양면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죠. 그 판화를 찍으면서 어찌나 신나고 즐거웠는지 몰라요. 오방색 천에 찍힌 판화가 개개인의 손에 들려서 하늘을 향해 흔들어 대면 그 어떤 구호보다도 더욱더 감동적일거라는 기대감에 차있어서 많이 흥분되었었죠. 그런데 문제는 운반이었어요. 정말 007 작전을 방불케했어요. 집회에 참가할 사람 중 몇 명을 불러, 몸둥이에 둘둘 말아서 그 위에 옷을 입어서 검문검색을 피해갈 수 있었어요.”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미술패는 ‘겨레미술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재건하게 되었다.
“소위 운동권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숫자야 한줌도 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군부세력을 무릎 꿇게 한 것은 국민들이 역시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에요. 민주화운동조직은 봉화를 당겼을 뿐이고 진정한 동력은 노동자, 농민, 학생 조직은 물론 넥타이 부대, 길거리 노점상을 하는 분들까지 총화해내는 국민운동, 국민항쟁이란 점이었지요. 마실 물을 건내주고 빵과 우유, 성금을 전달하면서도 부끄러워 고개를 제대로 내놓지도 못하는 민중들의 힘이고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송만규 화가는 당시를 요즘처럼 명분과 이해관계가 따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던 것이 아니라 가슴이 움직였던 시대이자, 모두가 하나가 되었던 시기였다고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