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7.6 |
[특집] 6월 민주화항쟁 20주년 “6월 민주화 항쟁은 현재진행형이죠”
관리자(2007-06-14 11:24:43)
학생으로 시위현장 지킨 방용승 전북통일연대상임집행위원장 “6월 민주화 항쟁은 현재진행형이죠” 글 | 최정학 기자 ‘6월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던 당시 방용승 전북통일연대상임집행위원장은 스물다섯 살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막 복학해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대학들은 시위의 열기로 뜨거웠다. 방용승 위원장도 그 현장의 한가운데 있었다. “전두환 정권 초기에는 아주 강압적으로 체제를 정비했지만, 1984년 정도부터는 ‘유화조치’를 시행했어요. 정당치 못한 정권이었으니까요. 이때 열려진 공간을 통해서 학생들의 자주적인 운동에 불이 붙기 시작한거죠. 학생들이 직접 접했던 학원내 비리 척결에 관심을 갖고 실질적인 학내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투쟁들이 각 학교마다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어요. 물론 그 전에도 학생운동이 있긴 했지만, 그 즈음부터 학생운동이 대중적 폭발력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1986년에 접어들면서 동아리나 학생회 위주의 학생운동이 학생들의 생활단위인 학과를 기반으로 대중적 학생운동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는데, 그 총화지점이 바로 6월 항쟁이었어요.” 실제로 6월 민주화 항쟁 당시 대학생들의 역할은 컸다. 이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쟁취!’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 시위대의 중심에 섰다. 특이한 것은 시위현장에 화염병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전 학생운동을 할 때 빠지지 않았던 화염병이 6월 항쟁 때는 없었어요. 우리가 소수일 때는 전경의 저지선을 뚫고 나가 우리의 뜻을 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화염병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6월 항쟁 때는 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화염병을 사용하지 않았죠. 경찰의 폭력에 맞서 우리도 폭력을 쓴다면 시민들이 함께 참여할 공간이 없어져버리잖아요. 최루탄이 날아와도 시위대가 맨몸으로 전경들에 맞섰어요. 우리가 먼저 폭력을 쓰지 않으니까, 경찰들도 폭력을 사용할 명분을 잃어버렸어요. 시민들이 나서서 경찰들에게 ‘최루탄 쓰지 마라’, ‘학생들은 맨몸으로 있는데 왜 방망이질을 하느냐’시면서 전경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하시더라구요. 경찰 지도부도 당혹해 할 수밖에 없었죠.” 시위대를 응원해주는 시민들이 없었더라면, 또 시민들이 함께 동참해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결코 시도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방용승 씨는 당시의 비폭력 시위가 화염병을 쓰는 폭력 시위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없었더라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고 말했다. 비폭력 시위의 효과는 시민들의 참여로 이어졌다. 구경하던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시위대와 경찰의 경계선은 급속히 무너졌다. 6월 항쟁의 분수령이 서울에서 ‘넥타이 부대’의 합류였다면, 전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6월 항쟁 당시에 제가 예비역이었거든요. 근데, 시위 현장에 예비군복은 입은 학생들이 나타난거에요. 전주대 학생들이 학교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다가 훈련을 거부하고 그대로 뛰쳐나왔더라구요.” 당시에는 이런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참여가 많았다. 시위가 열리는 현장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수십수백 명씩 따로 동그랗게 모여 나눴던 ‘정치소통의 장’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6월 민주화 항쟁은 근본적으로 민중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었는데, 민중주체에 의한 민주주의에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도에 머물렀어요. 6월 29일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선포하면서 시위의 열기가 사그라들어 버린 것이 뼈아픈 대목이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6월 항쟁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이 ‘민주대연합’을 구성했었던 것이었었거든요. 특히, 제도권 정치세력의 동참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죠. 그런데, 이들의 목표는 ‘직선제 쟁취’였어요. 당연히, 6월 29일이 지나고 바로 대선 준비하느라고 제도권 정치세력들은 다 빠져나고, 시위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힘을 확인한 6월 항쟁의 여파는 그 후까지 우리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6월 항쟁 직후, 바로 현대그룹으로부터 시작해서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됩니다. 6.29 선언으로 항쟁의 열기는 식었지만, 여전히 노동현장은 열악했던 것이죠. 그게 6월 항쟁의 여파와 함께 급속하게 노동자대투쟁으로 번지게 된겁니다.” 비단 노동운동뿐만이 아니라, 6월 민주화 항쟁은 통일문제 등 그동안 억압받아왔던 우리사회의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나오게 하는 중요한 단초역할을 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여전히 6월 항쟁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4년 혹은 5년에 한번 씩 있는 선거를 통해서만 한번 씩 우리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지, 국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고 있진 못하거든요. 그리고 이런 한계 속에서 심각한 양극화 현상을 겪고 있어요. ‘신자유주의’ 열풍은 이런 현상을 더 심화시키고 있구요. 87년 체제가 이제 분명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죠. 1987년이 군부독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현재는 자본독재가 지배하는 사회에요. 주체가 군부에서 자본으로 옮겨갔을 뿐, 그때와 지금 별반 달라진 것이 없죠. 아직 평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겁니다.” 방용승 위원장은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결코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6월 민주화 항쟁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며, 그 정신은 현재 진행형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6월 항쟁의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과소평가할 수도 없구요. 국민의 힘으로 군부독제체제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절차상 민주주의를 쟁취해냈다는 것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만큼 대단한 일입니다. 당시 최대의 과제는 군부독재타도였고,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고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거든요. 하지만, 6월 항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합니다. 결코 그것이 민주주의의 완성인양 인식해서는 안되요. 1987년부터 시작된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장정은 현재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