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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 |
[명인명장] 선자장 이기동옹 “어디다 내놓아도 ..
관리자(2007-06-14 11:22:40)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은 없것다 허는 물건은  아직 못 만들었어” 구슬 이기동 | 정리 김승민 | 사진 유백영 굵은 손마디 하나에 인생역정 하나씩 새기고 살았을, 여든을 앞둔 장인의 눈시울이 두 번 붉어집니다. 부채 만들던 얘기며, 상 받고 좋아라 했던 얘기 할 때는 아이처럼 환하던 얼굴이, 자식들 얘기, 부인 얘기 하며 깊은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합죽선 하나 밖에 모르고 살아왔던 팔십 평생, 후회도 없고 회한도 없지만 가족들에게는 언제나 미안하고 힘겨운 인생살이였나 봅니다. 선자장 이기동(78세) 할아버지는 육십 여 년 동안 십만 개가 넘는 부채를 만들어 왔으면서도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부채는 만들어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대단한 의욕과 집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상의 얼과 멋을 전승하려면 혼을 불어 넣는 정성만이 통한다.”고 말하는 이기동 할아버지는 타고난 장인입니다. 대나무 마디처럼 굵고 단단해진 손마디에 서린 선자장 이기동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안히본 것이 없이 다 히봤는디. 맘에 맞는 것이 별로 없어 내가 고향이 전남 장성이여. 북위면 백암리. 장성서 살었어. 열한 살 먹어서 나왔어. 본관이 광산 이 씨여. 1930년 생인게 일흔 여덟. 아버지는 나이 어리서 돌아가셔서 잘 모르고. 정읍이 외가여. 그리서 아버님 돌아가시고 나왔지 그해에. 이리로 오게 되았지. 정읍으로 왔다가 정읍서 요리 전주로. 객지로 돌아다닝게 난 안돌아 다닌디가 없어. 객지생활을 했어. 열한 살 먹어서 나왔어. 아버지가 이일봉씨 어머니는 박판례. 나 하나여 외동아들. 손이 귀했어. 아버지는 촌에 산게 농사짓고 그렸데. 참 곤란 했어 그때는. 농사 몇 마지기 지야 뭐 그때 질 때뿐이지 두고 묵덜 못혔어. 초등학교는 한번인가 가보고 안 갔어. 가정형편이 못 된 게. 촌에서 그때는 양학을 댕겼는디 그렸어. 국문만 조금 터득 허고 말었어. 그때 아버님 돌아가시고 객지로 돌아다니고 그러니라고. 안히본 것이 없이 다 히봤는디. 맘에 맞는 것이 별로 없어요. 일가친척이 장성에 많이 살어요. 그때는 어렸응게 어디가 산지도 모르고. 내 당숙이 김제 공덕면이라고 거기 살았거든요 그분만 알고 다른 분은 몰랐어. 낭중에 결혼하고 찾어본게 장성으로 거리거리 많어요 일가가. 나 산디는 없었어. 혼자 못 댕긴 게 어머니 허고, 어머니는 살림 허고 살고 나는 돌아다님서 일허고. 어린나이에 나무 짐도 지고. 깔담살이도 허고. 깔 베는 것. 오래허들 못혀. 맘에 안 맞고. 지금 생각허먼은 내가 어릿을 때 뭔 기술을 배워도 배웠으먼은 이런 고생을 안혔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가는디. 내가 고생을 허는 끝에 이 부채 일을 잡어서 부채 일을 끝까지 유지허고 배웠응게 글지 안 배웠으먼 내가 돈을 못 벌어. 상은 안타본 것이 없이 다타봤어. 외국도 가보고. 안 히본것 없이 다 히봤어 이 부채일로. 증산교는 어리서부터 열 서너 살 먹어서부터 시작혔지 그때는 증산교가 뭣인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좋다고 헌게 믿어보고 혔지. 좋고 나쁜 것을 몰랐어요. 증산교가 애당초에 정읍 입암면에 가서 차경식이라고 그분이 교주를 했었어. 아주 유명힛지. 거그서 그분이 있어가지고 그렸어. 전라도 사람들은 많치 않았어.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림을 허고 그렸어.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라 허는 디서 교를 혔어. 동네에 있지 그냥. 증산교 헐 때에. 집을 거창히 짓고. 따라허는디 행동허는 사람은 허고. 못허는 사람은 못허고 그렸어.   그 부채를 어떻게 다 팔어 먹었는지 말도 못허게 부끄러 부채 일을 내가 원래 어리서부터 증산교를 혔어요. 증산교에 백정기씨라고 그분이 한마디로 교주인디. “너 이것이나 한번 배워봐라 배워노먼 실질적으로 허는 것잉게 좋은 것이다.” 그려서 배우게 되었지 열일곱 살 먹어서. 백정기씨 그분 매제 되는 분이 전주 살었어요. 전주 살었는디 이정철이라고 그분이 여그 전주서 부채 사업을 크게 혔어. 긍게 선생님이 이것을 한번 배워보라고 혀서, 권고 혀서 내가 배우로 들어갔지. 배운디 젤 첨부터 아이들은 힘들어. 발을 괴고 앉아서 히야는디 발을 괴고 앉아서 허는 일이 되아놔서 앉었들 못혀. 내가 나왔다 들어갔다 허는디 다섯 번을 혔어요. 글다가 다섯 번째 들어가서는 영원히 들어앉았지. 한 2년 배우고 배워가지고 그렸어. 이정철이라는 사람 일을 많이 혔어. 그 사람은 부채를 맨들어서 소개 허는 분이거든. 공장을 혔지. 전주 태평동 으서. 시방 저 문화방송국자리. 거그다가 공장을 혔어. 다섯 번이나 내가 나왔을 때는 많이 힘든게. 다 할 수 있지만은 내가 이 부채 일을 히서 먼 덕을 볼 것이냐 후회도 힛어. 배우고 나서는 헌게 내가 그 안에는 고생을 많이 허고 배웠었지. 합죽선 만드는 내 선생은 배귀남씨. 이정철씨는 사업 허는 사람이고. 배귀남씨 집으 가서 2년을 배웠어. 배귀남씨헌테 일을 다 배웠어요. 2년간. 배운 게 먼저고 낭중에 이정철씨 일을 혔지. 이정철씨가 배귀남선생을 소개혔지. 그때는 배우는 사람이 많이 없고 서너 너덧이 배웠는디. 이것은 가내수공업이라 가족끼리 허지 사람을 두고 허들 못여. 배귀남씨는 사람을 많이 두고 혔어. 순전히 배귀남씨도 남존일 혔지 자기 돈 번 일은 없어요. 처음간게 살대 요렇게 곁피를 이루고 붙이는 것 시키등만. 표 안 나게. 그걸 배우라고 히서 배운 게 그대로 허것다 어쩌고 그래. 부채 일을 니가 배워봐라 그리서 배귀남씨 미트가 기술자가 있었어. 그 사람 허고 같이 혔어. 부채맨드는디 그때는 부채 하였든 한 달에 한 칠 팔백 개 맨들어 댔어. 그때는 많이 맨들었고 했는디 그때 맨들어 논거 생각혀 보먼 참 부채를 어떻게 팔어먹었는지 몰라. 그냥그냥 덮어놓고 알켜준대로 덮어놓고 맨들었지. 그 부채를 어떻게 다 팔어먹었는지 말도 못허게 부끄러. 배귀남 선생은 인후동에 살었어. 먹고자고 험서 배움서 다섯 번 도망쳐 나오고. 그럼서 배웠어. 보수도 없어. 먹여주고 재워주고. 딴것은 없어. 2년 배운 것이 공정은 인제 다 알지요. 다 안디 지금생각허먼 그 부채를 맨들은것이 맨들기만 허로허먼 2년만 배워도 맨들 수 있거든요. 2년 배워가지고 일을 헌것이 참말로 좋은 부채를 맨들들 못허고. 덮어놓고 맨들으먼 팔어먹는다허고. 좋은 것이다 허는 것을 몰르고 맨들었어. 깨닫기는 72년부터 깨달은 거여. 그때부터 낭중에. 이것은 소홀히 다룰 것이 아니고 이건 잘 맨들어서 국민들 한티 잘 알려야 것다 혀서 그때부터 본업을 삼기 시작혔어. 배귀남씨는 부채 잘 만들었어. 부채 유래 같은 것도 잘 알고. 알고 보면 다 음양을 갖춘 것이거든 이게 부채가 합죽선이 우리나라 저 고려 말에 생긴 것인디. 절간에서 공부 허다가 스님이 연구히서 만들어 낸 것인디. 이분이 부채를 여인을 생각을 혔어. 여인을 생각허고 내가 맨들어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 뭐인가 허는 것을 생각을 허고 맨들어 낸 것이 합죽선이거든. 알고 보면 다 음양을 갖춘 것이거든 이게. 소홀히 다루들 못혀. 음양을 생각허면서 맨들어 낸 것이기 땜에. 좋은 것이고. 버리지 못허는 물견이거든. 합죽선이 그전에는 여그 위를 오수목이라고 감나무. 감나무 속에서 수백 년 묵은 놈 비면은 거그 새캄허니 배겼거든. 새깜허니 배긴 놈을 빼가지고 요걸 만들었단 말여. 여인을 생각 험서 맨든 것이 젤 위가 머리 부분이고 여그는 목 부분에 비녀를 생각을 허고. 여그는 가슴 그다음에 치마 말허자먼. 여그 새는 뭔새냐 허먼 이건 박쥐거든. 박쥐라는 것은 낮에는 활동을 못 허거든 밤으로만 활동헌다고 혀서 박쥐를 새겨. 그리서 박쥐를 새겨. 진살이 있고, 잔살이 안 있소. 진살은 장시고 잔살은 내시고. 내시 장시 그러거든 장시라는 건 남자. 내시라는 건 여자를 상징허는 것이거든. 긍게 우리가 생각허먼은 참 좋은 머리로 만든거고. 소홀히 대허도 못 허고. 버리도 못 허는 물견이여. 그전에 고려 말에 나온 것이 그렇게 맨들어 낸 것이기 땜에 버리들 못허고 현재까지도 그대로 만들어. 박쥐도 그대로 새기고. 변경을 못혀. 그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여. 음양의 이치를 다 넣어서. 생각허먼 다 있어 여그가. 합죽선에. 내가 들어서 다 알지만 그때는 벌로 알아들어서 머리 존사람 같으먼 다 기억이 나는디. 내가 그걸 못 외워 놨어. 그때 듣고 그만이지 생각을 앉혔어. 그 양반 돌아 가신게 생각이 나야지. 아마 경상도 어디 화개 쪽에 그 근방 어디서 사시는 분인 것 같은디 스님이. 지금생각허먼 내가 그것을 그 때 당시 어떤 스님이라는 것 어디살고 그런걸 분명히 알었을 텐디 한번만 듣고 그려서 더 물어보도 안코. 그려서 다 잊어 먹었어. 뭐 보통으로 생각을 혔어. 참 그때 당시에 다 알어서 해놀것인디 그런 생각이 들어가지. 합죽선이 전주서 첨에 나온 것이 아녀 이게 전라남도서 나온것여 이게. 구례근방인디 어딘지 잘 몰르고. 광양, 곡성, 그런 디서 나왔어. 그 양반 살었으먼은 부채 나온 역사를 다 알터인디. 기억이 없어. 생각이 나야지. 합죽선이 잘 맨들기로 허먼 죽도록 혀도. 내 노력에 내 맘에 드는 부채가 없어. 내가 노력해서 잘 만들어야 것다 허는 마음만 있지. 내가 내 맘에 들 만헌 작품은 아직 현재까지 못 만들어 봤어. 내가 부채 60년을 맨들었어도 내가 시에다 기증을 혔거등 한 오십 개. 작품인디. 시에다 기증을 허고. 좋아라 허등만요. 사진도 찍고 다 혔어요. 이것은 영원히 내 얼굴을 내놓는 것이다. 내 일생의 작품을 내놓는 것인디. 내가 맘 먹고 시에다 기증을 헌것인디. 영원히 남도록 보관을 해주시오 험서 기증을 혔어. 그런디 내맘에 드는 작품은 하나도 못 만들어 봤어. 한 가지 일만 혔지 내가 뭘 헐 수 있나 2년 배우고 바로 나와서 이정철이 집으서 일을 혔어. 이정철씨 처남 허고. 가허고 나허고 너희 들어가서 공장을 혔지. 배귀남씨한티 배운 사람이 너힌디 둘은 죽고 하나는 서울 가서 살고. 서울 사는 이가 백준기. 다들 배우기만 혔지 안 혔어. 젊어서 죽어 버린 게 그렇고. 하나는 살림 허고 살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백준기는 그대로 혔는디 허다가 태극선 그런 거 허고 있다가 나중에 인자 중국 들어가서 싼 부채 이런 것을 히다가 그렸어. 그러고 난게 나만 남았지. 내가 손으로 만드는 건 잘혀. 글재주는 없어도. 그리서 미움은 안 받었지. 혼나기도 많이 혼나고. 손도 많이 비고. 지금 내가 일을 별로 안 헌게 그렇지 손이 엉망여. 일을 허먼. 이정철씨 집으서 장개 갈 때까지 일을 혔어. 내가 스물여섯에 장개를 갔는디. 장개는 일 헌게 그 집에서 갔어. 장모되는 이가 중신애비를 잘 알어. 중신애비를 잘 안게 통해가지고 중신을 헌거여. 그때 우리 장개 갈 때로 보면 늦었지. 보통 열일곱 살 먹어서도 허고 열서너 살 먹어서도 허고 그런디. 늦었어. 우춘매 우리 안사람 이름이. 장개 가면서 스물여섯에 독립을 혔어. 살림 허고 삼서 집하나 얻어가고 거그서 일을 혀. 신혼살림은 인후동 샛터라고 헌디 샛방하나 얻어가지고 거그서 시작을 혔지. 방하나 얻어가지고 그렇게 혔어. 팔남매 뒀어. 아들 둘. 딸이 여섯. 딸 둘 낳고 아들을 낳어. 아들손이 귀헌디 아들 헌티 손지가 셋여. 아들만. 거그서 터졌어. 좋아. 아이고, 살림살이 산 생각허먼 아득 허지 아득혀. 애들 키우면서 일을 버려 버리고 차라리 리어카를 끌까 그렸어. 한 가지 일만 혔지 내가 뭘 헐 수 있나. 72년도부터 조금 빛이 나서 그렇지. 그전에는 참 곤란했다고. 여그가 나헌티는 객지가 되논게 아는 사람도 없고. 돈 몇 푼씩 받고 일만 혀주는 거여. 판로 같은 건 이정철씨가 다 알아서 허고. 삯을 주먼은 공임만 받고 만들어 줬어. 김만엽씨라고 있었는디 이사람이 크게 혔어요. 더 오래 허고. 이정철도 허고. 합죽선이라고 허면 유명혔어요 둘이. 그때는 내가 손수 맨들어 가지고 손수 팔어보기는 72년도부터. 그전에는 맨들어만 줬어. 합죽선은 찾는 이가 항상 비슷혀. 요새나 그전이나. 냉장고 선풍기 나온게 부채가 안 팔린다고 혔었는디. 선풍기가 갔고 다닐 수 있간디. 갖고 댕기는 것은 부채다. 그렸어. 안사람이 살림 험서 일도와주고 같이 혔어. 우리 아들허고 큰사우허고 배웠지 나헌티 배워가지고 우리 큰 사우도 7년간을 배워가지고 7년 만에 독립을 혔어. 딸허고는 그 먼저 알었는디. 낭중에 배웠어. 자식들 공부도 못시켰어. 공부는 뭐 고등학교 나온 놈이 하나밖에 없어. 딸 하나. 전부 소학교만. 가슴이 아퍼. 맘이 안 좋아. 지금은 먹고사는 것은 괜찮어. 큰딸은 부채 일을 허고. 둘째 사우는 양복점 허고. 아들은 부채일 허고. 다 직장은 있응게. 그대로 살어. 밥 먹는 것은 걱정을 안혀. 다 여웠어. 여그도 가끔와 고기도 구워먹고. 지그가 사다놓고. 명절이면 끄득끄득혀. 잘못 깍어 노면 별 재주가 있어도 안되아 부채 만드는 것은 공정을 다 애기 허자 먼 한 30가지 되는디. 대나무 부텀 골라서 인자 쪄야지. 대나무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대라야지 외국산은 못써. 윤기가 안 난게. 한죽이래야 윤기가 나지 외국산은 윤기가 없어. 외국에서 오자면 거그서 가공을 해오면 몰라도 글 안 허면 색이 변혀. 왕대, 왕대가 젤 좋아. 구례에서 많이 나와. 변죽은 요거 옆으다 대는 것. 왕대로 살대도 쓰고. 변죽도 쓰고. 변죽을 좋은 대로 허는 것은 모양을 잡어. 좋은 걸 맨들라면 한 삼년 묵은 대를 썼지. 보통대가지고는 안 혔어. 이렇게 휘들 안 혀 한번 잡어노면. 부채라는 것이 수명이 변죽에 있거든 변죽이 짱짱허고 좋아야 부채가 오래가지 글 안 허면 오래가들 못혀. 그전 부채를 보면은 지금 부채보다 좋아. 한 350년 된 부채도 지금부채보다 좋단 말여. 부채는 350년 된 것이 내가 갖고 있는 것도 한 자루 있는디. 참 좋아. 젤 첨부터 애기 허자먼 대 밭으가서 대를 골라서 쪄. 가공을 혀. 가공을 혀서. 여그서 인자 선별을 혀. 좋고 나쁜 걸 선별을 혀서 물으다 담궈. 담구고 나서 숯불 옆으다 피고 물을 펄펄 끓여서 대를 담가서 푹 삶어. 삶은 뒤에 깍어야지 그냥은 못 깍어. 대나무가 몰랑몰랑 혀지 거든 그때 깍어. 대나무를 얇게 깍는게 좋아 여그는 두껍고. 여그는 얇고. 그리야 모양이 나와. 표백은 안 허고. 표백을 허먼 대나무가 힘이 없어. 양잿물에 담군 것은 삶어서 널어서 한 15일 말리먼 이렇게 뽀얀 해지지. 때 빼기 위해서 잿물에 담가. 표백은 아니고. 부채 한 자루에 서른여덟 쪽 씩 묶어. 묶어서 인자 나중에 풀칠 다 히가지고 진놈 허고 자른  놈 허고 일흔여덟 쪽을 풀칠을 혀서 붙이지. 일흔여덟 쪽. 두 개를 합헌 것이단 말여 이것이 진놈허고 자른 놈허고. 이틀이나 사흘 말려서. 말르먼 구녕 뚫고. 그담에 뼈다귀 썰어서 뼈다귀 붙이고. 그렇게 히서 맹글어. 목살이라고 이렇게 잘르는 것 그것 허고. 그려. 부채 살이 서른여덟 개. 변죽까지 혀서, 삼십대도 있고. 사십대도 있고. 또 오십 개짜리도 있고. 용도는 없고 적고 크고 헌게. 오십 개짜리는 맨들 들 앉혀. 내 평생에 한 두어 개 만들어서 도지사 헌티 선사 허고. 강암선생 헌티 선사 허고 그렸어. 한참 맨들 때는 서이 맨들어서 일 년에 한 육천팔백 개까지 맨들어 봤어. 한번 그려봤어. 옛날에 한창 때. 나 혼자 허먼은 한 다섯 개 하루에. 거제도에서 변죽, 단절이 나. 거그밖에 없어. 단절이 좋은 것이지. 딴디는 대나무가 있어도 단절이 없어. 한국산이 나는 것은 분죽이라는 것이 있어. 자잘헌 대밭에서 나는디 오절, 육절, 최고로 많은 것이 한 십 절 까지 나와. 마디가. 많은 것은 스물 댓 마디도 있고. 그런 것은 귀혀.  귀헌 게 좋은 놈으로 허지. 맹종죽이라고 그것이 나는디. 대는 종류가, 대 간스매 나오잖아 그것이 그 종류거든 죽순. 분죽대는 한죽이고. 분죽대는 변방으로 돌아다니면 있지. 오수, 임실 이쪽에 있어. 주로 왕대를 쓰고. 분죽대는 안써. 변죽 좋은 것은 거제에서 나오는 것을 쓰고. 대나무를 가져다가 삶어서 햇볕에 한 십일 말리고, 물에 담가 한 사오일 담구 면은 부는디 불으면은 냄비 걸고 물을 끓여 대나무를 삶어. 삶어서 깍어. 그냥은 못깍어. 부채 맹글 때는 이 방목이 아니면 못 만들어. 부채 만들 때 쓰는 것이여. 방목. 중요한 과정이라면 초저살이라고 허는디 요것을 잘 깍아놔야 부채가 제대로 잘 맨들지 이것을 잘못 깍어 노면 별 재주가 있어도 안되아. 이것이 잴 어려워. 지금은 이것만 깍는 사람이 따로 있어. 그전에는 내가 다 깍어서 맨들었는디 지금은 깍어오는 사람이 따로 있어. 그전에는 따로따로 다 혔어. 분야가 있어서 종류가 있긴 있는디 대 사십이라는 것이 있거든 대가 사십 개. 그담에 대 삼십이 있고. 대 오십이 있는디 그것은 잘 안 맨들고, 소 사십이 있고. 소 삼십이 있고. 또 이십 오세 낭선이라는 게 있어. 좀 적지. 이게. 스물세 살에 변죽이 두 살혀서 이십 오세 낭선. 옛날부터 가짓수는 그것 뿐이여. 취향 껏 쓰는디. 여자들이 이십 오세 낭선, 소 사십을 쓰지. 종이는 한지를 붙여. 한지는 맞춰. 공장으다. 지금은 흑석골 거그 공장으다 맞춰. 조금씩 쓴게 그전에는 송광사 금방 으서도 해오고, 대성리 거그서도 해오고 그렸어. 지금은 흑석골. 한지에 황칠을 허는 것도 있어. 황칠 허는 것은 비싸. 옻칠이라고 허지. 황칠헌것은 주문이나 혀야 맨들어. 내 부채를 쓴 사람들이 많지만은 내 기억이 잘 없어. 강암 선생이 내 부채를 한 두어 번 갖다 쓰고는 죽었어. 시청, 도청 직원들 많이 썼어. 다 잊어먹었어. 도지사들은 한나 씩은 다 선사혔어. 살 맨드는 골선방이 있고. 골선방이라는 건 부채 살을 이렇게 맨들어 내는 것. 정면방이라고도 혀. 매끄럽게 잘 맨들어야지.  낙죽방은 대나무에 무늬를 새기는 것. 잘 헐라먼 노력이 필요헌디 지금은 기계로 찍어버리거든 찍어버린 게 쉽지. 손으로 헐라 먼 부채 한 자루에 못 받어도 20만원은 받어야 혀. 손으로 그린 건. 광방은 살을 광을 내는 것. 칼로 허지. 짚수세미로 문대고. 한지를 만드는 걸 한방. 환방은 그림방. 한지를 바르는 도배방. 그전에는 바르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 다. 만들고 종이붙이는 사람이 따로 있어. 만들어 노면 거그 가서 붙여 오고했거든. 지금은 다 없어졌어. 사복방은 소뼈 고리다는 것. 일곱 가지여 긍게. 이 과정을 거쳐야 하나가 나와. 혼자 다 헐 수는 있지. 다 헐라 먼 시간이 많이 소요가 되고. 숫자상으로 많이 만들들 못혀. 내가 주로 했던 건 골선방이라 할 수 있지. 그전에는 따로따로 다 혔어. 분야가 있어서.   71년도부터 전주, 전라북도 관광민예품 경진대회가 있었어요. 경진대회가 있어서 거그 출품을 해봐라 그리서 내가 출품을 낸 것이 전주서 장려상을 탔고. 본선에 가서 서울로 가갖고 특선을 했어요. 특선을 허고 난 뒤에 계속히서 출품을 혔어. 출품 허고 난 뒤에는 나아졌지 빛을 조금 보기 시작헌거여. 내가 노력을 그때 했어요. 상은 많이 탔어. 생각나는 것은 명장됐을 때. 한 오십 개 되는 디 큰상은 한 댓가지 될 것이여. 젤 첨에 탄 것이 특선헌거. 그담에 우수상, 특상, 대상, 다 놔두고. 명장. 시민의장. 내가 보람 있게 생각허는 것은 대여섯 가지 되아. 상복은 많았어. 민어풀을 써야 살이 짱짱허고 쉽게 상허들 앉혀 합죽선 붙일 때는 민어풀을 써. 민어를 잡으먼 속이 있어 속이. 부레. 이게 쉽게 솔들안혀. 민어풀이 민어를 잡어가지고 배를 갈르먼 요런 것이 나와 부레가 있어. 이걸 피를 싹 빼고. 말려. 그게 민어풀이여. 내가가지고 있는 이 민어풀이 한 삼십년 사십년 된 거여. 이게 중국에서 온 거거든. 이걸 고먼은 진기가 나와. 요걸로만 혀. 민어풀이 아니먼 살이 쉽게 상허지. 민어풀을 써야 살이 짱짱허고 쉽게 상허들 앉혀. 유강을 겸히놔서. 변허들 앉혀. 유허고 강허고. 합죽선 맨들 때 맨드는 도구는 나소용대로 한 여남은 가지 되아. 줄로 칼을 맨들어서 쓰는디 오래 쓰고 잘 들어. 그전에는 대장간에서 칼을 다 맨들었었거든 부채방으 쓰는 칼은 보통사람은 못맨들어. 군대는 나 안 갔어. 내 몸이 성치 못히서 군대를 안 갔어. 팔이 조금 안 좋거든 원래. 육이오 때도 전주에 내나 있었어. 피난 안 갔어. 나야 뭐 부채밖에 맨드는 것 없응게 뭐 히먹을 것도 없고. 도망갈 일도 없고. 나는 부채만 맹글었어. 상 받고 그런 게 좀 나아지등만 이름이 난게. 명장은 91년도에 되았어. 문화재는 93년돈가 그려. 상은 안타본 것 없이 다탔당게. 상 받을 때는 좋지. 기분이 상 안탈 때 보다 기분이 좋아. 타고 나먼 전화로 찾는 사람도 많고. 부채 찾는 사람도 많고 그런 게 그때가 보람이지. 국가무형문화재로 할라고도 혔는디 시민의 장도 받고 그대로 놔둘라고. 월급은 한 20만원 많은 모양인디 그대로 놔둘라고. 그대로잖아. 변허들 안고. 참 잘 만들었어. 좋은 부채지 이 부채가 그전에 맨든 부채여 이게 그전부채는 이렇게 간단 허게 맨들었어. 350년 되았어. 이게 새 부채나 똑 같어. 종이만 갈었어. 피본게 삭어서 못써, 종이가. 피들 못혀. 그림도 그대로 본을 뜬것이여. 새로 바른지 근 30년 되아가는만. 이것이 부채가 일본사람이 방송에 한번 나갔거든 NHK방송에 한번 나갔는디 일본사람이 관광 험서 가꼬 왔더라고. 피본게 삭었어. 똑같이 해 돌라고 해서 내가 받어 놨어. 내 부채 120만 원짜리 하나 맞추고 갔는디 그 뒤로 안와. 한 30년 되았어. 자기 할아버지가 부채를 가졌던 것인디 보관을 허다가 고칠라고 가져왔는디 그 뒤로 안와. 죽었는지. 그리서 내 것이 되아 버렸어. 옛날 거라도 참 좋아 잘 만들었어. 변죽이 좁아도. 그전부채는 다 그렸어. 잘 만들었어. 이 근방 어디에서 맨들었겄지. 350년 전 그 모양 그대로여. 한군데 틀어진 대도 없고. 여그는 감나무여. 캄허니. 낙죽도 틀리잖아 낙죽도. 박쥐가 아니라 쪽 매화를 새겼어. 자기 솜씨대로. 헌거여. 원칙적으로 합죽선은 박쥐를 새기는디 쪽 매화를 새겼어. 지금 나온 부채는 틀리지 변죽도 넓어졌고. 내 성에 차는 부채를 맨들고 싶은디. 안 되아 인제. 세월이 350년이나 지났어도 그대로잖아. 변허들 안고. 참 잘 만들었어. 좋은 부채지. 내 평생에 내가 만든 부채가 일 년에 평균 이천 개 꼴은 되거든 내가 지금 부채 못 만든 지가 한 십오 년 된 게 이천 개만 잡느다 허드래도 십만 개는 넘을 거여. 넘는다고 봐야지. 마음에 드는 부채는.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은 없것다 허는 물견은 못 만들었어. 작품으로 맨들었지만. 출품도 허고 그렸지만. 내가 진짜 마음에 든다 허는 부채는 못맨들어 봤어. 아들로는 큰아들이 부채일 하고, 둘째는 인천가 사는디 말을 못혀. 부채일은 다 배웠는디  앉혀. 지 허고 싶은 것 헌다고 취직혀 갔고 먹고 살어. 이름이 이남석. 이신입. 첫째가 한 27년 혔어. 사위도 똑같어. 사위는 한경치. 그 동안 배우고 나간 제자는 좀 있는디 생각나는 이가 예순 아홉인가 되거든 덕진에서 부채일 혀. 노덕원이라고. 그 담에는 뭐 내가 대리고 갈쳐본 애들은 몇 없어. 잘 안 헐라고 혀. 힘 등게. 요새도 전화가 가끔 온디. 이것은 보수가 없다 헌게, 돈을 안 준게 누가 헐라고 허것어. 안 헌다고. 배운다고 허는 애들이 더러 있기는 있는디 보수를 못 준게 대리고 있들 못혀. 내 식구는 식군 게 헐 수 없어서 허지만은 내 식구가 아니면은 공짜로 일 해준다고 허가니. 그려. 긍게 안 되아. 이서 농아학교 있거든 거그서 내가 갈쳐볼라고 노력을 혔어도 안되아. 농아학교에서도 헌다고 혀도. 배우다가도 고되고 그런 게 안 해. 안 해 버리고. 농아 애들도. 장애자들도 그려. 노력은 해도 한 삼년 배우먼 저 먹고는 살턴디. 앉혀. 합죽선은 전주밖에 안 나와. 그전에 전라남도에서 했지만은 담양서도 허고, 구례서도 허고. 곡성서도 허고 여러 간디서 혔어. 요리 가져왔거든 거그서 혀 가지고 그전에는 여그로 가져왔어. 전라감영이 전주가 있응 게 전주로 가져와야 혀. 검수를 받어야 헌게 번거롭고. 걸어댕길 땐 게. 기술자들이 하나 둘 다 모였어. 전주로. 이주를 혀서 전주서 맨들었어. 시방부터 백한 이십년 그럴 거여. 지금 전주에서 하는 이가 몇 있어. 머리를 써서 맨등게 그리도 괜찮아. 마구잽이는 마구잽이지. 뭘 몰르고 맨들지. 알고 맨든 이는 하나도 없고. 듣고 맨들고. 그런 애들이 좀 있어. 그 전 부채보다 지금은 애들이 노력허고. 머리를 쓴게 조금 났다고 봐야지. 한 대여섯 되아. 나 한티 와서 물어보고. 배우고 그렸어. 손에서 갖고 놀아야 혀. 좋은 작품 헐라 먼. 합죽선은 나라에 진상을 허게 되면은 임금님이 신하들 한데 느그들이 정사 허니라고 노고를 치하허기 위해서 오월 단오에 한 자루씩 선사를 혔어. 외국사신들 오게 되면 선사를 허고. 그리서 소홀히도 못혀. 내가 만들었어도 내가 못 가져. 지금은 내가 맨든 것잉게 내가 갖고 그러지만. 옛날에는 아무나 못 가졌어. 양반 아니먼 못 가져.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은 모르것어. 내가 알기로는 중국으로 제일 많이 쓰였던거 같여. 합죽선은 우리나라 뿐여. 일본서 왜정시대 때 지그가 맨들라고 사진 찍고 별 짓을 다 혔어도 못 혔어. 왜그냐먼 순전 수작업이라 안되아. 앞으로는 괜찮을 거여. 노력허먼 노력헌 만큼. 대우를 받을 수 있어. 사회적으로. 그전에 만든 것 생각허먼 맨들어서 팔었지만 그전에 만든 것 허고 지금 맨든 것허고 보먼 그전 만든 것은 부채도 아녀. 전에는 좋은 부채를 맨들들 안 혔어. 그전에는 숫자를 많이 맨들들 못혀. 뼈다귀를 손으로 전부 깍어서 맨들었거든 지금은 뼈다귀를 찍어 내버리거든 찍어낸 게. 그전 부채 깍어서 만들 때허고 지금 만드는 거하고 배 차이가 나지. 지금 만든 것은 찍어 나온 게 덮어 놓고 맨들지. 애들 몇이 허고 있지만, 그대로 맨들기는 맨들지만 그려. 작품은 출품헌다든가 허는 것은 수작업으로 혀. 손에서 갖고 놀아야 혀. 좋은 작품 헐라 먼. 내 그간 오십 선은 두 갠가 만들어가지고 도지사 하나 선사허고 그렸어. 하나는 내가 갖고 있다가 시에다 기증했고. 나는 주문생산이지. 부채 얼마 안 맨등게. 주문을 허먼은 맨들어 줘. 요새는 부채 금이 부채 금이 아녀. 한 십 만원이나 받을 것을 한 삼 만원이나 받고 판 게. 남는 게 없어. 긍게 죽자 살자 일만 허는 거여. 그대로 맨든 것은 다 팔리긴 허는디. 유지는 허지. 내가 노력을 히얀디. 남발을 헌게 그게 안되아. 남은여생 꿈이라는 건 몸이나 성히서 살다가 죽어야는디 내 평생에 젤 힘들었던 때가 오십 년대 육십 년대가 젤 힘들었지. 애들 놓고. 벌이는 없고. 생활력이 뭣이 없응게. 생활이 어려웠어. 부채는 맨들었는디 남의 부채를 맨들었거든. 내가 내 부채를 만들먼 좀 난디. 넘의 부채를 맨등게. 난 공임만 받아먹고. 그전부터 육십 년대 까지는 순전 넘의 일만 혔지. 공임만 받고. 재료도 그 사람이 주고. 긍게 힘들었어. 내가 내일을 시작헌것은 그 뒤여. 칠십 년도나 들어서부터. 내 작업 내 부채를 맨들기 시작혔지. 한 번도 쉬어본적 없어. 육십 년이 넘드락. 전주 떠나 본적도 없고. 우리 안사람은 고향이 구이. 참 다복헌디. 살기가 어려운 게. 근근이 밥은 먹었는디. 잘히야는디. 아퍼 인자. 문밖출입을 못 헌게 그것이 맘이 안 좋아. 고생은 고생대로 다 혔는디 인자 편허게 있다 가야는디. 아퍼. 나도 한 사년 되아. 중풍이 왔어. 어느 날 갑자기 칫솔질을 헌게 칫솔질이 이상허게 되아. 잘 안되아. 그서 바로 병원으로 갔지 병원으로 간게. 하룻저녁 자고 난게. 완전히 안 좋아. 그서 병원에서 한 일주일 있응게 그려. 그 뒤로 안 좋아. 노력허고 혀도. 맘대로 움직이들 못 헌게 안 좋아. 그 뒤로 내가 부채 못맨든다고 소문도 났어. 조금씩은 허는디. 부채 일을 안 허고 딴것을 혔으먼 먹고사는 것은 나았응란가는 몰라도 내가 이름을 얻기는 어려운 일여. 긍게 나는 부채 일을 헌것이 잘혔다 싶어. 사람이 이름이 있응게. 딴것 혔으먼 내가 상하나 탔것어. 내가 부채일로 인자 상도 더 이상 탈것이 없어. 남은여생 꿈이라는 건 몸이나 성히서 살다가 죽어야는디. 병들어가지고 이대로 죽게 되면 그것이 서운허지. 맘에 드는 부채도 인자는 못 만들어. 지금까지 만든 놈으로 만족을 허고 말어야지. 기력도 없고. 몸도 안 좋고. 전주시에 기증헌 걸로. 끝이여. 원래는 전시장을 꿈을 꿨는디 전시장이 이뤄지들 앉혀. 시방 송하진 시장이 진작에 나왔으먼은 되았을덴데. 합죽선을 알들 못혀. 그전 시장들은. 그리서 작품을 시에다 기증을 허는 것이 옳것다 헌게. 시에서도 알고. 사회적으로도 알고. 전시장 짓는 디야 지어서 태극선 허고 합죽선 허고 같이 전시 헌 디야 긍게 내 꿈이 이뤄진 거지. 내 부채 가진 사람들은, 도지사 한 대여섯 사람은 가졌지. 그전 부채는 다 지름을 칠혀. 그전에는 황칠이라는 것은 몰랐었고. 지름 칠을 헌것이 좋은 부채여. 들지름. 다 칠해서 나갔어. 황칠은 내가 직접 개발헌거지. 옻칠이 비싸지. 흔헌 것이 안 되서 비싸. 한 자루 옻칠 헐라먼 한 십만 원은 들어. 칠 값만. 그리서 백만 원도 받고. 그려. 잘 맨들어진 놈은. 전주시에다 기증헌것은 천만 원. 오천 만원까지 줘도 안파는 것이 있어. 일억을 줘도 안 되는 그런 놈이 있지. 돈 받고 팔어 보기는 한 백이십 만 원 정도 받고 팔었어. 그 이상은 팔들 안고. 우리 아들이 허는디 내가 허라고는 안 혔어. 지가 허고 싶어서 헌것이지. 긍게 허고 보먼은 낙죽히갔고 그러는 것 보먼 잘혀. 자가. 재주가 있어. 이걸 부채를 잘 만들어라 그려. 누구 아들이 부채를 맨들었는디 잘 맨들었더라 이런 소리를 듣게 잘 맨들어라. 노력 끝에는 좋은 작품이 나와도 노력 안 허먼 좋은 작품이 안 나와. 긍게 노력해라 그려. 나는 인자 나이가 팔십인디 더 좋은 작품 맨들 수도 없고. 시청에 다 줬지만 몇 작품은 냄겨 놨어. 나는 합죽선 밖에 안 혔어. 다른 건 손도 안대봤어. 내 죽으먼 우리 아들이 바로 문화재가 될 것 같어도 안 되는 것이여. 몇 년을 끄슬러서 그리야지. 세월이 흐르고 노력허먼 한 육십이나 넘어야 되지. 그래야 문화재 가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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