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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 |
[정현숙의 잘 사는 이야기] “인디아나 존스는 영원히”
관리자(2007-06-14 11:12:03)
“인디아나 존스는 영원히” 우리가 아직 동네에 살 때 서울에서 한 가족이 와서 보고는 우리 앞집으로 이사를 왔다. 어진이 또래와 그 아래인 딸이 둘 있었는데, 어느 날 지금 우리 집이 있는 밭으로 왔는데 큰 애가 갑자기 울었다. ‘왜 그래?’ 했더니 ‘무서워요’ 란다. ‘뭐가 무서워?’ 물으니 ‘나무가 무서워요.’ ‘풀도 무서워요.’ 했다. 순간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풀이 무섭다는데 어쩔꺼나 무슨 말로 그 무서움을 달랠 수 있을까. 참 난감했다. 그 후에 귀농학교 강의를 갔는데 그 무렵엔 또 부부 중 한 사람은 시골가고 싶은데 다른 쪽이 동의를 안 한다는 스토리가 많았다. 그래서 ‘아이고 우리 집 사람이 도대체…’ 하면서 설득 좀 해 주세요라는 부탁을 은근히 하기도 했다. 그래서 저는 싫어요 하는 여성 참가자에게 왜 싫으세요? 하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30대 중반을 넘겼을까 한 분이 대답했다. ‘저는요 벌레가 무서워요. 모든 벌레가 다 무서워요.’ 나는 다시 할 말을 잊었다. 아니 벌레가 무서워서 귀농을 못한다니. 무슨 벌레? 파리? 모기? 거미? 아니면 개미? 어쨌든 그래도 무섭다는데 어떡해. 이 동네로 이사올 때 우리 집 차는 봉고그레이스 한참 오래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네에서 이 산위로 1km 가까운 길을 매일 농사도 짓고 염소젖도 짜고 하면서 그 차로 다녔는데 길이 비포장 돌맹이 튀어나온 자갈길인데다 두 군데나 비탈이 있었고 한 군데는 비탈에 커브까지 있어 웬만한 사람들은 그 길목을 잘 통과하지 못했다. 밭을 갈아주겠다고 온 농민회 한 분은 경운기 끌고 오다가 그 마의 비탈에서 경운기가 옆으로 쓰러져 구르는 바람에 날아(?) 뛰어내려서 살아남은 적이 있었고 밭을 갈다가는 비탈밭에서 경운기가 옆으로 누워서 마무리를 못하고 중단하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농사도 짓고 메주도 만들어서 산 위에다 매달아 말리고 장독대도 산 위에다 두고는 열심히 오르내렸다. 눈이라도 오면 염소 먹을 것, 우리가 팔 된장, 집에서 만들어놓은 메주, 모든 것이 수송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미리 준비를 못해 주면 메주는 지게로 져다 나르고 갑자기 주문받은 된장은 통에 담아 머리에 이고 내려와 보냈다. 그러다가 잠시 방심하거나 덜 녹은 눈이라도 있는 곳에서는 아차 하면 차가 비틀 하거나 바퀴가 뺑 돌거나 옆 개골창에 빠져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직 익지 않은 낯선 동네에서 딱히 누구에게 부탁하기도 그렇고 손전화도 없는 그 때, 정신없이 뛰어가서 어렵게 트렉터 있는 집에 연락하거나 4륜구동차로 가서 좀 끌어달라고 부탁하는데 정말 진땀나는 일이었다. 정 안 되면 포크레인이나 렉카차를 불렀다. 차가 미끄러져 빠지는 상황은 4륜구동 트럭으로 바꾼 뒤에도 가끔 잊을 만하면 일어났고 뭘 좀 할라치면 늘 불안한 게 길이었다. 그 길 때문에 우리는 종종 까무러치는 상황을 만났고 그 상황을 인디아나 존스 영화 찍는다고 농담을 한다. 한번은 예의 그 봉고차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오다가 동네분이 밭에서 고추 따놓은 걸 좀 실어달라고 해서 차를 세웠는데, 어진이 아빠가 고추자루 가지러 간 사이에 차가 그만 슬슬 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뒷자리에 어진이를 안고 앉아 있고 운전석 옆에는 또 무슨 자루가 있고 그 옆에 운전을 전혀 모르는 아가씨가 한 사람 타고 있는데 차는 기어가 풀렸는지 굽어진 비탈길을 굽어진 그대로 슬금슬금 계속 내려가는데 옆은 또 몇 미터 떨어지는 개울이었다. 숨이 멎는 순간이었다. 나는 고함질러 남편을 불렀고 다다다다 뛰어온 남편이 달리는 차에 뛰어올라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상황은 끝났는데 여차하면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우리 집을 와 본 사람들이 종종 묻는 말도 도대체 여기 어떻게 자재를 싣고 왔느냐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집 지을 때도 평탄했던 건 아니었다. 약간 비가 부슬거려 레미콘이 안 왔으면 했는데 기어이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다. 우리는 정읍 시내에 나와 있는데. 부랴부랴 들어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레미콘이 개울쪽도 아닌 산쪽으로 기울어져 빠져 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 레미콘 속의 시멘트는 굳어가는데 먼저 가 있던 펌프카가 레미콘 구하러 내려오다가 그건 또 개울쪽으로 비스듬히 빠져버렸다. 결국 정읍에서 아주 커다란 포크레인이 와서 구출했는데 그 포크레인은 트럭에 실어서 못 오고 제발로 걸어와야 하는 큰 사이즈여서 한 시간 넘게 걸려서 걸어와 두 녀석들을 건져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면 서부 개척시대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벌레? 쪽은 그렇다. 우리 집 식구들은 웬만한 벌레 동물은 대충 ‘친구’로 넘어간다. 그런데 손가락 두 개 길이만한 지네가 내 장화 속에서 엄지발가락을 물었을 때는 정말 나도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아니 물릴 때는 뭔지 모르는 게 내 발가락을 물었는데 굉장히 아파서 엄청 놀랐고 신발을 벗으니 검붉은 지네가 황급히 도망가는데 어찌나 크고 사납게 생겼는지 죽는다고 고함을 질렀다. 한 5분 있으니 통증은 가라앉았다. 그걸 보고 동네분들은 지네를 안 타는 체질이라 했다. 아니면 퉁퉁 부어 그대로 병원에 실려가야 했을 판인데 천만다행이었다. 또 한 번은 뱀이 나를 기절시켰다. 주변에 뱀이 많다고는 하지만 나는 일년에 그저 한 두어 번 마주칠 뿐 마주쳐도 각자 자기 갈 길을 조용히 가므로 뱀하고 크게 인연맺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정통으로 마주쳤다. 공동육아용 놀이터로 지어 메주도 말리고 하던 비닐하우스가 거의 낡아서 해체 직전이었는데 이른 봄인가 가을인가 어느 날 보니 기대놓은 문짝 하나가 쓰러져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시 세우려고 일으키는데, 세상에! 빨간 뱀 까만 뱀 등등 십여 마리가 소복이 엉켜서 조용히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문짝을 던지듯 그대로 덮어놓고 뛰어와 저기 뱀 있다고 이야기 했더니 한참 후에 남편이 어슬렁거리며 그리로 갔다. 긴장 속에 문짝을 젖혔는데 이건 또 뭔 일, 거짓말처럼 아무 것도 없었다. 어디로 이주했을지 모르는 그 뱀들 때문에 한동안 소름 돋았던 기억이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조용한 봄날 고사리나 취나물 두릅을 뜯으러 가도 인디아나 존스는 계속된다. 산나물이 뜯기 좋아라고 길가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아니니까. 가시덤불 헤치고 칡넝쿨 잡고 매달려 가면서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산야초차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 새순 몇 잎 뜯으려고 조용한 산 속에서 나 혼자 매달렸다 뒤집었다 가히 장관이다. 귀농해서 농사짓고 산 속에 산다면 대강 사람들은 조용하고 우아하고 평화스럽다고 짐작한다. 그러나 전혀. 나의 일상은 조용도 우아도 아닌, 때로 평화 가끔 인디아나 존스, 일상은 중노동이다. 어쩌다 억척스레 일하는 모습을 들키면 사람들은 조심스레 묻는다. ‘저 이렇게 힘들게 사시려고 귀농한 건 아니지 않아요?’ 그러면 나는 그냥 미소 짓는다 좀 우아하게. 이건 시골살이나 귀농 어느 조항에도 없는 이상한 취향 같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매일의 일상이 영화 찍는 것 같은 이 스릴 넘치는 드라마틱 귀농의 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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