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6 |
[이종민의 음악편지] “시중(時中)의 지혜를 찾아서”“
관리자(2007-06-14 11:10:23)
“시중(時中)의 지혜를 찾아서”“
술을 마셔 머리를 적심은 또한 절제를 모르는 것이다.”(飮酒濡首 亦不知節也)
『주역』(周易)의 마지막 구절도 매일 술에 절어 스스로도 두려움에 조바심하고 있는 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매주 그랬던 것처럼 ‘주역읽기’의 대장정을 마감하면서도 ‘과연 이 책은 나를 위한 것이구나!’ 하는 깨침을 다시 하게 된 것입니다.
‘때에 적중한’(時中) 지혜를 얻어 보겠다고 나선 ‘주역산책’ 210여회! 시간으로 장장 7년 6개월! 그 긴 세월동안 동양고전의 요체, 동양사상과 철학의 보고(寶庫), 그 지혜의 바다를 헤엄치며 마냥 행복했습니다. 독실한 신앙인들이 기도할 곳 찾아가듯 월요일 저녁나절이 되면 발길이 자연스럽게 전북대학교 치과대학 한 강의실로 향했습니다. 지난 한 주에 대한 반성으로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지면 막걸리와 함께하는 ‘2부 수업’을 향하는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습니다. 그것이 또 다른 반성거리를 쌓아가는 일임을 모르지 않은 채.
아무리 흥청망청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이 신묘한 예지의 책은 반성과 위안의 계기를 여지없이 마련해줍니다. 살아가는 게 죄업을 쌓아가는 일, 그 짐을 덜기 위해 매주 그곳을 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월요일에는 다른 어떤 약속도 잡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모임일지라도 그날 저녁으로 일정을 잡으면 그것은 내가 필요 없다는 뜻,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멋모르고 월요일 저녁에 만나자고 하는 사람은 숫제 저를 모르는, 그러니 만날 필요도 없는 철부지,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주역』64괘는 각각 완성도 높은 한 편의 시다!’ 그야말로 술이 머리를 적셔 혼미한 상태에서 이처럼 일갈(一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부님 면전에서 감히.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이 ‘주정’으로 그 분의 저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고도 합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저도 술의 영감을 받으면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답니다. 비록 짧고 덧없는 순간의 일이지만 말입니다.
이 신비의 철학서에는 교조적 주장이 없습니다. 수많은 가변적 상황에 대한 가정과 그에 따른 ‘시중’의 처방이 있을 뿐입니다. 현대 시비평가들이 특히 좋아하는 반어(irony)와 역설(paradox)은 기본이고 좋은 시의 요소인 다의성 혹은 애매성(ambiguity) 또한 우리들 삶 자체만큼이나 풍성합니다. 게다가 심오한 철학과 지혜를 담고 있으니 훌륭한 시의 기본은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지요. 또한 우리의 상황을 64괘(卦)로, 이에 따른 각각의 경우를 다시 6개의 효(爻)를 통해 정연하게 분류 정리한 것도 시적 매력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제에게 이런 꿈이 있습니다. 입방정으로 일을 그르칠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자기최면, 아니면 자기암시 혹은 다짐의 뜻으로라도 발설을 해야겠습니다. 각 괘에 어울리는 음악 하나씩 골라 64통의 음악편지를 써보겠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울리는 음악을 선택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요 각 괘가 담고 있는 신묘한 의미를 제 머리나 글재주로 푼다는 게 현재로선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꿈은 꿀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제가 평소 주장한 대로,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은 정녕 진정한 꿈이 아닐 터. 꿈이라도 원대하게 키워가는 것, 그것이 세파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길일 겝니다. 옛사람들이 항해를 할 때 머나먼 북극성을 길라잡이로 삼았던 것도 이 때문인 것을.
물론 말(斗)로 배워 되(升)로 푸시는 사부님이야 보나마나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일 것입니다.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날기를 꿈꾼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글쓰기에 그렇게도 신중하신 그 분 들으라고 이런 항변을 해봅니다. 글쓰기 자체가 깨달음의 과정이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제가 음악에 관한 글을 쓰는 게 제 음악공부의 과정이요 방편이듯 말입니다.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기 부족함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될 터, 온전한 깨침을 기다리며 글쓰기를 미루다보면 언제 시작할 수 있겠는지요? 죽음의 순간에나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텐데 그때까지 쓸 기력이나 남아있을까? 다시 공부하고 제 나름으로 정리하는 의미로라도 꼭 저지르고 싶은 꿈같은 일입니다.
오늘 이 편지가 어쩌면 이런 작업을 위한 길 닦음 쯤 될 것 같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은 오늘 얘기와 잘 어울리는 곡을 찾았다는 것. 절주(節酒)로 시작을 했으니 절제를 통한 균형을 주제로 하는 음악이 있다면 안성맞춤 아니겠습니까? 레지엠(Lesi몀)의 [중용](Temperantia)이라는 곡과의 만남이 운명처럼 여겨지는 것도 괜한 호들갑의 산물만은 아닐 것입니다.
레지엠은 최근 제 마음의 줄(心琴)을 특히 자주 자극하는 독일 출신의 독특한 연주자들입니다. 전에 소개해드린 [전쟁의 신](Fundamentum)에 매료되어 새롭게 그들의 앨범 두 장을 구입했는데 이들 모두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미스틱 팝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용]은 그중 2004년에 나온 [세월](Times)에 실려 있는 곡입니다. 먼저 제목에 이끌린 것은 사실이지만 곡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예전 앨범에서와 다르게 이 곡은 가사가 영어와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노래도 중후한 남성합창을 독특한 음색의 여성 솔리스트(Diana Lasch)가 앞서 인도하고 있습니다. 수도승을 이끄는 듯한 여사제의 속삭임으로 곡이 다소 밝아진 느낌을 주며 한결 듣기가 쉬운 영어가사의 가세도 가벼워진 인상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역』만큼이나 신묘한 화성은 여전히 매력적이기만 합니다.
이 곡 들으시며 가는 봄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이 노래 가사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겸허함과 평화로운 마음을 견지할 수 있으면 밝은 미래에 대한 조화로운 전망을 가꾸어갈 수 있답니다. 이런 음악에 귀 자주 기울이는 것이 바로 그런 마음의 상태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벌써 여름입니다!
이종민ㅣ전북대 교수·전주전통문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장
※ http://e450.chonbuk.ac.kr/~leecm로 접속하시면, 그동안의 음악편지와 음악을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