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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 |
[신귀백 영화엿보기] 초조(初潮)에로의 여정
관리자(2007-06-14 11:06:57)
초조(初潮)에로의 여정 사백번의 구타 (1959) 신귀백ㅣbutgood@hanmail.net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사를 공부하노라면 프랑스의 누벨바그라는 산맥을 만나게 되고, 트뤼포와 고다르 그리고 레네 같은 영봉을 접수해야 한다. 필수과목이라 불리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하라>는 당시로는 최신 버전이 갖는 생기가 있으나 조금은 치기가 보이고,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같은 작품은 공간과 기억에 관한 영화이니만큼 현학적이다. 영화의 고수들이 수백 번도 더 추천한 트뤼포의 이 '물건'은 분명 어떤 준거로 작동하는 힘을 갖는 영화. 영화 주인공이 청소년이지만 싼티 나는 애들 영화가 아니다. 우리 영화에서 아이들은 어떤 모습인가? ‘옥희는 삶은 달걀을 좋아해.’ 식의 어른의 이기심을 관찰하는 소도구 역할에 머물러 있거나 터무니없이 순진한 주인공들이 등장해 현실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서 온 여학생은 공주 스타일이고 촌놈인 내가 보이지 않는 짝사랑을 한다든지 아니면 폭력을 행사하는 못된 주인공에게 시달림을 받는 내용 등. 우리의 그림들은 캐릭터의 선악이 분명해 투샷을 잡으면 누구에게 권력이 있는지 금방 드러나는 그림들이 대부분 아니던가. 그러나 이 불란서 성장 영화는 다르다. 이름과 실제가 일치한다.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대, 흑백필름이지만 오십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모던하게 느껴진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지만 어린이날 특집 영화가 될 수 없는 영화, 애들이랑 보면 염치없어지는 영화. 강남 논술학원 추천목록에 가끔 실린다면 엄마들도 함께 보려나. 일단 보자. 학교, 소시지 공장 사실일까. 프랑스 소년원 입구에는 ‘애새끼들이 400번은 맞아야 제대로 큰다.’는 살벌한 팻말이 있다고 한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말을 서양 사람들이 숫자로 표시한 말이렷다. 400번? 사천 번(십년 넘게 구타당하는)은 맞아야 어른이 되는 매일 맞고 크는 아이들은 어쩌라고…….     프랑스의 사라지지 않는 도상, 에펠탑이 굽어다 보는 파리의 맞벌이 가정. 애비는 자동차 광인데다 치장하길 좋아하는 엄마는 철딱서니가 없다. 전쟁 직후의 이상주의나 정치적 운동은 소비에 묻혀버린 프랑스의 오십 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가정의 모습. 그 아들 앙뜨완, 사고뭉치다. 항아리에 묻어두고 싶은 나이 열세 살. 전후 겨우 먹고 살만큼 된 파리 서민 가정의 풍경일 것. 부모에게는 웬수지만 발자크를 숭배하는 소년은 너무 빨리 성장한 아이. 그 소년이 집에서 거리로, 학교에서 길로, 그 길의 끝을 찾아가는 사춘기 소년의 여정은? 먼저, 학교. 수업시간에 도색 사진을 보다 들키고 벽에 낙서를 하는 소년. 그리고 째째한 선생. 중동치기가 예사인 소년에게 낙이 있다면 극장에 가는 것. 극장은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 줄 뿐. 애들은 가르친 대로 크는 것이 아니라 본대로 큰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를 가르치는 것은 시간과 발자크 그리고 영화. 영화 속에서 그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작문시간에 앙뜨완은 발자크를 인용하여 장문을 써 내려가지만 교사는 소년의 글이 발자크의 작품을 표절했다며 화를 낸다. 상처에 인두질을 하는 옹졸한 선생이 존재하는, 학교. 우리 동네는 국화빵을 찍고 저쪽 동네는 소시지를 만들어내는 곳. 맹목적 구속 훈련 복종 등 조직의 폐쇄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학교는 문법을 가르치는 곳이어서 문법 밖의 아이에게는 매가 기다린다. 역겨운 표절자로 찍힌 소년은 더 이상 학교에 머물지 않는다. 아이는 칠수록 우는 것이어서 소년이 갈 곳은 거리뿐. 녀석은 ‘나도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한국은 돈벌어 돌아온다며 가출하는 편이 많은데)며 편지를 써놓고 가출한다. 가출에 이르기 전, 교실에서 잉크범벅이 되어 노트를 찢는 어린이, 주인 없는 개 이야기, 인형극 장면의 유치원 어린이 등 쓸모없는 부분(그래서 더 유용하게 느껴지는)을 자르지 않는 트뤼포, 신선하다, 아니 여우다. 초조(初潮)의 바다 거리에서 우유를 훔쳐 먹은 바늘도둑 앙뜨완은 타자기를 훔쳐 팔아넘기려다 들켜 감화원에 보내진다. 그것도 아버지의 손에 의해. 경찰서 유치장 안 철창을 사이에 둔 소년의 눈 연기는 제법 배우의 소질을 보여준다. 두리번거리며 멀어지는 파리 시내의 야경을 뒤로 하고 소년은 한 줄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어두운 세계로 향하는 지문을 찍는다. 어차피 자기 핏줄도 아닌 것. 아들이 육군 소년학교에 입학하기를 바라는데 소년은 차라리 해군을 꿈꾼다. 학교와 가족, 사회로부터 배타당하고 고립되어 가는 어린 소년의 고단한 성장기는 후반부가 더 눈부시다. 보이스카웃 훈련으로 생각하는지 바람둥이 엄마는 감화원은 바닷가 근처가 좋단다. 엄마는 철이 없고 아빠는 무능하고 선생은 이해심이란 없다. 감화원의 심리상담사는 그래도 묻는다. 약자는 솔직할 수 없지만 어린이는 솔직하다. 바스트샷으로 크게 잡은 눈이 큰 아이는 입을 연다. 사생아에 가까운 출생과 자신의 삶을 여자 감독관에게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는 씬. 듣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소년의 독백은 의미 있는 타인을 만나고자한 고백이지만 그의 고백은 그저 사회학적인 사례가 되고 말뿐. 자비란 없다. 이미지의 플레시백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 거짓을 이야기 할 때는 많은 씬이 필요하지만 진실을 말할 때는 하나의 씬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트뤼포. 가족 면회 시간에 엄마로부터 소년원에 보낸다는 말을 듣고 소년은 탈출을 결심한다. 감화원 철조망을 벗어난 앙뜨완은 무작정 달린다. 키아로스타미의 어린 아이 나마자데는 친구의 집을 찾아 제트(Z)자 길을 죽어라 뛰면서 노트를 전해주지만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는 이 소년은 그저 뛴다. 목줄을 푼 소년은 더 이상 가축이 아니기에. 소년은 뛰고 카메라는 80초 동안 트래킹으로 소년을 뒤쫓는다. 영화는 측면운동과 공간에 대한 것. 흑백영화 와이드 스크린의 좌에서 우를 향해 달리는 폭은 소년의 열망의 깊이를 표현한다. 이 어른의 아버지 소년이 이르는 곳은 어디일까? 에펠탑도 굽어다 볼 수 없는 어느 한적한 시골길을 죽어라 달린 그곳에는 한줄기 띠처럼 보이는 강인가 했는데, 거기, 바다가, 있었다. 바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나는 이 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옷 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죄고 있을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바로 초조(初潮)였다. 오정희의 성장 소설 「중국인 거리」에서 마지막 문장의 바다는 육체와 정신의 새로운 지평이 시작되는 터닝 포인트일 것. 한국적 영화 공식으로 말 잘 듣는 아이로 돌아가지 않는, 이 바다를 향하는 열린 결말은 박하사탕처럼 마음과 머리가 ‘화’해지는 무척 낭만적인 그림이다. 메타포로서의 바다를 바라보는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 얼어붙는 엔딩 장면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트뤼포가 만들어낸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연출기법.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에 화면을 정지시키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는 <내일을 향해 쏴라>나 <정무문> 혹은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 등 많은 감독들은 후일 이러한 장면으로 영화의 끝을 맺는다. 바다를 보고 얼어붙는 주인공 역을 맡은 장 피에르 레오의 또랑또랑한 눈은 오래도록 기억 될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장면. 그러나 어디 바다가 상처 입은 아이가 쉬어가는 호텔은 아닐 텐데…… 사족 : 고양이 같이 부드러운 성장 영화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인천 바다를 보고는 한강만도 못하다고 실망하는 처녀애들 이야기는 트뤼포에 대한 비틀기는 아닐지……. 프랑스, 누구는 시네필의 조국이라고도 한다. 영화의 탄생일이라는 1895년 12월 28일, 꽤 추웠다고 한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 돈을 받고 관객을 입장시킨 최초의 활동사진 <열차가 들어오는 광경>이란 50초짜리 이 ‘과학적 발명품’은 신기한 사건에서 제 7의 종합 예술로 발전하게 된다. 전주에서 상영된 프랑스의 가장 오래된 영화는 소니마주로 상영된 무성영화 <잔다르크의 수난, 1928>일 것. 프랑스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영화잡지를 통한 영화비평과 시네클럽이라는 광범위한 민중운동이 있었다. 소비에트는 영화를 혁명화하려 했고, 1930년대 독일은 영화를 국가의 정치적 미장센으로 만들려 했지만 프랑스는 달랐다. 불란서인들은 영화문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시네마테크(아! 전주에서 실패해 반납한)를 만들고 미국영화 범람에 맞서 자국영화 보호를 위한 1년 16주 이상 스크린 쿼터제를 만들어낸다. 앙드레 말로가 장관을 할 때는 젊은 영화인들을 위한 사전 제작 지원금 제도를 만든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시네필 탄생의 역사가 도래한다. 시인으로 유명한 장 콕토나 사진으로 더 유명한 로베르 브레송 같은 전설적 인물이 참여한 이 시네필 세대는 영화예술에 대한 기성의 작가주의 견해에 반대 의견을 내비치면서 자신들의 영화적 취향을 과시하는 ‘저항’을 벌인다(올해 전주국제 영화제에서는 당나귀가 주인공으로 나온 브레송의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가 상영되기도 했다.). 이 시네클럽은 당시 배급이 불가능했던 영화들,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해 시장에서 사장된 영화들을 주로 상영했다. 장 콕토의 <무서운 부모들>, 오슨 웰즈의 <위대한 앰버슨가> 등과 같은 작품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5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누벨 바그(nouvelle vague)의 시대. 스토리보다 표현에 중점을 두고 현실과 카메라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중시하여, 예컨대 즉흥연출, 장면의 비약적 전개, 완결되지 않은 스토리, 영상의 감각적 표현 등에 의하여 종래의 영화개념을 바꾸는 혁명을 저지른다. L.말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1957>, 또 마그리뜨 뒤라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공간과 기억에 관한 영화 레네의 <히로시마 내사랑, 1959>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대영화의 입문이라 불리는 장 뤽 고다르의 흑백 영화로 장 가방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네 멋대로 해라, 1960>나 <경멸, 1963>등은 소유보다는 인식을 권하는 영화. 70년대 후반에 우리에게 화두로 다가왔던 ‘소유냐 삶이냐’ 하는 이것이 우리보다 한 이십년 먼저 다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년원에서 앙드레 바쟁에 의해 영화계에 입문한 프랑수아 트뤼포를 빼놓을 수 없다. 평론가에서 감독으로 변신한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에서 일찍이 없던 새로운 카메라 워킹의 기교를 보여주면서 제12회(1959)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 한 후, ‘영화라는 이름의 국민의 왕자, 영웅 혹은 순교자’라 불리어진다. 거대한 바위 위에 작은 성이 서 있고, 그 바위가 바다를 떠다니는 모습 르네 마그리뜨의 그림〈피레네 산맥의 성〉이 1959년에 만들어졌다면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소개된 불란서 영화는 알랑 드롱과 함께 왔을 것. 르네 끌레맹의 <태양은 가득히, 1960>에서 우수에 젖은 미남스타를 기억할 것이다. 카트린느 드뇌브 주연의 <쉘부르의 우산, 1964>, <남과 여, 1966> 그리고 좀 건너뛰어 소피 마르소의 <라붐, 1980>, <마농의 샘, 1986>, <베티 블루 37.2 37° 2, 1986>등도 기억나는 영화. <퐁네프의 여인들, 1991>의 드니 라방과 줄리에뜨 비노시의 연기는 탁월하다. 장 르노가 나온 <레옹, 1994>와 최근작으로는 <아멜리에, 2001>도 볼 만할 것. 음, 뤽 베송까지 이야기해야 하나?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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