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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 |
[이흥재의 마을 이야기] 세상 사람들 삶에 간을 맞추는 소금 여기 있소
관리자(2007-06-14 11:04:25)
세상 사람들 삶에 간을 맞추는 소금 여기 있소 소금은 배추를 절이는데 만족하고, 고등어 간하는데 만족한다. 다만 그 뿐이다. 소금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소금이 저 잘났다고 배추나 고등어 앞에 나서는 것 봤느냐 그저 묵묵히 자신의 역할만 다할 뿐..... 어렸을 때 듣던 옛날이야기에는 소금장수가 자주 등장한다. 소금장수가 소금을 팔러 돌아다니다, 밤이 늦고 길을 잃어 막막했다. 그때 멀리서 불빛이 반짝반짝하자, 마을인 줄 알고 기운을 내어 다가가보니, 방에서 하얀소복을 한 여인이 혼자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꼬리가 아홉인 여우가 변장을 하고 있었다는 등 ~. 영어의 “Salary”란 단어는, 로마에서 일종의 월급을 소금(Salt)으로 준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봉급쟁이인 샐러리맨의 원뜻은 ‘소금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금장수 이야기나 샐러리맨은, 우리 생활과 소금이 얼마나 깊은 관계인가를 이야기 해준다. 일제 강점기말에 곰소에 군항의 요새를 구축하기 위해, 연동마을에서 범섬과 작도를 연결하는 제방을 쌓았다. 그 제방안에 있는 간척지에 천일염을 생산할 수 있는 염전을 만들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1946년 5월 남선 염업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중단되었던 염전 공사를 시작 100ha의 염전이 이루어져 천일염을 생산했다. 1997년 소금 수입 자유화로 염전이 축소되어 현재는 45ha에 21,000톤의 소금을 생산하고 있는 염전마을은 한때 58가구에 60세대가 살았을 정도로 번성했었으나, 이제 24세대 작은 염전마을이다. 마을의 역사가 사람으로 치면 62살이니까 올해가 환갑 지나고 진갑이다. 곰소염전은 60여 년 동안에 변한게 두가지 밖에 없다. 염전 바닥을 옹기조각에서 타일로 바꾼 것하고, 바닷물을 나무수차 대신 경운기 엔진으로 양수기를 돌려 퍼올리는 것이다. 염전하면 석양 무렵, 나무 수차바퀴에 올라가 물을 퍼 올리던 풍경이 이제는 흑백사진처럼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곰소소금은 명품이다. 줄포만이 있어 바닷물에 미네랄이 다른 곳에 비해 10배나 많다. 또 다른 염전에서는 간수를 여러 번 재활용 하지만 곰소에선 한번 쓰고 버린다. 오뉴월이 되면 내소사 송화가루는 노란 향기로 고명처럼 소금꽃 위에 내려앉는다. 이 향이 더해 곰소소금은 달작지근한 맛과 영양이 풍부한 명품소금이 된다. 소금은 햇볕과 바람이 만든다고 한다. 차진 갯벌을 만난 바닷물은 보약같은 강렬한 햇살과 정성스러운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 그 속살을 드러낸다. 소금은 바다의 속살이다. 소금을 손가락으로 눌렀을때 쉽게 으스러지면 국산이고, 단단해서 잘 으스러지지 않으면 수입산이다. 수입소금은 모래해안을 거쳐 들어온 바닷물을 증발하는 시간이 25일이나 걸려 아주 짜고 뒷맛이 없다. 하지만 갯벌에서 15일이면 만들어지는 우리 소금은, 적당히 짠맛에, 뒷맛도 은은한 단맛이 난다. 논이나 밭농사 짓듯이 3월 하순에서 10월말까지 소금농사를 짓는다. 올해 환갑인 윤판철씨 부부는 아예 소금 농사철이면 염전 창고 옆에서 살림을 하면서 소금농사를 짓는다. 곰소에 있는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며가며 다니기가 불편해서 아예 숙식을 하며 살고 있다. 소금농사를 지어 2남2녀를 키우고, 대학 보내고, 2명의 자녀까지 결혼을 시켰다. 소금 수입이 자율화 되었고, 뙤약볕에서 힘든 염부일을 하려는 젊은이가 없어 사양산업이 되었다. 소금농사를 짓는 어른들, 새까만 코울타르가 퇴색한 염전창고, 벽들이 거의 허물어져 가는 염부들이 살던 집들, 먼지가 흐뿌연히 쌓인 염전 사무실 등 을씨년스럽고 스산하기 그지없다. 나는 왜 이런 낡고 퇴락한 풍경 속에서 쓸쓸함보다 오히려 편안한 정을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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