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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 |
[문화시평] ‘어디에서 보아도 나는 모악이다’Ⅲ부展
관리자(2007-06-14 10:57:29)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변용 글 | 조은영 (미술 평론가)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전북지역에서 출생했거나 활동하고 있는 열한 작가의 작품전을 <어디에서 보아도 나는 모악이다>라는 제하에 3차로 나누어 열었다. 시인 김용택의 시 「나는 김제 만경의 고봉밥이다」에서 따온 제목이 암시하듯, 호남평야에 고봉밥처럼 솟은 모악산 자락에 위치한 도립미술관에서, 엄뫼 모악과 함께 이 터전에 뿌리를 내린 일군의 작가들의 산물을 모은 자리였다. 3차에 걸쳐 진행된 전시에는 한국화, 서양화, 조각, 설치, 퍼포먼스 아트영역에서 활동하는 50대 초반부터 70대 후반까지 연령층의 작가 11인이 참여했는데, 연령별로 나뉘어서 1차 전 (2월 16일-3월 11일)에는 이철량, 김호석, 김병종, 강용면, 2차 전(3월 16일-4월 8일)에는 이건용, 강관욱, 전수천 유휴열, 그리고 최근 3차 전(4월 13일-5월 6일)에는 박남재, 송수남, 정승섭의 전시로 진행되었다. 작업방식과 매체와 스타일에서부터 각자의 정서와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그간 활동해온 무대도 상당히 다른 이 작가들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는, 우리 현대미술사의 문맥에서 이 지역 미술의 현황과 정체성을 심도 깊게 조명하려는 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전북미술의 침체 및 현 미술계의 제 상황에 대해 지역 안팎에서 두런두런 흘러나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상당 기간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지역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지닌 작가들의 작품전을 1인당 약 100평 규모의 전시장을 할애하여 기획한 이번 전시는 최효준 관장의 말대로 앞으로 “계속 이어질 프로젝트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의 전시야말로 도립미술관의 존립의 필요성을 절실히 실감하게 하고, 지역 내 여타 갤러리들이나 전시공간들과 차별화 짓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작가 1인당 100평정도의 공간이 할애된 덕에 관람자들은 11인 작가들의 다양한 작업을 아울러서 감상하는 동시에, 각 작가를 심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원로작가 3인으로 구성된 3차전은 회고전 성격으로 구성되어 박남재, 송수남, 정승섭 세 작가가 수십 년에 걸쳐 제작한 창작결과를 한 자리에서 공유하는 드문 기회였다.   서양화가 박남재전은 <어디에서 보아도 나는 모악이다>라는 전시제목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며, 엄뫼 모악의 소산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가 천착해온 세계는 자연이다. 수십 년간 전북 구상화단을 주도해온 그는 모악산, 내장산, 지리산, 대둔산, 마이산, 월출산 등, 엄뫼같은 산하와 자연의 구현에 몰두해왔다. 이번 전시는 다양한 소재의 20여점의 소품과 산, 구름, 바다, 평야, 섬 등 주제를 다룬 25점 정도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박남재의 초기 작업은 철저한 아카데미 훈련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적인 작품들, 곧 사물의 재현과 인상주의적 색채표현을 활용한 여인상, 소녀상, 누드화, 정물화, 풍경화를 포함한다. 후반기로 가면서 그는 산, 들, 바다, 구름 등 소재에 집중하며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되는 실경의 재현보다는 자연을 해체, 분석하여 나름의 형과 색으로 재창조하는 독자적인 세계와 방법론을 획득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자연은 변화되는 외양 너머에 존재하는 궁극적 실체(reality)로서, “불확실성의 시대”에 사는 인간에게 요동치 않는 자연, 특히 산이 지니는 부동한 정신성과 장엄성이 디테일을 생략한 대담한 화필로 조형화된다. 단순화되고 추상화된 평면성과 강한 색조를 통해 구현된 자연의 순수성과 청정성은 곧 그가 자연을 통해 추구하는 보편성을 제시하거니와, 이는 곧이 곧바른 청정한 한국의 선비정신과 맥을 잇는다. 채색화와 실경산수가 주류를 이루던 한국화단에서 송수남은 80년대 소위 ‘수묵화운동’으로 일컬어지는 새 흐름을 주도한 이래, 전통수묵재료에 동시대의 정신과 기법, 내용을 접목시켜 전통화의 재해석과 현대적 변용을 모색해왔다. 거의 반세기에 걸친 이 탐색은 이번 전시에 포함된 1960년대의 <가나다라>나 산수에서부터 최근 <붓의 놀림> 연작에 이르기까지의 작업이 보여주거니와, 다양한 기법, 표현형식, 텍스트를 아우르며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사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제 요소의 융합과 혼성(hybridity)은 일찍이 구미에서 모더니즘이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서양미술방법론과 형식의 한계성에 대한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시도되었다. 서구작가들은 동양화와 서예의 근간이 되는 사상과 정신은 물론, 선, 여백, 색채, 서체, 뿌림, 번짐 등 기법을 활용한 조형성을 차용해갔다. 동북아 작가들은 20세기 중반 본래 우리 것이던 방법론을 서구에서 역수입하기도 하고, 혹은 독자적인 실험으로 전통동양미학과 기법을 현대화했지만 서구미술계에서 되려 구미작품의 ‘아류’로 오해받기도 한다. 범람하는 세계화 속에서 서구미술이나 여타 아시아미술과 차별화되는, 우리 정체성과 독자성, 동시대성, 보편성을 고루 구비한 작품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부단한 실험의식으로 송수남이 이룬 한국화의 현대적 재창출 과정은 의의를 갖는다. 전통수묵화에 먹의 농담과 필선의 힘을 응용해 현대성을 가미하고, 현대수묵화에 한국적 “표정”과 “생명력”을 유입했다. 이번에 20여점 전시된 <붓의 놀림> 연작에서는 수묵의 물성과 조형성에 대한 실험의 일환으로 반복적인 점과 선을 다양하게 추상적으로 표현했는데, 이건용의 작업과 함께 일반 관람자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한 측면도 있다. 정승섭의 작품은 아카데미즘적 이상세계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송수남은 물론이고 이번 전시에 함께 참여한 한국화가들, 곧 수묵화의 현대화를 구현하는 이철량의 한국장인정신과 추상적 수묵의 융합, 전통 회화기법과 재료에 현대의 시대정신과 텍스트를 접목시키는 김호석의 은유적인 현실세계, 그리고 “탈(脫)중국·비(非)서구”를 추구한 김병종의 표현적 주관세계와 차별화된다. 서양방법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친 한국화단에서 정승섭은 지난 40년간 한국화의 전통주의를 고수했다. 시대의 조류와 무관하게 “철저한 아카데미즘에 바탕을 둔 한국적 전통미”를 추구하는 그는 시공의 경계를 넘어서는 ‘고원(高遠)한 예술세계’ 및 이상세계를 구현한다. 예술가의 역할이 시대의 선구자 혹은 동시대 인간상과 사회상을 반영하고 비판하는 평자로서 흔히 인식되는 현 상황에서, 전통적인 진경·실경산수도는 ‘시대성에 대한 거부나 외면’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승섭의 회화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그의 철학의 발현이다. 자신의 그림을 “수심화(修心畵)”로 일컫는 그는 동양전통 사유와 미학의 구현을 통해 옛 정신가치 상실로부터의 현대인의 회복을 지향한다. 곧 그의 선경(仙境)은 물질문명과 세속주의로부터 인간심성을 정화시키는 피안세계의 이상향이다. 전통과 현대의 상생개념을 통해 한국화 전통의 계승을 시도해온 그의 작업은 전반 20년의 인물화와 후반 20년의 산수화시기로 대략 구분되거니와, 이 전시에는 1970년대의 인물화와 산수화부터 최근 10년간 독자적인 경지를 이룬 묵시적인 설경(雪景)까지 고루 포함되었다. 1차에서 3차까지 11인 작가들의 작품에 배어난 삶과 정서, 문화적·사회적·시대적 체험, 독자적 사고와 작품세계를 아우른 전시를 관람하면서 받은 느낌을 우선 각 작가의 다양성, 우리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변용, 그리고 시공을 가로지르는 동서의 공존이라는 공통분모였다. 아울러서 생뚱맞은 비유이지만, 이왕 모악의 고봉밥 이야기가 나왔으니 밥에 빗대자면 마치 이 고장의 명물 비빔밥을 시식하는 느낌이었다. 비빔밥의 온갖 재료는 각기 독특한 모양새와 맛을 지니지만, 각각 독자적으로는 나름의 맛을 내고 함께 섞여서는 또 다른 맛과 색을 낸다. 이들 11인 작가는 비빔밥의 각 재료만큼이나 독특한 개성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 차이의 정도가 마치 산나물과 육회만큼이나 달랐다. 세 차례의 전시가 장르별이나 테마별로 구분되지 않고 연령별로 기획된 탓에 다양성의 느낌이 더 강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비빔밥에 형형색색으로 얹힌 구성인자처럼, 이들은 모악의 산자락에 고향처럼 편하게 피차 묘하게 어울리는 멋을 발휘했다고 본다. 다양성과 혼성, 그리고 현지화(localization), 세계화(globalization), 세계지역화(glocalization)의 병행을 보여준 이번 전시는 특히 참여작가 선정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많은 관람자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얻은 것으로 안다. 차후에도 이 지역과 연관된 일군의 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는 전시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조은영/ 이화여대 미술사학과에서 미술사 석사, 미국 델라웨어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정부의 Fellowship으로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박물관(국립미국미술관과 국립동양박물관) 및 원터투어박물관에서 일했으며, 미국미술사학자협회(AHAA) 부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전북도립미술관 운영자문위원회와 우진문화재단 이사, 국내·외 여러 학회 임원 및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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