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6 |
[서평]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
관리자(2007-06-14 10:55:21)
유쾌한 몸짓으로,
‘슬픈 열대’가 내 안에 들어왔다
글 | 이휘현 (KBS 전주방송국 PD)
서울대 불문과 교수였으며 한국문학 비평계의 거대한 산이기도 했던 故 김현의 글에 푹 빠져 살았던 시절이 있다. 스무 살 때 우연히 접하게 된 그의 유고집 <행복한 책읽기>가 그 시작이었다. 그 후, 나는 내 이십 대의 많은 시간을 김현의 글로 인해 행복감에 젖어 보낼 수 있었다. 김현의 글이 읽기 쉬웠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다른 비평문들이 갖지 못한 ‘뜨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뜨거움 속에서는 팔딱팔딱 살아 숨쉬는 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김현의 비평이 가진 그 관능미가 좋았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았던 김현의 비평에는 또 하나의 매혹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쉼표’였다. 끊어질 듯, 또 끊어질 듯하면서 이어지는 그의 문장은 수많은 쉼표들로 인해 그 생명력을 유지해 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마침표를 찍곤 했다. 그 긴 호흡을 따라가기가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숨을 꼴딱 꼴딱 넘기며 문장의 맥을 짚어가는 것은 책읽기의 즐거움을 쾌락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또 하나의 통로이기도 했다. 물론 세월이 좀 더 지난 후, 나는 김현의 문장에서 느꼈던 쉼표의 매혹을 박태원과 최인훈을 통해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박상륭과 이인성을 통해 그 극단의 스펙터클을 목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의 느낌이 강렬하듯, 쉼표의 매혹은 역시 내게는 ‘처음’이었던 김현의 글에서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서두치곤 너무 쓸데없이 길었나? 그래도 할 수 없다. 아프리카 출신의 낯선 작가 알랭 마방쿠의 장편소설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에 대한 글을 시작하면서 내가 이렇듯 김현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알랭 마방쿠의 이 소설에는 무수한 쉼표들이 존재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쉼표들‘만’ 존재한다. 마침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라. 이 소설에는 김현이 그리고 박태원과 최인훈과 박상륭과 이인성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기 위한, 긴 호흡의 궤적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서의 쉼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문장이 끝나는 자리에 마침표 대신 끊임없이 쉼표가 박혀있을 뿐이다. 허나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쉼표는 역시 쉼표다! 따라서 다소 강도(强度)의 차이는 있어도 그 매혹이 쉽사리 바래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내가 처음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를 접했을 때의 느낌은 ‘낯설다’는 것이었다. 그건 내 관심영역의 밖에 아프리카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역시 내 인식의 둘레에서 아프리카는 ‘슬픈 열대’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거리가 먼 만큼, 마음도 멀기만 하니, 낯선 아프리카 출신 작가의 작품을 읽는 내 마음도 생경할 수밖에.
그런 어색한 마음으로 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매만졌다. 글은 쉽사리 내 눈과 머리와 가슴 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몸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떨림 없는 독서는 시간 낭비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책을 덮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몇 차례 했다. 하지만 참았다. 어쨌거나 서평을 쓰기로 한 약속은 지켜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약속에 대한 의무감이 결국은 나에게 행복감을 선사해 주었다. 이 소설의 중간페이지를 넘기면서부터 서서히 마방쿠라는 작자(作者)가, 그리고 그 작자의 유쾌한 ‘농담들’이 내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책읽기는 일사천리! 아쉬운 마음에 소설책의 첫 페이지를 다시 펴들게 되었으니, 이제는 아예 첫 문장부터 마방쿠의 흥겨운 수다가 나를 미소짓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 독특한 소설을 두 번 읽었다.
유쾌한, 하지만 슬픈…
이미 말했지만, 마방쿠의 장편소설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는 유쾌하다. ‘깨진 술잔’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자신의 노트에 써내려 가는 기록의 형식을 띄는 이 소설은, 엉뚱한 캐릭터들의 집합소라 할 만 하다. 다소 비현실적인 인물과 상황으로 각자 인물들의 기록이 펼쳐지지만(아마 이 대목을 두고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이 소설에 들이댄 것 같은데, 굳이 마르케스에 대한 진한 애정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공식에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 모든 인물들의 정서가 수렴하는 곳은 ‘아프리카인’으로서의 박탈과 소외감이 아닐까.
“그런데 성서에는 흑인 천사가 없어, 그 나마 이 책에 어쩌다가 나오는 흑인들은 모두 사탄의 무리야, 주로 악마들, 음험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들이라고, 게다가 예수의 제자 중에도 흑인은 한 명도 없지,……”(117쪽)
이 소설의 중간에 등장하는 사이비 무당이 하는 말이다. 그는 사이비지만, 그가 내뱉은 이 말까지 사이비는 아니다. 이건 엄연히 아프리카의 과거, 그리고 여전한 현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콩고 출신의 소설가 알랭 마방쿠는 프랑스에서 제법 성공한 축에 속한 인물이고, 오랜 옛날 자신의 조상을 노예로 삼았던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칠 만큼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었지만, 결국 자신의 ‘하얀 가면’ 속에 웅크리고 있는 또 하나의 진실, 즉, ‘검은 피부’의 진실을 외면한 채 살수는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 정체(identity)에 대한 물음을 통해, 우리는 마방쿠 문학의 샘이 어디서 솟아나는 지 짐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워드 가드너가 <창조하는 정신>에서 “창조성은 변방에서 꽃핀다. 소수인종에 속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래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피하는 게 좋다”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마방쿠의 소설은 유쾌하지만, 그 유쾌함의 어느 구석에 구슬픈 정조가 떠도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이 소설을 지나치게 ‘아프리카답다!’고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표출해 내는 상처의 기록들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는 굳이 아프리카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주변인’의 정서가 넘쳐나기 때문이다(마방쿠의 소설을 읽으며 10년 전 세상을 뜬 김소진의 소설들이 자구 어른거렸다면, 그건 나의 지나친 해석일까?).
백인여자와 결혼했다가 배신당한 인쇄공, 대통령(독재자?)의 멋진 연설문 하나를 뽑아내기 위해 진땀을 빼는 정부의 고위관리들, ‘누가 더 오랫동안 오줌을 누나’라는 이색적인 대회를 벌이는 남녀 등등. 이 소설 속 궁상맞은 위인들의 초상은 바로 우리 마음 속 그늘에 웅크리고 있는 주변인의 초상에 다름 아닐테니 말이다.
“나도 당신이 기록하는 노트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사연이 기구한 얼간이 몇몇을 유명하게 만들겠지요, ……”(62쪽)
라는 한 등장인물의 말은,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우리 모두의 마음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