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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 |
[백제기행] 수려한 풍광속에 숨겨진 삶의 역동성
관리자(2007-06-14 10:53:59)
수려한 풍광속에 숨겨진 삶의 역동성 글 | 조미정(초등학교 영어강사 외국어학원 영어강사 주부)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바람을 외면하고 지낸지 며칠째. 계획없이 따라나선 황망한 여행길이다? 처음만나는 사람들과의 섬여행이라... 그래 그냥 내속에 침잠하자. 책을 펴들고 있는데, 느닷없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이렇게 멋진 문구가 이 세상에 있었다니...작은 손수건에 새겨진 한 줄의 글을 읽고 있으니 옆 사람이 갑자기 친근하게 느껴진다. 센스짱이군! 마음속으로 되 뇌여 본다. 이어지는 일정소개.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인사말과 일정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해준다 흐흠... 뉘집 낭군인가 훤칠하면서도 다감하군. 대강의 일정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첫코스로 조선시대의 명기, 매창의 묘 매창기념비로 향한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언덕길을 제법 올라가니 기념비라 부르기엔 멋적은 공간이 보인다. 화려한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 회자된 시를 남긴 예인의 방치된 기념비를 보니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메" 가는 길에 듣는 이흥재 선생님의 실감나며 감성을 건드리는 예사롭지 않은 수사에 정신이 몽롱하다 부안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는 매창. 황진이의 명성에 비해 다소 낯설기까지 한 매창의 시가 가슴에 울림을 주는 건 이흥재 선생님의 섬세하면서도 다채로운 언어의 마력, 실감나는 설명 때문이다. 스물여섯에 만난 28연상의 유부남 시인이었던 유희경을 향한 애절한 마음이 담긴 이 연시는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으면서 자유로운 시어를 구사하고 있다.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 가 끊겨라. 라고 그는 화답한다. 매창은 부안읍 남쪽 봉덕리 묘지에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죽은지 45년 후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 졌고, 그로부터 13년 후에 그의 수백편의 시들 중 마을사람에 의해 전해져 외우던 시58편을 모아 '매창집' 이란 시집을 간행하게 되었단다. 세월이 지나 그 비석의 글들이 바래져 부안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에서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월 이매창지묘' 라고 새겼다. 그의 묘는1983년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곧이어 들른 매창공원. 매창의 시비가 초라하면서도 버려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불편하였는데 매창공원 은 잘 가꾸어져있고 시민들의 관심 안으로 들어와 있는 듯 보여 안심이 되고 그의 여러 시들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그중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었으나 절친한 친구의 (유희경)정인 이었기에 마음(?)만을 나누는 교류로 죽을 때 까지 연애를 했다던 허균(홍길동전의저자)이 매창의 죽음 앞에 바친 헌사가 특히 눈에 뛴다. 허균과 매창은 허균이33세일 때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관리로 갔을 때 처음 만났다. 당시 매창은 29세였다. 허균은 그즈음의 일기를 '조관기행'에 자세히 썼는데, 매창과 만난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었다. 비록 생김새는 드날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 할 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시를 읊고 서로 화답하였다.’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시를 남긴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듯하고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에 묻혀 들떠있던 마음도 잠시 잊은 채 도착한 섬 위도. 외도인지 위도인지 최소한의 지리적 개념조차 없이 출발한 터였다. 평소 별반 관심이 가지 않던 주제였으나 의미를 찾아보고 그 흔적을 쫓아 직접 다녀보는 답사여행은 예상치 못한 흥미가 있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그에게로 가 꽃이 되었다던가. '풍어와 마을의 액운이 없기를 바라며 띠배를 용왕님께 보냅니다' 위도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띠뱃놀이는 160년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칠산 조기가 많이 잡히는 칠산 바다에 산다는 용왕에게 만선과 마을의 평안 행복을 적은 소원문을 매단 갈대 배를 띄어 보내는 행사다. 민속예술대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고 널리 알려 졌다고 한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모두 육지로 떠나버려 전시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이어서 섬마을의 당산을 향해 진군한다 마을에서 좀 떨어져 있는 당산을 살펴보니 외양은 조잡하고 허름하나 섬 특유의 재앙으로부터 가족과 마을을 지키고자하는 소박하고 절실한 마음이 헤아려졌다. 조상들의 익살과 해학속에 삶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온갖 종류의-도교 유교 불교 -신들을 전부 한자리에 모셔 놓았다. 적어도 한 가지는 걸리겠지 하는 애절한 심정(?)이 흠뻑 느껴진다. 또한 칠산 바다의 조기이야기도 들려주셨는데, 1900년대 말 일제강점기 때 위도에 큰 규모의 파시가 형성되었는데 여러 종류의 파시가 있었던 곳은 위도뿐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위도의 근해가 칠산 바다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 어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이곳 칠산 바다에선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조기 삼치 청어 홍어 등 수많은 어종이 잡혀서 멀리 포항 충남 ,서천 군산 영광 등지에서 수많은 어선들이 찾아와 물고기를 잡았고 어획양이 많아 줄포 영광 법성포까지 팔려 나갔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을 위도파시라 불렀고 흑산도 파시,연평도 파시와 함께 3대 파시로 불렸는데 그 중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영광굴비는 이곳 칠산 바다에서 잡힌 고기가 그곳의 햇볕 소금 바람을 만나 만들어졌다고 한다. 수려한 풍광을 갖고 있으나 그저 원시적이고 지루했을 수도 있는 섬 이야기가 백제기행을 통해 흥미롭고 격정적이며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섬으로 탈바꿈 되었다는 게 내게는 의미가 있다. 해안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일주로가 나있어 차를 타고 푸른빛과 녹색의 향연이 펼쳐진 풍광을 맘껏 즐길 수도 있다. 생각에 잠긴다 여기가 위도이던가! 외도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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