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5 |
[명인명장 | 내가 살아온 세상] 한지장 홍춘수“전통한지 만큼은 다 내 머릿 속에 있어”
관리자(2007-05-14 16:48:49)
한지장 홍춘수“전통한지 만큼은 다 내 머릿 속에 있어”
구슬 홍춘수 | 정리 최정학 | 사진 유백영
한지를 ‘백지’라고 합니다. 닥나무 껍질이 한 장의 한지로 태어나기 까지 백번의 손길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요즘에야 기계도 제법 그럴 듯한 한지를 만들어 내는 세상이지만, 백번의 손길을 들여 만든 전통 한지의 따스함에는 따라올 수 없습니다.
평생 전통한지를 떠오신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의 홍춘수 할아버지입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6·25전쟁의 여파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한지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 열네 살. 그때부터 지금까지 홍 할아버지는 단 한순간도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해온 일이라 다른 일은 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하지만, 60년 가까운 세월 외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진짜 힘은 전통한지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손이 쏙쏙 애려요
어렸을 때는 그냥 아버지가 한지 뜨니까 거그서 그냥 보면서 일꾼들 같이 보면서 그냥 종이를 떠서 판매하러 가고, 그때는 구르마를 끄코 가고. 그때 거그가 그 할아버지 빨 되는 사람이 했는거 같애요. 어렸던 생각에. 그랬는데, 인자 그때는 양반 뭐 그런거 있어가꼬. 그런거 같어요. 근디 기억이 잘 안나요 거까지는.
그래서 국민핵교 다니다가 6.25때부터는 내가 쭉하다가. 어렵죠 이것이 왜 어렵냐믄. 이 한지 함서 어려서 봐왔고 다 그 옆에서 봤지만은, 거 비찌락이라고 저기 있는 메는 것도 어려서 봐서 다 내가 메고, 저 한지 전통한지 뭐 발틀 같은 것도 다 내가 짜버려 그냥 내가 다 짜요 거. 그런거 다 짜서 써요. 발만 인자 유배근씨 한티 가서 가져다 쓰제.
그런데 거 인자 내가 쭉 보므는 한지 하기가 겁나게 힘들은거요.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외곬을 걸은 거시기는 타고난거 같에요. 왜그러냐믄 진작에 도망가브렀거나, 뭐 했을텐데. 어째 그냥 나는 어디가서 거시기도 못허고 이것만 그냥 꾸준히 해오면서. 인자 지금인게 글지 그전에는 거 또랑 옆에다 닥을 담궈노믄 아침에 가믄 꽝꽝 얼어버리요.
꽝꽝 얼으믄 그놈 또 막 괭이 그전에는 괭이, 인자 큰거 그 갖과서 인자 깨가지고 그 춤을 빼다가 이렇게 긁거든요. 긁으믄, 지금은 인자 집이 크지만, 그전이는 철판에다가 건조한 거기를 이렇게 방으로 들어가게 만들었어요. 불을 때므는, 어쨌든 한지는 널어야하니까. 불을 때믄 거따 가마니 깔아놓고, 그전이는 대나무를 거 죽신같이 해서 자리라고 있었어요.
있었는디 그것이 인자 물기를 다믄 후딱 썩고, 불을 때니까 타버리는거여. 긍게 가마니 깔아놓고 그냥 그것이 갖다노므는, 그것이 갖다노므는 후딱, 지금같이 비니루가 있으므는 딱 덮어노믄 쉽게 안날가가는데, 긍게 가마니를 갖다 덮어요. 밑이다 놓고 덮고 그것을 하나씩 빼서 인자 또 긁은게 문제가 아니라, 긁어서 그것을 인자 다시 말려서, 그러다가 겨울 같은데는 땡땡 얼어버려 또 춤을 딱 쪄매노믄. 즉 말하자믄 닥을 한 춤씩 딱을 묶어서 걸어노믄, 그 춤이 땡땡 얼어버리요. 얼어버리믄 인자 그것을 가운데는 인자 이미 위에다 이렇게 있으믄 딱 위에 첨에 밑에 짤른 자리 탁 걸쳐놓게 쪄매도 되는데, 탁 하믄 밑에 말르거든요. 중도를 또 딱 쪄매요. 또 인자 중도를 또 한번 쪄매 위에를 풀어서. 쪄매서 내려놨다가 인자 거가 어지간히 될 것 같으믄 독에다 대고 치는거여. 풀러지라고. 그렇게 인자 말려서 그걸 말려서 다시 쟁여놨다가 다시 필요할 때, 꺼내서 그때그때 마다 쓰지요.
그래 진짜 저 바람불고 헐때는 거 할라므는 진짜 손이 쏙쏙 애려요. 아마 그때는 옷이 지금같이 따순 것이 없어서 그런가 몰라도 그전에는 그 거시기가 옷이 좀 차게 입어선가 겁나가 거 뺏속에 스며든가 그러까 그런 정도로 그 상댕히 그 차가움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그것이 내 일생에 직업이라고 내가 살아야 된다고 했는가 하여튼 거기에 대한 불만이 없이 심이 들어도, 심이 들어도 거 허면서 딴 사람들 일하는거 보고, 왜그냐하믄 거 농촌에 보믄 거 지금인게 그러지 거 참 얼매전만 하더라도 보리풀이라고 즉 말하자믄, 나락 심구기 전에 풀을 비다가 논에다 깔아놨다 갈아서 거 비료가 없응게, 그렇게 했거든요.
그렇게 해서 했는데, 그거 헐때마다 생각해보믄, 그런 사람들 보믄 아침밥도 지대로 먹도 못허고 지금에 그 쌩것도 아니고, 그런 것을 보믄서 그래도 나는 집이서 농사질 때 바쁘다, 농사질 때 바쁜 것이 아니라 나는 농사질 때는 꾸준히 허고, 겨울에 농사진 사람 쉬면 나는 또 그렇게 해왔거든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가 어쨌는가 아무 일허는디 크게 내가 심이 들어도 심들어서 내가 큰일났구나 그런 생각 한번 헌거는 없어요. 그리고 또 그때만 허드래도 한지를 뜨므는 어쨌든 거 여러 가지를 뜨니까 그런 것을 떠서 팔므는 또 돈이 쪼끔씩 들오고, 그러도 살아가는 것은 또, 내 생각이는 체질이 그 지게 짊어지고 그런 체질은 아니었는가, 아조 그것이 맞아 가꼬 쭈욱 그렇게 해왔거든요 그것을.
해오다보니까 인자 이것을 심이 들어도 그러고. 언제가 심이 드는가 하므는, 딱을 삶어서 티를 골르고, 이 아깜새 야구방맹이 같은 것으로 두드릴때, 두들땐디. 참닥이 있고, 기름 머구쟁이가 있고, 머구쟁이가 있고 거찌가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디. 여러 가지고 있거든요. 첫채는 참닥으로 거 참닥으로 모든 것을 뜬디. 참닥은 그것이 좀 섬유가 온유해요. 섬유가 온유해서 보통 고급 종우는 다 들어가죠 그게. 그러고 거 기름쟁이라는거는 즉 말하자믄 참닥만 쪼끔 못해도 거 질이 좀 강하다고 보까. 모구쟁이하고 두가지껏은. 그러고, 거찌는 그 자체가 섬유가 이렇게 몽쳐요. 그래서 후딱 말하자믄, 지금같이 닥이 많을 때는 몰르는디 없을 띠는 그때는 짚같은 거 양쪽 끊어내고 그놈 삶어서, 그놈을 발로 소구수같이 이렇게 있어요. 소구수 봤죠 나물헌거. 그런데다 넣고 밟어요. 밟으믄 그것이 닥하고 섞어서 하므는 그것이 그렇게 원료가 되는거요. 그러고 인자 정 딱이 없을 경우, 뽕나무. 뽕나무도 깨끗허게 잘나와요. 섬유는 쪼끔 약헌디 깨끗허게 나와요. 그거. 인자 이렇게 넣어서 만들거든요 인제.
창지를 얼매나 썼던지
아 긍게, 국민학교 5학년 때 6.25사변 나가지고 그때부터 지금꺼지 헌거요. 그래가꼬 그거 나가고 학교도 인자 그대로 배우지 못허고 그대로 살아온거지. 지금까지.
그때는 종이 많이 많들었제. 후딱 말하자믄, 호적종우, 그 머이냐 보첩 종우, 문종우 그런거 그러고 창지. 그러고 또 장지 전통 장지 같은거 그러고 인자 태지. 뭐 이런 것을 쭈욱 만들어왔지. 근디 나는 바로 6.25 전에는 인자 이렇게 보기만 했는데, 6.25사변 나고 바로 그때부터 학교는 그만두고 배운거요. 그러니까 내가 어디가든, 그래서 쭉 해나왔기 때문에 머릿속에 드는 것이 이렇게 싹 들어있단 말이요. 그것을 쭈욱 해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이 한지는 진짜 딱을 긁으므는 손이 칼이 다가꼬 여그가 다 흐트러져. 전번에도 여그를 비어냈는디, 여가 이렇게 하나씩 넣고 긁으므는 여가 물잽히고 오래하믄 여가 괭이가 잽히고, 지금도 여그가 상당해 잽히가고 있잖여. 괭이란 것은 여가 인자 즉 말하자믄, 살이 단단해 졌다는 말이지요. 그라고 인자 거 닥을 쥐므는 손에서 물이 잽히요 처음에는 물이 잽힐 때는 그때는 상댕히 따가운디, 그때만 넘어가믄 여그는 인자 단련이 되아서 인자 관계가 없지요 또.
그러고 인자 한지 만들어서 인자 거 쭈욱 해나오고, 하튼 그때는 여러 각도로 많이 썼어요 하튼, 한지쪽에서 그래서 인자 우산 종이 같은 것도 겁나게 들어갔어요. 그것도 왜냐하믄 그때는 대나무에다 한지를 발라서 기름을 발랐어요. 그래서 그것을 한지로 했거든요. 인자 나이론이 나오고 했응게 그렇지 그 먼저는 전부 그거요. 그 우산 종이를 전부다 한지로 쓴거요. 인자 그것이 크므는 저 발을 보믄 알지만은 발이 좀 크고 짝고 그래서 이렇게 인자 그것이 어느정도 맞냐해서. 떠서 주문하믄 주고.
인자 그다음에는 창지. 지금인게 글지, 창지도 무지허니 들어갔어요. 그리고 창지를 얼매나 썼던지. 각처에서 뜬다는디는 다 떠도, 그때는 가을 쯤 가므는 중도매상허고 쪼끔씩 이고 댕김서 파시는 분들이 미리미리 주문 해서 미리미리 가져가는거요. 못가져가니까. 우리나라 딱은 한정이 되아있어요. 그러지않어. 그 자꾸 늘어나긴 늘어나도. 근디 그 게 중에 인자 그렇게 해나가다가 일본 사람들이 종이도 가져가지 딱도 가져가지. 일본사람 딱은 고급지라해서 머리끝에 딱 짤라서 가져가. 종이도 역시 그 사람들은 그람수로 해서 딱 분리해서 가져가요. 그럼 누가 하나가 맡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인자, 전주허고 아부지 친구분들이랑 해서 있는 분들이 해서, 예를 들어서, 일본 사람이 만장을 주문을 했다 그럼 인자 네사람이고 다섯사람이고 거가서 인자 천장씩 맡은 달지 이렇게 해서 맞춰서 인자 날짜를 딱 맞차서, 인자 그 미스꾸리라고 허디냐 그거 해서 주고. 그 쪄매는거 인자 포장허는거. 그것을 그때는 미쓰꾸리라고 했던가 뭐라고 했어요. 그래가꼬 인자 포장해서 그렇게해서 보내고.
그러고 인자 백지도, 백지도 많이 썼었어요. 백지도 뭘로 떴냐하믄, 그때는 백지로 한지로도 이렇게 거시기 한 집은 깨끗이 잘해놨어요. 그랬는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닥을 긁으믄 껍질이 나간게 있어요. 그 껍질허고, 그 껍질에 따라가는 딱이 있어요. 닥이, 쪼끔썩 떨어진놈. 그놈허고 삶어서 인자 뚜들믄 자조롬히 백혀요. 그래가꼬 되배지도 쓰고, 또 거따대고 액자같은거 만들믄, 가상에 그걸 놓아서 쓰고. 왜냐하믄 딱에다 대고 몽글게 빠져있기 때문에 후딱 말하자믄 보는 것이 각도가 좀 틀리죠. 해노믄. 선같은거 해노믄. 그런걸로. 하여튼간에 한지에 대해서 쓰는 것은 그때 뭐 이모저모 헐 것 없이. 지금 뭐 내가 오래되아서 다 인자 종이에 대해서 허고 있지만은, 너무 다양하게 많이 쓰였죠.
그때 생각과 지금 생각과는 하늘과 땅차이요
아깜새 얘기했지만, 기계지가 나옴서부터 쪼금 인자 그때부터 하강을 타기 시작해서, 인자 그다음엔 기계로 한지를 떠서 판매하게 되니까 심이 들어서 한때는 상당히 머리가 아팠지. 아팠고, 그래도 그동안에 쪼끔 해논거 있고 하니까 애들 갈치고, 그때는 거래처가 여기 제주도랄지, 서울, 대전, 그런데 같은디 그때 있는 양반들 지금 거진 다 돌아가시고. 그분들이 한창 중매상 할때는 진짜 한지 한사람들은 진짜 그런 말이 있잖애요. 전장만 안일어나믄 한지만든 사람들은 굶어죽을 필요가 없다고. 이 진짜 숙련이 들어도 한지는 그때 쓰니까. 한지는 계속 쓰니까 한지 한사람들은. 전장이 일어나믄 한지를 쓰지 않응게 지대로. 그러지 어른들 그런말 있어요. 한지는 전장만 안일어나믄 항시 한지는 할 수 있다. 그렇게 맘먹은 것이 그때 생각과 지금 생각과는 하늘과 땅차이요. 이렇게까지 올지는 몰랐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무슨 한지 뜨면서 문화재를 알며, 한지의 뭣을 알며 그런 것을 몰랐죠. 몰르고 그냥 한지 떠서 내 직업이니까 내가 묵고 살고, 내가 주체한다해야한다. 여그서 내가 인자 배우고, 이걸 주체했응게 내가 인자 최선을 다해서 해야한다 그런 마음하나 가지고 쭈욱 나온 것이지. 중간중간 고통이 쪼끔씩 그 한지같은거 떠놓고 딱 팔로가가지고 중간서 딱 브레끼 걸고, 거 즉 말하자믄 지업사 같은거 가가꼬, 지업사에 딱 가믄 기계지 같은거 몽땅 놓고, 한지 쪽은 딱 많이 내놓지도 않고. 왜그냐하믄, 한지는 예를 들어서 한 장 파는데 일원이 남는다믄, 기계지 같은거 파는 것은 그놈 뭐 네 배 다섯 배 파니까. 그니까 꼭 찾는 사람들한테만 팔지. 긍게 자꾸 내려가고 내려가고 하다가 지금 여까지 온것이지요.
한지는 나는 왜 한지를 했냐하믄, 한지를 내가 인자 딴거 꿈꾸도 못허고, 첫째는 내가 솔직헌 얘기로 배움이 없었고, 이것만은 내가 딱 허니까, 이것만은 내가 그냥 헐 수 있고 내가 충분히 다 어릴때부터 해놔서 몸에 배놔서 딴 일보다 이 일이 더 심들어도 이 일을 허지 딴일을 못허지요 또 그것도 있잖아요. 왜그냐허믄 이일은 내가 딱 어릴때부터 해놔서 아 어떤 경우에는 어떻게 떠서 어떻게 허믄 된다. 또 전통으로 하믄 어떻게 뜬다. 지금 호적지 같은거 뜬거, 그때 헐때 그건 어떻게 해서 허믄 된다.
그 호적지 같은 경우도 처음에는 딸려가지고, 딸려가지고 막 그냥 받았어요 정부에서. 근디 중간쯤가다가 브레끼가 걸려브렀어요. 그것도 알고보믄 왜. 먹이 버는거요. 그래서 그것을 밤을 새면서 그 먹을 안벌게. 그 밤을 새면서 내가 그 같이 연구를 하믄서 그 먹이 안벌게 했잖에요. 그때는 송진, 지금 소나무 그 송진을 삶아요. 삶은데, 그 삶어가꼬 그것이 한지 원료허고 배합을 시키므는, 그것이 약간 버큼 같은 것이 나오고 그래요. 그런데 그것을 인자 제거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거 너보고 어쩌고 해가꼬, 어쩌다가 맞어가지고 그것을 인자 난중에는 잉크가 많이 안먹으게 끄럼. 그전에는 그 촉펜으로 딱 찍어가꼬 이렇게 썼잖에요. 그전에는 무슨 붓으로 쓴게 아니니까. 그 매매같은거 하믄, 그리고 인자 먹사지 같은거. 먹사지는 엷게. 그래서 인자 그 먹사지를 두장씩 넣어놓고 이렇게 행정기관에서 뭐 빼준다면, 한번에 여러게. 지금매니로 뭐이 있는거이 아니고, 이 미는 것도 그 복사기 그것도 난중에나 나왔고, 내가 볼때는 없는거 같았고. 그 사이에다 넣고는 싹 검은거를 넣고 딱 써버리믄 그러고 얇은 종이라 배버리잖어. 그래서 이 한지는 다양하게 안쓰는디 없이 다 썼어요. 썼는데, 이 장판도 한지 장판을 그 전에는 많이 썼제.
그래서 50년대만 해도, 창지랄지 모든 종이가 다 딸렸어요. 딸려서 뭐이 주문이 오므는 바로바로 못히줬지요 그때. 왜그냐하믄 정부는 정부것 가져가고, 여그서도 정부 껏을 딱 허다가 정부의 기간이 딱 있으믄 딴 종이를 주문 맡아서 또 떠논거요. 딴 종이를 그러다가 주문이 딱 뜨믄 딱 그냥 즈그들 싣고, 또 정부꺼 떠주고. 그렁게 여그 있음서 그냥 호적대장지만 쭉 뜬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막 정신없이 했는디, 중반에 가다 한달이고 두달이고 딱 쉴때는 인자 사회에서 쓸 종이를 다 아니까 떠 노면은 그냥 떠노믄 중도매상들이 와서 가져갔었어요. 그렇게 골치 아플 것이 없었어요. 내가 어릴때봐도. 그냥 지금인게 그렇지 그냥 뭔 돈이라고해서 그냥 몇 다발씩 놓고 가고, 돈을 지금 같으믄 한단씩 묶은 걸 몇 개씩 놓고가고. 여기에 여따 전대를 차고와서 그냥반들이 와서 주고가고 그랬제.
그때 그 전쟁이 인나서 호적대장지도 이런 것도 필요하고, 뜨니까 원료가 생각도 없는디 들어가고, 6.25가 나서보니까, 지금도 딱이 지금 많이 자라서 3년 5년 됐는데. 저기 있는 것이 지금 한 삼년 된거 띠어다가 내가 시험하니라고 해봤는디. 그래서 그 딱같은 것이 딸리니까 모든 것이 사람은 써야겄는디, 자 그때 시대만해도 장판도 그거 써야지. 모든 하튼 한지 종이를 쓰는 것은 다 쓰고 있었응게 그때는, 그러니까 오직허믄 난중에 딸리니까 짚을 썰어서 그걸 섞어서 쓰고, 뽕나무를 또 해서 쓰고, 하튼간에 여러모양으로 쓰고. 그렁게 그때는 한지가 질이 좋지 못했제. 왜그냐하믄 원료 자체가 딸리믄 그때는 공급을 해야하니까, 그래도 그 헐 수 없이 가는거여.
침이 인자 세 번을 ‘톡톡톡’ 튀어
근디 우산지라고 하는 것은 그 종이는 전지 아니믄 안되요. 이 딱으로만 해야지, 딱이 아니믄. 그 지름을 달였을 때, 그 아버님한테 들어보믄, 지름을 다렸을 때, 솥에서 이렇게 때다가, 애들 옆에 못오게 해요. 불을 계속 때요. 그것이 처음에는 예를 들어서 이것이 한말 짜리라믄 기름을 한되나 놓고 끓이는 거요. 왜그런가하믄, 그것이 불때다 보믄 그 솥이 넘어버리요. 그래서 불이 날 위험이 있어요. 긍게 그놈을 다려봐서 그것이 어느정도까지 올라올 수 있는가봐서, 그놈 용량을 맞춰서 불을 때는거요. 처음에는 끓게 가운데서 폭폭 끓게 때다가 난중에는 밥 뜸들이드끼 그렇게 끓였지요. 끓이기다가 난중에는 그것이 우산이나 장판에 칠때 될 때는 침을 인자 뱉으믄 그것이 인자 세 번 딱 튀어요. 지름 위에 떨어진 침이 세 번이 톡톡 튀어요. 아 그러믄 그건 다 대려진거요. 뭐 뭘로 기계로 댄것도 없고 그냥 사람 육감으로 그거 하는거요.
종이를 인자, 장판 기름을 멕이던가 그걸 발른게, 기름을 끓여야, 끓이는데 그것이 다 웬만큼 대려졌냐 그래야 종이에 기름을 칠하믄 그것이 지대로 먹으니까. 그러고 난중에 지대로, 밥이 잘되믄, 난중에 안되믄 버리드끼 그런식으로. 그런디 우산은 전딱으로 해야혀. 전딱으로 안뜨므는, 그것을 우산에다 이렇게 예를들어 기름을 대려서 발렀다. 장판도 발렀다. 한쪽에다 싸놨다. 만일에 그것을 난중에 뜯을라믄 안뜯어져. 전부 찢어져버려. 그렁게 그것은, 또 칠해놓고 바로 이렇게 이렇게 좀 해줘야지. 그냥 깜박 잊어버리믄 노른디는 노르기 안노른디는 안노라요. 그렇게 심이 드는거요. 이게. 그렇게 해서 쭉 허믄서 생각해보믄, 지금 생각해보믄, 어쩌다가 한지 속에 들어와서 후회는 없어요. 왜 없냐하믄 넘이 안한거, 그래도 생활주체로 해서는 진작 딴걸로 바꿨죠. 그랬는데, 내가 딴일 간다고해도 내가 심이 부치고, 난 이거 머릿속에 다 들어서 얼매 하믄 얼매나 그래도 인권비는 있겄구나 그러고. 그렇게 하믄서도 애들들이 크니까. 인자 애들이 쪼끔씩이라도 인자 내 심으로는 다 못했지만 갈쳐서 지금 다 쪼끔씩 있고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므는 참 걸어온 길이 얼마나 순탄허고 좋은 일도 있었지만, 심든 일도 많았었죠. 겨울 같은디 눈보라 쳐서 저 또랑같은디다 닥같은거 담궈놓고, 그거 백닥으로 담궈놓고 거그서 물속에서 흔드는 거는, 백닥 긁을 때, 껍데기가 붙어요. 이건 물기가 있어서. 붙은 것을 물에다 담근 것은 그것이 떨어지라고 흔들으드끼 척척척 해서 싹 흔들고 손으로 이렇게이렇게 헐때, 눈보라 치고 인자 해노믄 살짝살짝 얼을 때, 그럴때는 참 힘들죠. 근디 인자 와서 딱 삶을 때, 왜냐하믄 항시 불이 따라댕긴게. 삶으믄 불이 있으니까. 근디 인자 이런 정도 해놨을 때는 인자 통에다가 안에 인자 거 지금은 저렇게 했지만, 그전에는 인자 난로 그런거 놓고 나무 넣고 때고, 그러다가 인자 연탄이 나오니까 연탄을 넣으믄 따뜻하고 그랬지요.
그때는 상댕히 여그서도 뜨는 사람만 한 7,8명 되았었어요. 글믄 뜨는 사람이 8명이믄, 그사람들이 하나가 뜨믄 하나가 옆에 있어야혀. 그 뚜드러서 줘야하니까. 그렇게해서 잠깐 잘 한다고 했는디. 그렇게 인자 기계가 들와버링게, 인권비가 안나오니까 인권비가 안나오는디 자꾸 어떻게 허겄어요. 인권비가 안나오니까, 인자 그럴 것 없이 내가 혼차 하믄서 갈차야 겄는디, 어떻게 가르치냐. 인자 아들들은 이 일허고는 먼일로 가버리고, 사우가 뭔일을 허다가 실패를 허고 내가 그런 얘기를 허니까, 딸은 고등학교 다닐때부터 집에서 종이를 선별헐때 뭐허고 헐때, 없으니까 옆에서 거들고 허고. 그렇게 허다보니까 딸은 어느 정도 머릿속에 익혀지니까, 사우가 인자 해보겄다고 그래서 인자 전통적으로 한가지 한가지 갈쳐 나가고 있지요.
전통한지란 것은 즉 말하자믄, 지금 저 공장에 가서 보믄 알겄지만 그걸로 뜨는 것이 전통한지고, 인자 수출지같은거 뜰때는 전통한지발로도 뜨고, 그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그 즉 말하자믄 한지발을 떠도 얇게. 군용지 매니로 얇게. 군용지라는 거는 내 어릴때 들었는디, 유배근씨는 잘 알드만요. 왜 발을 맨게, 자기 아버지가 발을 매서, 딱 그런다고 얘길허드만. 내 어릴 때 일본사람들이 군용지를 떠서 군사품으로 썼다 그래요. 그래서 그 뜬사람들은 노무잔가 그 머신가 안잡아갔다 그래요. 그 기술자들은, 왜그냐믄 떠서 쓸라므믄, 즉 말하자믄 부려먹는 것이지. 그랬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도 거기에 걸려들은 거요. 그래서 한동안 그사람들 일을 해주고. 근디 먹는 것은 그사람들이 대주니까, 그 사람들이 끝나고 나서 아부지가 또 시작하고. 아부지는 한평생 했기 때문에, 전라북도 내에서는 어디가믄 딱이 있고 어디가믄 없고 그런거 다알지요. 그리고 일이 많이 있을 때는 전라북도 딱을 가지고는 안되니까, 저 경상북도 영덕, 그 딱이 좋아요 거그서 갖다 쓰고. 또 어떤 때는 저 완주군 그짝 구이면 쪽으로 허고. 하튼 이 근방이 전부다. 여그도 차로 몇 차씩 놨어요. 근디 지금 쑥이 많이 질어버리고 크니까 없어졌지요.
이게 딴 것은 금전관계로도 조금 손을 못대요. 그고 그것이 이미 불이 붙어놔서 애지간치 갖고 달라붙어야 되지도 않고. 나는 어채피 전통으로는 어려서부터 쭉 봐왔고, 해왔고. 그래 내 머릿속에는 빠르지요. 근디 딴 것은 빨르지 못해요 내가. 그래서 이걸 더 고집허고 한것이제.
한지업계 영원히 떨어져버리지
앞으로는 내가 인자 봐서 글쓰는거나 뭐 미술그린거 거 조그마하게 하는거 그런 것을 뜰라고 그래요 내가. 그런걸 해서 종이가 잘 떠지믄 인자 헌사람들한티 가서 한 장씩 주믄서 인자 써보라고. 저번에도 떠서 몇 장씩 줘놨어요 써보라고. 좋다고 허믄서 인자 얘기를 했으니까. 그런디, 값이 너무 비싸. 저것하고는 너무나 칭하가 많이 진게. 그 사람들 말이 맞아요. 아주 작품적으로 만든 것은 좋은 것은 헐수 없이 쓴다. 그러나 부채 하나에도 몇 천원 받는거 그거 한지 비싼거 허겄어요. 그러니까 중국산 갖다꺼 써야지요 그분들. 기계지 쓰고. 근다해서 그 맞다고 쓰시라고, 나는 어차피 걸어온 길이 이것이니까 아 이것이 내가 지금 이걸 생각허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 내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언젠가 중국서 삼베, 촌에서 삼베헌다고 많이 심궜잖아요 한동안. 지금 삼베 시장이 많이 나와도 돈있는 사람들은 중국산 안쓰잖요. 왜안쓰냐면은 직접 농촌에 진데가서 직접 가져 가잖여 지금. 왜그런가하믄 중국산이 들오믄 나는 모른디 나이론이 섞어졌단가 근데 보먼 똑같다는디. 그런데 그것이 틀리니까 믿는 사람, 예를 들으믄, 누구를 믿으믄 믿기 때문에 거그서 인자 삼을 헌다 집에서 헌다 하므는 옆에 있는 사람이 거 믿을 수 있냐 하믄 믿을 수 있다. 믿을 수 있으믄 서울 같은디로 착착 부쳐주고 뭐 대구믄 대구 서로 친척끼리 아는 사이, 지금은 그렇게 사간다고 하드만. 그서 지금 꾸준히 허고 있잖어. 여자들 벌이는 그것이 괜찮으니까 왜그냐믄 심이 들어도 많이 나믄 목돈을 쥐니까. 그서 예전부터 헌다 소리가 그것을 많이 해노므는 허다가 모아놨다가 한번 팔믄 소를 사고, 소를 사서 키우다 보믄 논을 사고 그런 말을 허고. 그것이 이치가 있어요 이치가 있어.
근디 한지도 지금은 세계화가 됐어. 되아불더래도, 정부측에서 안없앨라믄 뭐인가 거기에 심을 써줘야혀. 왜근가하믄 여기다가 전통한지가 좀 괜찮다고 하믄, 금방 쏟아질 판이에요. 한쪽으로, 왜그냐하믄 돈이 나오믄 그냥 쏟아지지요. 그렁게 내 생각으로는 우리 한지에 대해서, 어저께도 누가 그런 얘기를 허드만, 홍사장님은 이미 다 아니까 깊이하고 개발을 해서 또 하시고, 또 전주에 있는 모든 분들은 자기의 계승이 있으니까, 다 갖고 있으니까 그것을 갖고, 시장을 갖고 니꺼내꺼 싸우지 말고. 예를 들자면, 전통한지가 필요하다믄 홍선생꺼 갖다 쓰고, 홍선생님이 전통한지를 하다가 딴 것이 필요하다믄 그 사람것을 거따 넣을 수 있으믄 같이 너주고, 그렇게 전주한지가 되야하는디 그렇게 안되았다, 어저께 그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 앞으로 전라북도가 한지할라믄 그런걸로 그런식으로 뭔가 남겨놓고 가야 아마 이게 확실헌 그 교통정리라고허까 그것이 될 것 같어요. 그것이 없으믄 똑같어.
이거 자꾸 흐르미즈근허고 하므는 그다음에는 한지업계 영원히 떨어져버리지. 중국이나 일본같이 문화재가 되든 한지 명인이 되믄 정부차원에서 딱 질을 터나줘야 그다음에 내려가믄서 그때부터 남어야 우리 역사가 쭈욱 남으까 지금 그런 마음이에요. 그래서 한지에서 큰 돈을 번다는 것이 아니라, 인자는 돈도 지금 형편으로 봐서는 너무나 값이 떨여져서 심들어요 심이 드는데, 내 종교를 갖기 전에는 상댕히 그랬는데, 종교를 갖음서부터는 모든 것이 내가 수십억을 갖고 있다그래도 그건 내가 죽을 때 갖고 가는 것이 없지 않느냐. 널이믄 널, 평 정도야 한 서너평이나 되나 너덧평 되믄 그 속에 묻혀서 흙으로 돌아가는데, 돌아간후에도 그사람이 그 허면서 어떤 참 그사람 가는 길이 넘헌테 존경받을만큼 허고 갔다. 그러고 그사람 한지가 전통한지가 그때 있을 때 그렇게 허더니, 과연 그 종이가 써보니까 그분은 장인 자격이 있다. 그래서 후손이, 내 후계자가 할때 인자 더 심을 써서 나보다 더 연구를 해가믄서 자기가 해서 뒤를 이어서 쭈욱 갖으면, 보람이 그거 뿐이요 딴거없고.
우정울타리 같이 한덩어리가 되야는디
인자 그리도 우리 한지가 그전이는 괜찮았는디, 그랬는데 인자 기계지가 나왔고 기계지가 일부 노트도 그러고 모든 사용하는 것을 쓰다보다가 또 기계로 한지를 비슷허게 만들어가꼬 거그서부터 자연스레 내려가기 시작했지요. 내려가다보니까, 기계도 자꾸 발전허고 자꾸 연구하더보니까 기계가 인자 헌 종이가 약간 한지테를 낼만큼 뜨게 되았고 그래서 인자 그것때메 타격을 받고 있는데, 중국종이가 인자 한국에,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공장을 짓고 거그서 인자 수입이 들오니까 일당이 우리 한국서 하루 부린걸로 거그 가서는 한달을 인권비를 주고도 남으니까 그렁게 예를 들어서 종우 한 장을 뜨는데 여그서 삼원이 걸린다 십원이 걸린다 하므는 거그서는 몇전이나밖에 안걸리니까. 예를 들어서 한 장에 여그서 이천원 받는다 이천원 받으믄 여그서 품삯주고 나머지가 남질 않어서 포돗이 주체해 나갈정도 되는데 거그서 갖다 팔므는 지금인게 인자 국산허고 허는디. 첨은에는 한지가 인자 무조건 한지는 한지로만 생각히서 지금도 중국이라고 안되있지만, 지금 한지가 그대로 퍼져가지고 너무도 싸게 단가를 내부니까 우리는 단가 그거 예를 들어서 후딱 말하자므는 그 사람들 품삯 준 것을 우리는 상상도 못헐만큼 싸니까, 종이 한 장에 뜨는데 십원을 든다믄 아깜새 말과같이 몇원밖에 안먹으니까, 여그와서 한 장, 우리는 이천원 받는데도 우리는 큰 이득이 없는데. 그사람들은 똑같은 가격을 쪼끔 내려서 백한 칠십원이나, 처음에는 거의 같이 받았어. 그것을 몰르기 때문에 쪼끔씩 들오니까.
그래서 처음에 한사람들은 돈을 좀 많이 벌었제. 지금도 많이 벌고 있지만. 그러다보니까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각 중도매상만 줬는데, 인자 이사람들이 자꾸 퍼진게. 저사람 돈을 번거를 보니까 내가 공장만 해서는 도저히 돈이 안되겠다 생각이 드니까 이사람들이 인자 나도 들어가서 할 수 있다. 긍게 너도 들어가고 나도 들어가고 한게.
거기시 한 사람들이 인자 상댕히, 아 인자 눈을 떠보니까 앞에 한 사람들이 돈을 아주 잘 버니까 그 사람들이 인자 끼어드는거여 하나 둘 자꾸. 끼어들다보니까 우리 대한민국이 만장을 쓴다 허므는 만장을 우리가 떠서 냈을 때는 각자 공장에서 적든 말든 다 그래도 소비가 되아서 가을 쯤 되므는 예를 들어서 한 장에 십원 짜리가 십오원까지도 갈 수있고 딸리믄. 그렇게 팔았는데 인자 그것이 아니라 반대로 되가지고 예를 들어서 십오원 받을 놈 그분들은 뭐 십원만 받으믄 우리가 십원을 따라가야하는디 십원을 따라가게 되므는 이미 거그서부터는 적자가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인자 한사람 두사람 자꾸 눈을 돌리고 몸을 돌려서 인자 다 지금 먹고사는 직장으로 가고 또 노가대로도 가고.
왜그러냐하믄 이 한지하는 사람들이 후딱 노가대로 못가요. 이건 심은 드는데 무건 것을 많이 안들거든. 인자 뒤모도 정도는 심이 든디 한지 뜨는 기술자도 심은 들어요. 근디 노가대맨이로 가서 쇳덩이리 들고 그러진 않잖아요. 그러니까 인자 이사람들이 자꾸 하나하나 뿔뿔이 나가다보고 역시 몇사람씩 데리고 하던 사람들도 인권비를 줄수가 없으니까. 인자 이걸히서는 도저히 못살겄다. 서울로나 어디로 가든가. 시내나와서 가서 남 품팔이를 하더라도 한달에 열흘만 하더라도 이거 한거보담 훨씬 낫다 그런 생각에서 인자 뿔뿔이 나가다보니까. 인자 끝까지 남을라고 노력한 사람들은 결국은 빚에 쪼달려서 빚에 남아서 할 수 없이 못허게 되고, 그냥 나간 사람도 있고.
그러다보니까 인자 한지는 자꾸 들오고. 여러 사람이 하니까 자꾸 들어고. 인자 전장이 자끼들끼리 난 것은 예를 들어서 서울 시내에 천장을 쓴다고 하면은, 그때는 한사람 두사람이 냈으면 오백 정도 서로다 갈라서 팔수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서, 먼저 누가 잘헌 사람이냐에 따라서 거래 상부가 걸려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 말을 좋게 헌데도 있지만, 될 수 있음 내꺼 팔고, 장사는 장산게 이윤이 남어야 파니까 그렁게 인자 서로 팔라고 가격 경쟁이 일어나서 자꾸 중국 종이도 가격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허다가 인자 어느정도 딱 인자 내려가고 여까지 오게 되았죠. 그래서 인자 전통한지 뜨나 그냥 한지 뜨던 사람들은 다 손을 놔버리고, 놔버리고 인자 없는거요. 긍게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지금 화선지 뜨신 분들이 그래도 맥을 이어갈라고 했는디, 이것도 못이어가고 있어요 지금. 못이어가고 있어서 그것이 안타까웁죠. 그래서 아깜새 얘기가 그거여.
나는 나대로 해논 종이가 있은게 여그서 하믄서 개발해서 꾸준히 내놓고 그리고 뒤에 후계자를 길를 수 있으믄 자꾸 길러놓고, 그러고 딴 사람들은 딴 사람들 나름대로 자기일 허고, 아까 했던 데로 화선지 팔 자리에 전통한지가 들어가고 전통한지를 파는디 화선지가 필요하믄 그사람꺼를 맡아서 그사람걸 팔아주고 이렇게 우정 울타리 같이 한 덩어리가 되어야하는데, 지금은 다 나만 잘허고 나만 있응게 허고 내가 오래되았고 나만 최고라고 해싸니까 이게 너무나 사람이 자기가 자기 입에껏을 지킬라고 하는 것이 사실 아니요.
그니까 다 지금 경쟁이다 보니까 우리 한국종이가 더 못파는거요. 왜근가하믄 이것이 단합해서 팔믄 십원짜리가 이십원짜리가 될 수 있고. 내 생각이요 지금 얘기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화선지를 천장을 갖고왔다, 갖과서 예를 들어서 국내꺼같으믄 만원을 냄길수가 없는데 그거 갖고믄 예를 들어서 오육만원썩 냄길 수가 있다. 사만원을 냄기믄은 이만원은 똑 띠고 이만원은 가지고 오믄 그걸 한지업계에서 다시 살길을 찾을 것이 내생각에는 옳아요. 근데 사람이 내놓질 않아요 지금 왜그냐하믄 더 크게 헐라고. 더 해서.
그래서 서울 인사동에다가 지업사도 내고, 그전에 한사람들은, 그 지업사 낸 사람들은 그래도 돌아가요 왜 그러냐하믄 공장에서 파는거보담은 월등 남지 판매도 되니까 그래도. 근데 그렇게 한 사람들이 갖다 수입것 가져다 파니까 더 이익이 남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꾸준히 나가요. 나가요 나가다 인자 여기서 누가 떨어지냐믄 최후깐에서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돈싸움도 되고 머리싸움도 되고 그렇게 하다가 인자 결국은 이것이 한덩어리가 되야만 모든 것이 살 것 같애요.
지금 한지 이렇게 해서는 우리같은 사람은 정부에서 칠십만원 준 것도 감사하지요. 그러나 이거 준것도 준것이지만, 아깜새 말한거와 같이 이 자꾸 하한선을 내려갈 때는 정부에서 쪼끔 잡아줘서 이 판로같은 것은 못해줘도 그 사람이 죽어도 남아있게. 그래서 대한명인. 지금 말들어보니까 정부에서도 한지쪽을 쓴다는데, 그냥 한지 중국서 들온건가 안들어온건가 확인해가지고 중국꺼 같으믄 될 수 있으믄 삼가주고, 국내에서 직접 뜨는 종이를 쪼끔 비싸더래도 쪼끔 써주시고 이렇게 점차적으로 나가믄 우리 한국한지도 쪼끔씩 나서갈꺼 아닌가.
기계지 나오고 중국산 한지 나올 때 나도 많이 에려웠죠.
그것이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했었지. 그것이 지금까지도 그것이 남아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이 내가 이 길을 아깜새와 같이 내가 딴 길을 생각했다던가 했으믄 진작에 없어졌을텐데. 나는 그 아까 삼베 얘기같이 그것이 언젠가는 오는데, 그것이 오는 길에 정부쪽에서 그때까지는 생각을 안했어요. 정부에서 해줄 거이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다보므는, 딴사람들 차리고 어떠고 할동안에 그래도 한지에 대해서 누가 계속 떠오고 있더라. 그리고 인자 저기 상장같은거 상패 같은거, 내가 쭉 하다보므는 아마도 그사람이 맥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이 전통한지가 우리 한국에 남아있다.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도 그런디 그래도 그분이 있어서 그 한지가 남았고 그분이 글도 살믄서 쪼끔 앞에라도 쳐다봤지 않느냐. 앞날을 쪼끔이라도 생각한번 더 해봤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해서 내가 지금 꾸준히 이어오는거요. 앞으로도 더 힘들수도 있어요. 많이 앞으로도 더.
한지는 천상 물에 들어갔다 나오믄 베려버린게
내 지금 여러 가지 생각을 허고 있어요 그러고 또 실현을 하고 있고. 왜그러냐하믄 딴 옷감같은 거는 염색을 하는데 우려가 없어요. 왜그냐하믄 염색은 거 자체가 멕여서 다시 햇빛에다 말려서 다시 너도 쳐지지 않기 때문에. 이 한지는 천상 물속에 들어갔나 나오믄 그것이 안되요. 안되서 내가 몇가지 하고 있는데. 그거보다 더 지금 여기보시다시피 여그 있는거 여러 가지 다 저 허고 있지만 너덧가지는 내가 자랑허겄어요.
그런데 지금 열매 나무 뿌리 그러고 나무, 그러고 그 자체 잎사귀 말른거 이런 것을 말린거를 가지고 염색을 허다보니까 한지는 참 어려워요. 경제적으로 넉넉허다므는 이것을 많이 가지고 그냥 덜퍽덜퍽 해도 되는데 이 한지는 한번 헐라므는 닥을 원료를 다 만들어서, 싸브라통이라는 통 그 통에서 풀때, 풀어서 때가지고 물을 제거헌 다음에 거따가 거 염색을 넣고 이렇게 뒤적거려가지고 거그서 염색이 다 잘 들어있을 때, 그때 그것을 통에다 넣고 뜨머는 예를 들어서 치자를 물을 들여서 통에 넣고 뜨게되므는 그것이 노랗게도 나올수도 있고 또 노랑보다 더 진허게도 나올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조끔씩 해봐도 원료 나가는 것이 너무나 많이 돈이 소비가 되기 때문에 거 후딱 못헙니다. 그러고 자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조금씩 조금씩 해나가고 있는데, 앞으로도 마찬가지 그거뿐만 아니라, 전통 한지에서 전통한지는 한진데, 거그서 인자 서예가도 다 그전에도 그런거 가지고 썼지만, 앞으로는 거 외국 거 개발, 즉 말하자믄 개량판으로도 자그마게해서 서예쓰신 분들이 쓸수있도록 해서 몇가지 상품화 할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상품화 하는대신, 지금 우리나라가 종이에 대해서 질이 어느정도 좋냐 나쁘냐는 것은 인자 그분들이 써보고 평가를 해서 찾아주시믄 그것이 계속 많이 수령이 되지만, 많이 소용이 안된다고해도 계속 맥을 이어갈라고 합니다. 그리고 염색 과정이나 새로헐때마다 그 돈이 그냥 나가는 것입니다. 왜그러냐하믄 그 종이는 시중에 팔수가 없어요. 그래서 잘 되았을 때, 성공헐때만이 돈을 받고 팝니다. 예를들어서 시중에서 천오백원 천원짜리를 자연염색하믄 세배 네배를 받어야 합니다.
그러고 내가 천염염색을 하면서 상당기간 걸려서, 약 십년 전부터 지금까지 하면서 이단체 저단체 들어가보니까, 이모로저모로 천연염색을 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자주 그 사람들헌테 내가 물어봅니다. 어떻게 천연염색이 처음에 헌게 좋은디, 약간 한 칠팔년 한게 가드라. 그런디 자네들은 어떻게 그것을 쓴가 허므는, 그게 옳습니다. 자연에서 얻었으니까 자연의 것이 어느정도 가야, 감으로써 그것이 더 값어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옷을 만든데도 옷을 만들때 빛깔이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느정도 입으믄 약간 바랬을 때, 그때 더 그 옷이 더 빛나고 입으신 분도 그때는 자기 몸에 맞아서 편한거 같지, 그럴때 좋은거 같지, 그런게 선생님도 그런거 신경쓰지 마시고, 자연에서 얻었응게 자연으로 간다는거는 분명히 누구보고도 얘기허시라고해서, 내가 참 한 삼년전부터 그 얘기를 계속 헙니다. 우리집에 한지 염색을 가지러 온 분이 있으믄, 이거 써보시라고 써보신 대신 이거 나보고 원망하지 마시라고. 내가 내 노력대로 헌다고 했는데, 그것이 안되아서 자문을 우리 모임이 있어서 자꾸 물어보믄 그렇게 가니까 그런줄 알고 쓰시라고 내가 이렇게 얘길헙니다.
하루하루가 어찌 그리 빨리 가는가 몰라
그러니까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건 여러 가지 많이 있지만은, 한가지는 국가에서 내가 연구한거를 특허를 바로바로 내줬으믄 좋겄어요. 내가 지금 생각헌거. 내가 생각헌거를 딱 내노므는 그걸 돈을 받질 말고, 우리같은 사람들은 특허를 내주므는 그거 십년 동안인가 얼만가 간다고 하드만요. 그걸 떠나서 내 자존심 그것을 특허를 내놨다믄 그것이 영원히 남았다 그것이요. 난중의 십년이 지나서 예를들어서 그것이 풀려서 딴 사람이 만든다 할지라도 그 주인공은 나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이것을 만들어 놓더니 우리가 쓰다보니까, 참 그분이 노력을 많이 했다고 그런말 듣고. 내가 이 세상 없을 때, 아 그래도 그분이 나이가 잡숴도 계속 허시더니 그래도 그분이 노력헌 만큼 우리도 편히 쓸 수 있고, 노력헌 만큼 우리 한지가 살아있다는 것을 참 그렇게 남기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금.
그러고 앞으로 우리나라 한지 쪽에서는 절망선을 걸고 있는데, 앞으로 상당한 기간은 나는 절망으로 생각했는데, 보통 것은 중국에서 들여오지만, 거기서 해서 판매를 헌다고 합니다. 인자 이렇게 허다보고, 예를 들어서 가믄 앞으로 더 심들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믄 값이 더 낮아지기 때문에 전장이 더 심해집니다. 전장이라 그래서 안되았지만은 서로가 그 한지 업계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을 하다보믄 서로 부딪치기도허고 여러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관세가 붙어서 나와도 이런디 관세가 없어지게 되믄, 자기 종이가 앞에 사람은 예를 들자믄 백장을 파는데 나는 삼십장 이십장 밖에 못팔믄 그 사람을 떨치기 위해서 내가 가격을 더 떨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과거에 소주란 것을 내려서 팔 때, 한 사람은 정직하게 그대로해서 팔았고, 한 사람은 풀을 끓여서 통에다 부서서 팔았는데 항시 그 가격을 낙후고 낙후고 허니까 이사람이 가서 얘기헐 때만, 그때 뿐이지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믄 이 한지도 이런 식으로 나갈 것이 아니냐. 그러나 그 고비만 넘기믄, 아마도 우리 한지가 우리나라의 전통으로 이어간다는 그거고 또 개발헌 종이하고 이렇게 합이 되어서 가며는 후대에는 우리 한지도 일본이나 중국 같이 한지 만든 사람들이 존경을 받고 살아가지 않으까 그렇게 생각을 헙니다.
인자 내 나이가 칠십되었으니까. 지금부터 한가지 한가지 갈치고 있지만, 바로 대려세워서 다 하고 싶지만 내 욕심은 그러나 사람은 일단 육신이 살어야 움직이기 때문에 그 육신이 살기 위해서 가는 길이 있어서 시간을 다 못뺐어서 한이지만은, 그래도 배워서 그래도 배워서 앞으로 후계자가 있단거. 그래서 내가 지금 양로당에 안가고 있는 것도 왜그러냐믄 한가지라도 내가 더 알아서 한가지라도 전수해주고 가며는 그다음에 전수받은 사람이 열가지를 머리아플 것을 내가 다믄 세가지라도 내려 줘도 그 후 사람은 일곱가지만 머리써서 내노믄 되니까 그래서 내가 안가고, 이렇게 하루 이틀 가는 것이 어찌 그리 빨리 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후계자가 이어받았을 때, 그때 그 말씀 하시더니 과연 심이 들어도 이것이 내가 후계자로 받아서 이 남은 것이 참 감사하다 그런 흡족한 마음을 가지고 자부심을 갖고 살아갔으믄 내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