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5 |
[정현숙의 잘 사는 이야기] "양배추와 유기농산물"
관리자(2007-05-14 16:39:34)
"양배추와 유기농산물"
지난 겨울 우리는 양배추 농사를 지었다. 고추작목반에서 정부보조금으로 비닐 하우스를 지었는데, 임대료도 비싸고 자부담금도 만만치 않아 임대료라도 건져보자고 작목반 다섯 집이 200평 하우스 열여섯 동에다 몽땅 양배추를 심고 무농약재배인증을 받았다. 포기가 크지는 않았지만 숯가루도 넣고 키토산이니 게르마늄 같은, 사람이 먹어도 좋은 친환경제재들을 듬뿍 넣어서인지 정말 맛있었다. 이게 양상추예요? 라고 묻는 이들이 더러 있을 정도로 아삭아삭 부드럽고 달았다.
아직 양배추에 질리지 않던 시기에 우리는 간식으로도 양배추를 먹었고, 차를 타고 어디를 갈 때도 양배추 한 포기 들고 가면서 식구수대로 뜯어먹었다. 밥상에는 양배추찜, 샐러드, 양배추국, 생 양배추, 양배추 피클이 돌아가면서 두세 가지씩 올랐다.
총생산량은 줄잡아 20톤. 한겨울에 얼마나 짭짤한 수입이 될까 하던 기대는 양배추값 폭락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수확기를 놓친 양배추는 양이 너무 많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한 집은 800키로 주문 온 것만 팔고 나머지는 그대로 갈아엎었다. 여태까지의 경험상 농산물을 저장해서 재미본 적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한 집은 5톤 트럭으로 가득 부산까지 실어다 주고 백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받고 끝내 버렸다.
그 이쁜 양배추를 차마 갈아엎을 수 없었던 우리는 겨울부터 이 봄에 이르기까지 양배추를 저장하고 정리하고 공짜로 주고 샘플로 보내고 팔고 하느라 양배추와 더불어 살았다. 전국적으로 우리 가족을 아는 사람 중에 아마 올 겨울에 우리집 양배추를 안 먹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덕분에 푸짐하게 인심도 많이 썼다. 원불교, 교회, 사찰, 성당 관련기관에서부터 각종(?) 개인들이 우리 집 양배추 폭탄을 맞았다. 덕분에 예상했던 영농자금은 안 나왔지만 양배추 관련 인사는 넘치게 많이 받았고, 그 반대급부 또한 제법 괜찮았다.
모 종교단체 시설에서는 한방소화제를, 어느 식당에서는 식사초대권을, 어느 교수님은 책을 주셨고, 해마다 김장배추를 가져가시는 서울의 복지관에서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가을 김장 때 또 보자는 기약(?)을 해 주셨다. 이름도 예쁜 민들레국수집에서는 축복의 문자메일을 넣어주셨다. 꼭 양배추 때문은 아니겠지만 엉뚱하게 귀한 홍삼엑기스가 굴러오기도 했다.
가장 압권은 유기농닭 가공업체 사장님이 주신 생닭 수십 마리가 가득 든 자루 세 개, 그리고 이웃 밭 아주머니의 하루 품앗이였다. 그 닭은 저온창고에 넣어두고 작목반원들 모두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 몸보신하고 손님대접까지 했다. 이웃 아주머니는 고추 심는 날 안 그래도 일손이 없어 고민하는데 꽃삽 하나 들고 나타나셔서 돈은 절대 안 받어 하시면서 온종일 고추를 심어 주시는데 어리버리한 초보일꾼들 숫자만 많던 그 날, 일의 중심을 잡고 끝까지 해 주셨다.
아직 저온창고에는 1톤이 넘는 양배추가 들어 계신다. 요즘은 양배추 값도 꽤 오른 듯한데 이제 고추 농사에 바쁜 우리에게 양배추는 관심에서 많이 멀어졌다. 어쨌든 양배추와 함께한 한철은 우리 농사에서 또 한 번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행사가 있어 농산물공판장에 갔다가 과일이나 좀 살까 하고 청과물 건물로 갔는데 사면이 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뜻 보니 철이른 수박에 딸기, 참외에 수입 바나나, 오렌지, 포도까지 때깔 좋은 과일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고 점포 안에도 종류대로 박스들이 있었다. 그래도 뭔가가 있겠지 생각하고 한 바퀴 돌아봤는데 농약 안한 과일은 저농약 배 딱 한 가지가 몇 박스 있을 뿐이었다. 한참 있으니 코가 면역이 되었는지 농약냄새는 한결 줄어들었다. 공판장이라 확실히 값은 쌌다. 딸기라도 한두 박스 살까, 참외라도 좀 사 볼까 망설이다가 끝내 나는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농약냄새만 잔뜩 맡고 공판장을 나왔다.
단언하건대 요즘 세상은 먹을 것이 넘쳐나지만 진짜 먹어야 할 것은 오히려 옛날보다 줄어들었다. 옛날에는 음식이 귀한만큼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이었다. 속임수를 쓰거나 ‘장난’을 치지 않은 진짜 먹을거리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옛날 사회시간에 어찌어찌 들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음식에도 딱 들어맞는다. 약품 넣어서 뽑아낸 식용유, 물엿, 산분해간장을 먹으면서 옛날과 같은 기름, 조청, 간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오해다. 팻트병에 든 과일주스를 사 마시면서 과일즙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진짜 기름, 조청, 간장 또는 과일즙의 흉내를 낸 가짜 공장제품을, 그것도 몸에 들어가면 해로운 식품첨가물이 잔뜩 들어있는 유해 모조품을 우리는 익숙하게, 입에 맞는다는 이유로 피땀 흘려 번 돈을 갖다 바치고 사 먹는다.
된장도 잘 못 팔고 농사해서 큰 수입도 못 올리는 가난한 농사꾼인 우리는 당연하겠지만 뭘 밖에서 잘 사먹지 않는다. 그래도 사 먹을 때는 아는 이웃이 농사지은 농산물이나 유기농과일을 사 먹는다. 유기농 하면 비싸다로 통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값이 농산물 값이나 음식의 값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돈이 없으므로 조금씩 먹고 알뜰하게 먹는다. 사과나 참외도 좀 못난 것이나 자잘하더라도 농약 안 한 걸로 사서 껍질째 먹는다.
수입밀가루는 쓰지 않는다. 국산밀가루는 수입밀가루에 비해 값이 세 배 가까이 비싸지만 밀농사를 지어보면 그 값이 절대 비싼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 대신 가공된 식품을 사지 않는다. 가공식품은 첨가물도 많이 들어가고 값도 비싸진다.
채소는 주변에서 나는 것, 우리 밭 여기저기 있는 정도로 산다. 채소밭을 몇 년 가꾸다 보면 시금치나 상추, 배추 들이 늘 조금씩 남아 있다. 우엉은 한 번 씨를 뿌리면 저절로 씨가 떨어져 필요할 때면 한두 뿌리 뽑아서 맛있게 우엉밥을 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있고, 잘게 썰어 볶은 참깨와 간장을 넣으면 밥 한 그릇이 뚝딱 하는 고수도 겨우내 눈 속에도 파랗게 자란다. 작고 볼품없는 자투리밭이지만 현미밥 해서 그런 반찬 한두 가지만 있으면 되는 우리에게는 소중한 채전이다. 그 채소밭이, 한때 잡초 우거진 풀밭이더니 이 봄에는 배추꽃, 순무꽃, 갓꽃, 냉이꽃이 아기똥풀, 산도화와 어울어지는 꽃밭이 되었다. 갈아엎고 다른 걸 심어야 하는데 그 아름다운 꽃밭을 허물 수 없어 그냥 두고 본다. 봄 채소들이 피우는 꽃은 유기농 농사의 또 다른 수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