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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5 |
[길위의 추억] 거기 인도양 건너 아라비아
관리자(2007-05-14 16:34:13)
포트클랑, 말라카의 해적 당직을 서다        박남준시인 멀고 먼 잠을 잤다 긴 잠을 잤다 바다에 이르렀다 붉은 일몰로 노을지는 바다 탯줄을 자르고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자라나 바다에 나갔다 다 비워진 그릇이 다시 가득 차듯 들고 또 나는 밀물과 썰물의 바다를 보았다 빈배를 풀어 띄웠다 썰물을 따라 흘러갔다 밀물로 함께 밀려왔다 아침 꽃을 보며 미소지었다 지는 노을 바라보며 기다림을 배웠다 세상 속으로 흘러갔다 아이는 길을 떠났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떠나가는 길의 나그네였다 먼길이었다 멀고도 멀다. 말라카 해협, 배의 오른쪽으로 키 작은 방파제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말레이시아 육지가 보인다. 석양의 시간이 긴 강을 따라가듯 항구 포트클랑을 향해 가는 뱃길 양편으로 열대 우림의 숲이 원시를 이루고 있다. 맹그로브 숲과 식물성 기름 팜유의 원료가 되는 팜나무 숲, 어느덧 달이 떠오른다. 인간들의 욕심은 어디까지 갈까. 포트클랑으로 가는 길목엔 광활하게도 숲이 잘려나가고 그 자리 포크레인과 불도저의 흉측한 몰골들이 즐비하다. 공장들이 들어서겠지. 죽순처럼 시멘트 건물이 솟아 날거야. 새들의 노래로 고요하던 숲에 매연과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광란의 춤을 출 거야. 홍콩에 이어서 두 번 째 말레이시아의 항구 클랑에서 내려 외출을 했다. 눅눅하고 후줄그레한 아열대의 습한 흙 냄새가 물씬거렸다. 배로 돌아갈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갈 수는 없었지만 수도인 쿠알라룸푸르까지는 40여분의 거리라고 한다. 바닷가 음식점에 앉아 타이거맥주를 홀짝거렸다. 술맛이 나지 않는다. 음식점 간판의 불빛을 보고 모여든 한 뼘이 훨씬 넘어 보이는 노란 도마뱀이 나와 눈을 맞춘다. 갸우뚱하며 고개를 살짝 비튼다. “너 어디서 왔니. 어디로 가니.” “나 지리산에서 왔다. 봄이면 매화꽃이 피고 진달래가 화사한 동쪽매화 마을, 동매리에 내가 사는 작은 집이 있어. 겨울이면 눈이 온단다. 하얀 목화송이 같은 꽃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넌 절대 모를 거야. 그리고 우리는 너보다 하늘만큼 땅만큼 겁나게 큰 배를 타고 바다건너 두바이까지 간단다. 약 오르지 어쩔래.” 말라카 해협을 달려간다. 멀리 아라비아반도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까지 망망한 바다로 나간다. 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여 인도양에 들어설 때까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누가 믿겠는가. 해적선이 나타난다는 말을, 이 첨단의 시대에 누군들 믿겠는가.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다. 반신반의하며 그랬는데 실제로 지도상에 해적이 출몰한 지역 표기와 날짜들을 보고서야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승무원들은 이 해협을 빠져나갈 때까지 해적당직을 선다고 한다. 용주가 불쑥 나섰다. 우리도 해적당직을 서겠다는 것이다. 상학이와 창훈이도 맞장구를 치며 동조한다. 읔- 하고 싶으면 저나 선다고 할 일이지. 저거 순전히 물귀신 작전이라니까. 어떻게 한다. 나만 못하겠다고 하면 두고두고 놀려먹겠지. 내 머리가 이렇게 순간적으로 빠르게 판단을 하고 즉각적으로 야 그거 참 좋겠다라는 대답까지 하다니 스스로도 놀랍고 대견하다.   해적선, 그들은 빠른 쾌속정과 기관단총 같은 중무장을 하고 배들을 습격하여 지나가는 배들을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한다는 것이다. 해적선의 출몰에 대비한 현대상선이 보유한 장비라고는 물대포라고도 부르는 고작 지름 6-7 센티 가량의 물을 뿜는 소방호수 2대가 전부였다. 그것은 국내법상 총기류를 보유할 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이며 포트클랑을 출발하여 24시간을 꼬박 달려서 이 말라카 해협을 벗어날 때까지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망했다. 망했어. 이거 유언장이라도 미리 써둬야 하는 것 아닌가 몰라. 용주가 원망스럽다. 물 만났다고 맞장구를 친 두 녀석들도 밉다 미워. 싫다 싫어. 비를 맞는다 비 내리는 바다 어린 날로 돌아가 본다. 여름 날 소나기가 내리면 세 살 터울의 동생과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고 마당을 신나게 쏘아 다녔었지.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 늙은 거야. 늙어버렸어. 이렇게 머리칼에 서리가 내려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야. 검은 구름 떼 속으로 배가 잠긴다 이윽고 비, 바다에 비가 내린다 저 민물의 빗방울들 금새 바닷물이 되겠지 저 작은 물방울들 순간을 내던져 바다의 몸을 이루겠지 한때는 어느 푸른 강물이었을 들녘의 곡식들 기름지게 키우던 풍요로운 물줄기였을 사막을 여행하는 자의 갈증 앞에 놓인 생명수 한 모금 감로의 샘물이었을 우물이었을 실개천이었을 저 작은 물방울 저 거대한 바다 허공으로부터 내려와 다시 오르는 끝없는 윤회의 저 빗방울 해적당직을 서기 위해 무전기와 랜턴, 그리고 안전모를 지급 받았다. 저녁 8시 용주와 나, 둘이 한 조가 되어 현대하이웨이 호의 제일 아래층 갑판으로 내려갔다. 시위현장에서도 볼 수 있는 소방호스 2개가 배 뒤편 양쪽에 설치되어 바닷물을 끌어올려 물을 뿜어대고 있다. 일종의 공격용이라기보다는 해적들이 미끄러워 올라오지 못하도록 방어, 방해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군대에 입대해서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처음으로 야간보초를 나갔었다. 깜박 졸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서있었던 것이다. 흐억- 누구야. 머리칼이 곤두서며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기겁을 했다. 숨이 턱 막히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내 그림자였다. 내가 있던 부대는 철책의 전방도 아닌 서울보다도 더 아래 쪽 경기도 송탄 부근이었다. 그때 나는 얼마나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렸던가. 한 시간 쯤 후 심심할 것 같아서 함께 당직을 서자고 상학이와 창훈이가 내려왔다. 둘이 배의 앞뒤로 순찰을 돌며 당직을 설 때는 긴장이 되었는데 이제 안심이 된다. 밤 12시, 초저녁부터 잔뜩 흐려있던 밤하늘이 조금씩 개어가며 열엿새 환한 달이 고운 달무리와 함께 얼굴을 내민다. 덥다. 후덥지근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많이 좋아져서 새벽 1시경이면 해적들이 출몰하는 말라카 해협의 위험한 지역을 벗어난다고 김선장이 내려와서 이야기를 해준다. 상학이와 동갑내기인 김선장과는 배를 타고 오는 동안 그의 자상한 마음씀은 물론 술과 담배, 부르는 노래취향 등등 우리 넷과 척척 죽이 잘 맞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벽 4시까지 예정되었던 해적순찰당직은 훨씬 앞당겨져 1시에 끝났다. 밤하늘, 두 겹의 커다란 띠를 두른 달무리와 별들이 하나둘 점등을 하며 반짝이는 얼굴을 내민다. 말라카 해협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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