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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5 |
[이흥재의 마을 이야기] 부안군 보안면 우동마을
관리자(2007-05-14 16:05:07)
개혁의 꿈이 서린 땅 400년 전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가을 허균은 속세를 떠나 내변산 우반동 정사암에 들어갔다. 탐관오리로 몰려 공주목사에서 파직된 직후이다. 그가 쓴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를 보면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愚磻)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늙은 당산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이란 곳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못이 내려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았다.” 라고 쓰여 있다. 여기의 우반이라는 골짜기 반계(磻溪)골은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일대를 말한다. 우동리는 우동(牛東), 우신(牛新), 감불(甘佛), 만화(萬花)등 네 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 졌다. 본래 우반동이라 불리웠는데, 일제강점기 때 한자말로 고치면서 우동리로 되었다한다. 우동리 마을 뒤로 가면 우동제 저수지가 나오고, 내변산으로 넘어가는 ‘바디재’ 중간에 선계암터가 있고 그 아래 선계폭포가 있다. 그 깊숙한 곳에 이런 너른 터가 있고, 이런 장관을 이루는 폭포가 있다는게 놀랍기만하다. 이곳 선계암터 근방에 정사암이 있었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허균은 예전부터 호남의 과거를 주체할 때나, 해운판관이 되어 조세를 거둬들일 때 여러차례 부안을 지나다녔다. 예전부터 마음을 주고 사귀었던 기생 매창이 부안에 있고, 부안 현감 심광세(沈光世)가 처외가 쪽으로 가까운 인척이어서 부안을 쉴 곳으로 정한 것이다. 홍길동전을 이곳 정사암에 머물렀을 때 지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또, 허균은 매창에게 “당시에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라고 말하고 있다. 명기이면서, 조선 여류시인 중에 시집까지 펴냈던 매창과의 순수한 사랑(plantonic love)를 나누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선계암터는 넓은 구릉터로, 변산의 4대 사찰중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선계골에 터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발원하여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폭포가 약 60여m의 선계폭포이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태조가 이 선계골에 머물며 도를 닦고 심신을 단련했는데, 그 수련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해서 칼로 폭포를 잘랐다고 한다. 이때 자른 칼자국이 폭포가 있는 절벽의 바위면에 있다고 한다. 원래 선계골 선계폭포인데, 이성계의 성계와 발음이 비슷하여 성계골, 성계폭포라 부르기도 한다. 허균이 정사암터에 머무른 지 10년 후, 1618년 49세의 나이로 역적의 이름으로 처형당한다. 그 후 35년이 지난 1653년에 조선실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이 우반동에 옮겨, 20여 년 동안을 이곳에 우거하면서, 농민들의 현실을 몸소 경험한 후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하는 뜻으로 반계수록 26권을 저술했다. 유형원의 호인 ‘반계’는 이 마을을 가로 질러 흐르는 조그만 시냇물인 우반천(牛磻川)에서 따서 지었다고 한다. 실학의 1대를 반계 유형원이라면, 그 다음은 성호 이익을, 그리고 실학을 집대성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라 할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반계는 수만 군대의 군량을 댈 만한 경륜이 있다고 했다. 또 허생이 변산의 도적 무리를 찾아가 돈을 나누어 주고, 모두 아내를 얻어 가정을 꾸미고, 소를 마련하여 농사를 짓게 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선계폭포 맞은편에 있는 도적굴 일 것이라고도 한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고,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저술하고, 박지원의 「허생전」의 무대가 된 곳이 바로 이곳 우반동 일대라는 설들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반동은 개혁을 꿈꾸고, 모든 민중이 고루 잘 먹고 잘 사는 이상향을 그렸던 곳이라는 뜻이다. 우동리 마을사람들은 당산제를 지낸다. 바다에 임하고 있어 외침을 막고, 마을의 평안과 복을 비는 믿음에서 당산이 필요했고, 공동신앙적 구심이 되었다. 당산나무는 200여년 된 팽나무 솟대 당산으로 2.46m의 선돌과 7m정도의 나무솟대를 신체로 하여 음력 정월 대보름에 격년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또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변산반도 줄다리기 중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줄은 정월 열나흩 날부터 꼬기 시작하며, 길이가 50여m나 되게 한다. 줄은 암줄과 숫줄로 만들고 줄이 완성되면, 보름날 아침에, 부정한 액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게, 줄을 메고 마을을 한바퀴 돈다. 줄다리기는 남녀로 편을 만들어 하며, 언제나 여자편이 이기게 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 때문이다. 우반동 줄다리기는 마을사람들의 단결력과 건강성, 그리고 여성이 우리 삶의 바탕이 된다는 생각을 줄다리기를 통해서 구현해 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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