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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5 |
[서펑] 세상의 마루에 노을이 내리면
관리자(2007-05-14 15:56:20)
세상의 마루에 노을이 내리면                      -은희경지음, 창비펴냄 세상의 꽃들은 사람의 속을 태운다. 진지한 검불이 될 때까지 타고 또 타올라 가슴 안에서 한줌 재가 되고 파란 멍자국을 남긴다. 작가 은희경의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속에는 세상을 태우는 잔잔한 꽃잎이 떠다닌다. 이글거리지 않고, 맹렬하지도 않은 불꽃 문양의 꽃잎. 그것은 불 안쪽에 피어오르는 잉걸의 빛깔이기도 하고, 아궁이에서 혼신으로 타오르던 숯덩이의 색채이기도 하다. 꽃잎은 누군가의 속에서 타오르는 순간 순결해지는 것이다. 다양한 빛과 은은한 색깔의 꽃무지 속에서, 은희경의 소설은 불꽃같은 서정을 내뿜는다. 간혹 누군가의 속을 태우는 꽃잎의 순결함이 눈에 띠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지워진 빛과 소리를 불러오듯 한층 경이롭다. 아주 오랜만에 은희경의 소설과 마주했다. 그동안 어디 먼 곳을 향해 여행이라도 다녀온 듯 작가의 소설은 약간 낯설고 새로웠다. 낯설지 않은 것이 새로울 수도 없을 테지만, 적어도 은희경의 소설은 처음 『새의 선물』을 접했을 때만큼이나 진지하고 과묵한 소설 풍경을 보여주었다. 형식과 내용면에서 새롭고도 새로움과 상이한 여섯 편의 중단편이 실린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지난 5년 동안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을 한 곳에 정갈히 묶었다. 그동안 우리 인생의 여러 다양성을 조망하고, 삶의 환경을 예리한 서사로 꿰뚫어온 은희경 작가가 소설쓰기의 낯선 지평을 시도한 공력이 깃든 작품들이기도 하다. 작가의 서정적 감수성과 섬세한 관찰자적 필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현대 도시민의 건조한 삶의 양식과 환경 적응도가 높거나 낮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책을 읽다보면 문득 어느 부분에서 그곳을 살아온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읽는 이에 따라 느낌의 정도와 가치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 문득한 기분이 은희경의 소설이 가지는 은근한 묘(猫)가 되고, 그 속에 숨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해 눈이 따갑고 뒤가 서늘할 정도다. 누군가는 그것을 은희경 소설의 매력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작가는 이미 그것까지 읽어내고는 소설 속에다 묘파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어떤 느낌을 묘사할 때, 누군가 느끼기 전에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하는 본능적이고도 치밀한 작업일 것이다. 은희경 작가는 그것을 페이크(fake) 다큐먼터리처럼 소설 속에다 느슨하면서도 긴장되게 풀어낸다. ‘우연’에 관한 운명적인 성찰의 자세가 그러하고, ‘자아’의 분리 혹은 자아의 입체적 소통, 삶의 완강한 곳에서 뿜어오는 중의적이고 다의적인 해석과 일탈, 갈등과 연민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산문정신이 그러하다. 그러한 묘법이 처음부터 숙고해온 작가의 통렬한 작가정신이 될지 모른다. 그것들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 모두 제 값어치로 빛을 발한다. 어떤 사람은 좋은 소설을 읽고서 그것을 좋다고 말할 때, 필자처럼 빙빙 돌리지 않고 신경을 집중해서 모으거나 가능한 촉각을 곤두세워 말할지 모른다. 그것을 방법의 차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 사람에 따라 글의 모양새가 다르고, 글 속에 이앙(移秧)하는 문학의 정신적 요소들-정적이거나 동적이어서 어떤 차별을 두어야하는 것-의 방향성이나 속도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표제작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에서 그 제목을 얻었다고 한다. 은희경 소설에서도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은 솔직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미추(美醜)의 개념은 통념을 떠나 하나의 이상향으로 군림한다. 여기에서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보띠첼리의 비너스’를 통해 더욱 극명해지는데, 치밀하고 놀랍다. 이밖에도 ‘의심을 찬양함’, ‘고독의 발견’, ‘날씨와 생활’, ‘지도중독’,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등이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차가우면서도 불꽃같은 삶의 여정이 깔려있고, 냉소와 위악의 깊이가 적당한 선에서 우물을 파놓고 있다. 그것들은 한번씩 세상 위에 흩뿌려지기도 하고, 한번씩 세상 밑으로 가라앉기도 한다. 도저한 깊이로 흘려보낼 수 없는 우리시대 삶의 저마다 버전과 생의 뜨거운 풍경을 청량한 우울로 묘사하기도 하고, 서늘한 그늘로 가리기도 한다. 새기는 문장마다 그 하나하나에 깃든 힘을 느끼게 되는 은희경의 소설은, 공들인 만큼 세상의 ‘진정성’을 알게 하고, ‘허위’와 ‘기만’과 ‘위악’을 알게 한다. 세상과의 통쾌한 싸움, 그것이 은희경 작가의 소설일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헛된 힘의 정체는 아마 상투성과 허위일 것이다. 좋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던 시절이 있었다. 덕분에 내 머릿속에는 상식적인 생각이 가득 차 있다. 머리를 열면 그것이 제일 먼저 튀어나온다. 에헴, 하고 점잖게 걸어 나오려는 그런저런 생각들을 밀치고 별처럼 빛나는(틀림없이!) 나의 진짜 생각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중력과 반대방향으로 나 자신의 근육을 사용해야 한다. 헛된 힘을 빼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체력을 만들 필요가 있다.” 공감하는 바이다. 매번 글에다 힘을 다 소진하고나면 작가는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세상 위에 버려진 아름다움을 보듬고, 헛된 꿈이라도 좋으니 그것이 한번이라도 ‘진실’이 되어주길 소망하는 문사(文士)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건 아닐까? 아름다움으로부터 멸시받는 게 어디 ‘나’뿐이겠는가? 세상의 마루에 노을이 내리면,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빛으로부터 멸시받는다. 제 이름의 색깔로 울어 지치는 것들이 하나둘 둥지로 날아들면서, 작가는 그 문득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게 되고, 앞을 기시(旣視)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생의 먼 곳을 향해 치열해지고 집요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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