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 | [사람과사람]
"나는 DJ다"
젊은이들의 해방구, 쥬크박스 사장DJ 장미씨
장세길 문화저널 기자(2003-04-08 10:22:45)
난장판(?)이었다. 저 밑 계단부터 들리던 음악소리는 거의 귀를 찢어 놓을 정도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안이 벙벙하다. 대학생 서너명이 건배를 하다 이내 소리를 지르더니 벌떡 일어나 춤을 춘다. 이 정도는 그래도 양반축에 든다. 몇몇은 탁자위에서, 그리고 앞으로 나가 춤을 춘다. 그것도 막춤을. 그렇다고 욕을 하는 사람도,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내준다. 이게 뭔가? 분위기로 봐선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그많은 술집을 놔두고 왜 십여명의 사람들이 자리나기만을 기다리며 입구에 서성대는가? 그에 대한 의문은 오래가지 않는다. 조금 있다 보면 난장판(?)으로 보이던 이곳이 젊은이들의 '해방구'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전북대 구정문 앞에 위치한 쥬크박스-0025. 이곳에 들어올 때 따로지만 자리에 앉는 순간 하나가 된다. "저기 노란옷 입은 얘가 군대간다네. 너만 가냐. 다 가는 군대야. 힘내. 자! 박수…." 짝짝짝. 그리고 들려오는 노래. "집떠나 열차타고 군대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흐르고 모든 사람이 함께 불러준다.
장미(41). 그가 이 젊은이들의 해방구를 진두지휘하는 'DJ'다. 때론 애인과 헤어진 '친구'를 위해 "병신. 애인하나 간수 못하고"라며 핀잔을 주다가 "세상엔 여자 많아. 너를 버리고 간 그 애인이 바보야"라며 따뜻한 위로를 던져주곤 용기를 복돋아 주는 노래를 선사하는 DJ. 개성이 강하고 특히나 개인주의적이라는 요새 젊은이들을 말한마디로 웃기기도, 울리기도 하며 하나로 만드는 DJ가 바로 그이다.
"그래도 싸움한번 나지 않아요. 술이 '떡'이 된 사람도 없고요. 쥬크박스만의 문화가 있다고 할까요. 그것은 다름아니라 젊은이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순수한 감성, 열정이 아무 거리낌없이 표출되는 공간이랄 수 있죠."
멤버쉽 회원이 3천명을 넘었다고 하니 그의 말대로 쥬크박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팬(fan)'도 솔찬하다. 손님들 대부분은 그가 DJ를 맡는 저녁 8시 30분과 11시 30분에 맞춰 이곳을 찾는다. 말그대로 장미씨는 젊은이들의 '스타 DJ'다.
신념으로 버텨온 DJ 20년
우여곡절이 많은 DJ 인생이었다. 처음 DJ를 맡은 것은 198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방황할 때 친구따라 우연히 들른 음악다방의 분위기는 그의 인생을 결정해버렸다.
"말이 안나올 정도로 별천지더라고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뒤로 자주 가게 됐는데, 이곳이 한참 방황하던 저에게 큰 힘이 됐어요. 그리고 DJ가 되려고 마음 먹게 되었죠."
그러나 여자 DJ를 원하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아직 여자가 무엇을 하기엔 제약받던 시절이었다. 그를 믿었던 어머니가 사장을 직접 만나 설득해 '뮤즈'라는 곳에서 '겨우' DJ를 시작했다. 그리고 서울, 대전, 대구, 광주 등이 특급 호텔에서 댄스디제이로 눈코뜰새 없는 시간들을 보낸 뒤 10년만에 귀향했다. DJ를 그만둘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DJ를 그만두고 뭐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휩싸였고 그 와중에 "그래 나는 DJ다"라는 결론은 얻었단다. 그리곤 곧바로 지금의 쥬크박스의 원조인 전주시 고사동 쥬크박스를 열었다.
DJ밖에 몰랐던 그에게 쥬크박스라는 '사업'은 만만치 않았다. 돈도 돈이거니와 외진 곳에 문을 연다고 생맥주 회사에서 맥주도 대주지 않았단다. 그 와중에 사기도 당했다. 아는 이들의 도움으로 겨우 문을 열었고 그가 하고 싶은 DJ, 음악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는 공간을 가진 것이 너무 기뻤단다. 그리고 1999년 7월 8일에는 전북대 앞에 새로운 쥬크박스의 둥지도 텄다. 물론 전북대 앞으로 오기까지 오로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먼 친척에게 빌려준 돈이 날아가 7개월 동안 문을 닫아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고,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전북대 앞에 겨우 문을 연 후에도 어려움은 그치지 않았다.
"문을 연지 7개월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거예요. 한계에 부딪혔죠. 그리고 어느날엔간 저도 모르게 '빨간딱지'가 붙은 거예요. 사채업자가 돈을 못갚자 경매에 부친거죠."
사장이라기 보단 영원한 DJ
DJ는 중노동에 가깝다. 항상 웃고 있는 모습이지만 이백여명이 넘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하나하나 읽어내려면 그의 모든 신경은 곤두서야 한다. 하루도 쉴수가 없다. 그이야 매일이지만 손님들이란 문득 생각날 때 찾아오는 것.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던 날도 링겔 주사를 빼고 1시간 30분동안 쥬크박스만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다시 병원으로 향한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몸은 좋지 않다. 오로지 쥬크박스만을 생각하며, 젊은이들의 끼와 순수한 감성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그들만의 해방구를 생각하는 사이 그의 몸은 많이 쇠약해졌다. 큰 수술도 한번 받았고, 골다공증도 심하다.
연일 가득메우는 젊은이들을 보면서도 그는 새로운 꿈을 꾼다. 꼭 하고 싶은 꿈. 아트센터를 만드는일이다. 연극, 영화, 댄스, 음악 등 젊은이들이 그들의 문화를 아무런 부담이나 거리낌없이 즐길 수 있는 곳. 그는 그것을 만들고 싶단다. 지금은 갚을 돈이 많아 어렵지만 간혹 빈가게가 있나 하고 돌아 다니는 습관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에 어느덧 30대가 넘어가고 있는 10년동안의 쥬크박스 올드(old) 팬들만을 위한 '쥬크박스-old'도 그의 계획중의 하나다.
갚을 돈이 아직 산더미 같건만 좋은 음악을 위해 최고급 음향시설을 새로 들여놓을 정도로 음악에 푹빠진 그녀. 시대와 젊은이들의 정서를 읽고 그들의 끼를 끌어내 쥬크박스의 문화를 만드는 사장으로서의 그의 경영능력도 무시 못하지만 그는 역시 DJ다. 그래서 사장이라고 부르기 보단 DJ 장미로 불러야 하고, 그렇게 부르길 원한다. DJ 장미. 그의 말처럼 그는 영원한 DJ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