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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4 |
[정현숙의 잘 사는 이야기] “꽃은 차가 되고 차는 향기가 되고”
관리자(2007-04-13 18:32:47)
[정현숙의 잘 사는 이야기] “꽃은 차가 되고 차는 향기가 되고” 산수유꽃 그늘, 아직 어린 매화나무에 핀 봉오리 서너 개를 따서 찻잔에 넣는다. 여러 번 우려 먹어 거의 맹맹해져 가던 차에 선연한 매화향이 확 퍼진다. 어릴 적 매화는 꽃이 피리라 채 예상도 하지 못하던 이른 봄에 마당 한 귀퉁이에 피는 듯 마는 듯 있어 문득 지나다 코 끝에 스치는 향 때문에 다시 돌아보고 발견하던 꽃이었다. 이제 그 꽃이 연두빛 차에 실려 여릿한 잎을 펼치고 차에 운치를 더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정읍은 나름대로 문화와 역사가 있는 지역이기도 하지만 차의 역사와 문화에서도 단연 한 가닥 있다. 차를 즐기는 사람도 많고 이런저런 차모임도 많을 뿐 아니라, 내장산이며 두승산 등지에 자생차밭이 있어 유래와 역사도 깊고 새로 조성한 차밭들도 많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에까지 정읍차가 알려져 정읍의 하부차가 차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도 4년 전에 산비탈에 차를 심었다. 아는 것도 없이 무턱대고 심었지만 차를 심으면서 차를 마시고 차를 익히게 되었다. 한번 관심을 갖게 되니 늘 익숙하던 인연처럼 차가 내 생활에 함께 있게 되고, 거기에 또 한 세상이 있어 오묘하고 그 끌림에 끝이 없는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정읍에는 조그만 찻집이 하나 있는데 그 집 주인이 차에 조예가 깊어 배우는 바가 많았다. 일이 바쁘지 않을 때면 한가한 맛에, 너무 고될 때는 피로를 풀기 위해 우리는 찻집을 갔다.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저런 차를 고루 맛보게 된다. 농삿일부터 시작해 잡다한 인간사와 도(道)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띄엄띄엄 이야기를 나누느라 문닫을 시간을 예사로 넘겨 새벽까지 차를 마시기도 하는데, 알고 보니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얘기맛인지 차맛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뿐만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이들이 새벽까지 마셨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우리 밭 차를 따서 차를 처음으로 덖은 지난해는 참으로 다양한 차들과 품격 높은 차들을 접견하기도 한 해였다. 어떤 분은 도를 말하면서 사과맛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얘기를 했지만, 좋은 차의 경지 역시 ‘나는 이제 그 맛을 안다. 그래서 더는 의심이 없다’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즉 나는 이제 향기로운 차를 맛보았고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는 걸 알았으며, 이런 아름다움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이다. 지난해는 차솥도 없이 가마솥을 달구어 차를 덖었다. 이른 봄 매화를 따면서부터 산야초차를 시작했고, 우리 밭 녹차를 두 번 따서 덖은 뒤에는 쑥차를 만들었다. 차는 역시 녹차라야 한다지만, 아직 잡다한 세상에 사는 나는 야생초와 산야초들의 다양한 세계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매력이다. 녹차에 비해 다른 차들은 비교적 맛을 내기가 어렵지 않으면서 고유한 향을 가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 쑥차를 만들 때, 녹차처럼 비비지 않아도 맛이 난다고 해서 슬쩍 비비면서 덖었다가 향이 제대로 나지 않아 다시 만들기도 했다. 이른 아침이나 몸이 오슬할 때, 녹차를 많이 마신 다음 맛을 좀 바꿔 볼 때 쑥차를 마시면 몸이 따뜻하기도 하고 쑥향이 새롭기도 해서 좋았다. 그 다음 무난한 차는 뽕잎차다. 뽕잎은 고혈압이나 당뇨에 좋다고 알려져 카페인이 싫거나 몸이 안 좋은 환자들도 꾸준히 마시면 좋은 차가 뽕잎찬데, 감잎같은 아린 맛이 없어 편하게 마실 수 있고 맛도 좋은 편이다. 차를 만들 때는 대개 어린 잎을 쓰지만 약용으로 쓸 때는 서리가 내린 다음 잎을 따서 쓴다. 나는 뽕잎차를 여러 가지로 만들어 보았는데, 그늘에서 그냥 말려도 되고 비비면서 말리거나 덖으면서 비벼도 된다. 차로서 제대로 맛이 나는 것은 아무래도 덖으면서 비비는 것인데 어느 해는 그늘에서 잘 말리기만 해서 두고 먹은 적이 있다.        사람이 먹는 모든 나무와 풀들, 온갖 야생초들은 다 차의 재료가 된다. 봄에 나는 모든 어린 순들과 꽃을 섞으면 오묘한 향이 어울어지는 백초차가 되는데, 아는 분이 거의 백 가지 순을 따서 만들었다는 백초차를 먹어 보고 나는 그 맛에 그대로 반해 버렸다. 부부가 산을 다니면서 취미삼아 만들었다는데 가족들 다 나눠 주고 내게는 한 주먹쯤 주셨다. 그 귀한 것을 차마 더 달라지도 못하고 애지중지 아껴먹는데, 어느 날 만났더니 아들 먹으라고 지퍼백 큰데다 가득 담아 줬는데 무슨 풀이파리라고 서울 가는 길에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그 아깝고 애통함이란-. 만든 분이 더하겠지만 듣는 나 역시 가슴을 쳤다. 올해 나도 그 백 가지 역사에 도전해 보려고 한다. 작년에는 한 서른 가지를 뜯어다가 만들었는데 찔레꽃과 아카시아가 나올 때쯤 날씨도 덥고 할 일도 분주하고 해서 멈춰버렸던 것이다. 꽃은 따서 살짝 찌고 순은 따서 따로따로 덖어 나중에 합치는데, 그걸 다 하자면 봄날 해가 하나도 길지 않다. 잎이 더 무성해지면 산야초 엑기스를 만들어야 하니 봄날이 끝난다고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농사짓기 팍팍하고 재미없을 적을 때,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아직 형편이 안 풀릴까 속상할 때, 쑥도 뜯고 뽕잎도 뜯고 어름순, 생강나무꽃, 화살나무잎을 따고 있으면 그런대로 내 삶이 무던하고 평화롭게 여겨지기도 한다. 봄 햇살 아래 뾰족뾰족 돋는 새순을 하염없이 뜯고 있노라면 참으로 한가하게 보이겠지만 세상살이에 어디 그게 전부이겠는가. 지난겨울 우리 작목반은 양배추 속에 묻혀 살았고, 우리 남편은 작목반 회의하고 서류정리하며 봄을 맞았다. 작목반원들이 비싼 땅 임대료라도 건져보자고 비닐하우스 열 몇 동에다 몽땅 양배추를 심었는데, 내가 봐도 놀라운 그 아삭하고 맛있는 유기농 양배추를 끝내 다 못 팔아서 일부는 그대로 갈아엎고 일부는 저온창고에 넣어두고 팔다가 나눠주다가 하는 중이니, 농사에 쓰린 속을 그나마 산에서나 차를 마시며 달랜다고나 할까. 고추가 들판농사고 장담기가 장독대농사라면 차 만들기는 산중농사라 할 수 있는데, 그 중 재미있고 마음 편하기는 산중농사가 제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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