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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4 |
[이종민의 음악편지] "한 무용수를 추모하며"
관리자(2007-04-13 18:29:23)
[이종민의 음악편지] "한 무용수를 추모하며" 노란 개나리로 가슴앓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순정한 청년’ 박배엽시인 때문입니다. 80년대 후반의 어느 봄날, 순수한 웃음 덕에 싱거워 보이기도 하는 시인이 다짜고짜 개나리 구경 가자며 오토바이를 몰고 연구실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뒷자리에 매달려 타나? 몇 번을 망설였지만 그 순한 미소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겁도 체면의식도 잊은 채 꽁무니에 매달리어 한참을 달렸습니다. 멀미 때문이었을까? 아님 시인과 오토바이 타고 개나리 구경을 한다는 특이한 상황이 저의 몰입을 조장했을까? 풍남초등학교 담장에 흐드러진 개나리를, 그야말로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아픈 추억으로 남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그리고 갑작스러운 시인의 발병 소식. 많은 이들이 점점 야위어 가는 그를 안타까워했지만 저는 정작 그의 병실을 찾지 못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화사한 개나리와 엮인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더욱 강렬한 어떤 모습으로 대치되지 않을까, 그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때라 그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회한이 되었습니다. 끝내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 죄인, 조문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개나리의 아픈 노란 추억만이 추모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2월 그의 3주기 추모제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다녀온 것도 이런 죄스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몇 십번 절을 올리고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봉독하는 사이 마음속 노란 가슴앓이, 그 두려움과 회한이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제사가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했던가… 덕분에 내소사 청연암 아래 흔연한 복수초, 그 노란 빛의 향연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온 지 겨우 몇 주, 또 다시 청천벽력의 죽음 소식과 접하고 말았습니다. 사포의 신용숙. 이 지역 무용계의 척박함에 온 몸으로 저항해온 여리지만 강했던 예술인. 무대에 서기만 하면 수줍은 미소와 몸짓을 금방 역동적 춤사위로 승화시켜버리고 마는, 진정성을 갖춘 이 시대 드믄 춤꾼. 어둠속에 갇혀있던 동학농민군의 영령들을 불러내어 신명어린 춤으로 위무하여 다시 돌려보내주던 그가 그 영령들을 따라나섰습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공원묘지 화장장, 그 무심한 불꽃을 뚫고 영원한 어둠속으로, 눈부시게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저물어 가는 낮은 산들의 어둠 사이로/ 실오라기 같은 길 하나 눈부시게 떠오른다./ 그래, 맨몸으로 홀로 빛나는 것들에게는/ 언제나 슬픔이 묻어 있구나...벗이여, 무명(無名)의 세월을 흐르는/ 저 길의 어디쯤에 그대 있더라도/ 돌아보지는 말게나./ 그대 비로소 어둠의 심연에 이르러/ 지상의 눈부신 길 하나 건너고 있으니. - 박배엽 시인에 대한 박두규시인의 ‘조사’ 중에서 이런 조사 하나 없이 소박한 영정 앞에 머리만 주억거리다 돌아왔습니다. ‘준비 없는 이별’ 앞에서 그 자리에 허둥허둥 찾아온 모든 이들처럼 황망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허로움만 황사바람에 풀풀 날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 허함을 달래기 위해 교정을 거닐다가 어둠을 밝히며 하얗게 피어난 목련을 보고 말았습니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생각나는 사람...” 또다시 가슴앓이에 운명처럼 휩싸이리라는 예감이 탄식으로 찾아왔습니다. 목련의 그 하얀 가슴앓이! 그대 떠나고 나면/ 나는 온통 어둠에 휩싸일 거예요./ 그대 떠나고 나면/ 외로움에 남겨져/ 난 그 푸르른 시절의/ 사랑을 추억하겠지요./ 그대 떠나고 나면/ 나는 온통 어둠에 휩싸일 거예요.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이를 추억하며 이런 노랫말을 되외어 봅니다. ‘베네수엘라의 보석’ 브라보가 노래한 [어둠](Sombras)의 내용입니다. 압제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애환을 서정적인 노래로 달래주던 그가 일상으로 찾아오는 이별의 아픔을 가슴 저리게 그려주고 있는 곡입니다. 곡이 좋아 진즉 ‘음악편지’ 감으로 꼽아두었던 노래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했는데, 브라보처럼 역사의식과 예술성을 함께 갖추고 있는 한 예술가를 추모하는 음악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슬프지만 다행스런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젊은 후배들의 때 이른 죽음 앞에 마음이 어둑어둑 가라앉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슬픔의 어둠속에 남겨놓은 채 그 시원(始原)의 어둠으로 서둘러 되돌아간 그들. 아무래도 속된 세상의 빛이 견디기 어려웠나 봅니다. 어둠 속에서 수줍게 세상을 향해 발언을 했던 박배엽 시인, 어두운 무대에 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신명의 춤사위를 펼쳐 보여주던 무용인 신용숙. 새벽의 맑은 빛을 마련하기 위해 밤의 어둠 뒤에 숨어버린 태양처럼 새날 새 세상을 위한 밝은 빛 하나 먼저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우리들 곁을 떠났습니다. 작은 어둠 속에서 보여줬던 그들의 적지 않은 성과들이 그 큰 태초의 어둠속에서는 무엇을 궁리하고 있을지 짐작케 해줄 뿐입니다. 그들이 잠시 밝혀주었던 빛을 추억하며 슬픈 어둠속에서도 노력하고 분발하는 일, 남겨진 자들의 몫이겠지요? 모든 것을 언제고 무화(無化)할 수 있는 저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항하는 길은 탄식과 한숨이 아니랍니다. 끊임없이 무릎꿇림을 당하면서도 거듭 일어나 나아가는 것, 그것만이 나약한 우리가 그 운명에 저항하는 거의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어둠을 직시해야 어둠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슬픔의 바다에 푹 젖어보아야 빠져나오는 길이 열립니다. 어둠이 우리들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라면 피하는 게 능사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이 ‘어둠의 노래’ 들으시며 화창한 봄의 거듭남 꿈꿔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 이들을 추모하는 또 하나의 길이라 희망하며. 이종민 교수는 전북대에서 영문학 강의를 하면서 전주전통문화도시 조성위원회 위원장 등 전주를 문화도시로 가꾸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몇몇 지인들에게 보내기 시작한 음악편지를 모아 2년 전 『음악, 화살처럼 꽂히다』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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