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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4 |
[신귀백 영화엿보기] 한 스페인 남자의 복수 "귀향(2006)'
관리자(2007-04-13 18:24:57)
[신귀백 영화엿보기] 한 스페인 남자의 복수 "귀향(2006)' 스페인에서 남자로 산다는 것 “피레네 산맥 아래는 아프리카다.” 나폴레옹의 말. 스페인은 유럽과 다른 어떤 곳이라는 말이렷다. 여기 피레네 산맥 아래 살았던 남자들. 무적함대의 해군을 비롯해 아즈텍을 멸망시킨 잔혹한 코르테즈, 스페인을 오래도록 내전으로 이끈 신중하고 악랄한 군인 프랑코 그리고 요즘 남자로 남성 섹시미의 극치인 안토니오 반데라스도 이 동네 사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그리고 매력 있는 방탕아 돈 쥬앙을 탄생시킨 곳도 스페인. 물론 몇 줄에 쓰기 어려운 사람들.   남자의 나라. 증오심 없이도 멀쩡한 소의 등에 창을 꽂고 열광하는 나라. 레알과 바르셀로나의 경기는 한국에서도 미치는데, 하물며 본 바닥이랴. 이 나라 어디 라만차(돈키호테의 무대요, 알모도바르의 고향)에서 십자수 뜨기를 좋아하는 소년이 있다고 하자. 어렸을 때부터 마초에 대한 훈련과 강박관념 속에서 자란 유약한 남자애들, 우울할 것이다. 여기 역사적 비극을 성장기에 체험한 이 ‘프랑코의 아이들’ 중의 한 사람, 알모도바르(게이란다)는 부드러운 머시마가 아니었을까. 이 남자의 영화를 여성들이 더 좋아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엔딩크레딧에 “배우를 연기한 모든 여자 연기자들과 여자 연기를 한 남자들과 어머니가 되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내 어머니에게 바친다.”고 했던가. 동성애, 성전환 수술, 에이즈, 마약, 매춘 등 부담스러운 것들을 들추어내던 부드러운 남자가 이번 <귀향>에서는 그를 키우고 조롱하던 세상과 남자들에 대해 확실한 복수를 한다. 찌질한 남자, 근사한 여자    혹자는 그의 영화에서 걸어 나온 남자들을 두고 “추악한 남성성”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수녀를 임신시키고 에이즈를 선물하는 트렌스젠더, <그녀에게>의 지극한 간호사 베니그노, 딸래미에게 성적 욕망을 터뜨리다가 칼 맞아 되지는 <귀향>의 파코 등 모두 ‘찌질한’ 남자들. 알모도바르는 어쩌자고 이렇듯 비통속적인 인물들을 그리는가.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의 식당을 찾는 영화쟁이들은 쿨하게 그려놓고서.   여자들. 모든 걸 감싸 안는 내 어머니 마뉴엘라, 깊은 잠을 자다 깨어나는 발레리나 리디아, 두터운 입술에 슬픔이 뚝뚝 묻어나올 눈을 가진 여성 라이문다. 퍼펙트다. 이보다 더 근사할 수는 없다. 이 ‘프롤레타리아의 은밀한 매력’을 가진 크루즈는 키가 178이라던데, <빨간 구두>에서 아담사이즈로 등장한 이 안아주고 싶은 서른넷 젊은 여배우가 엄마로 등장한다. 말 못할 사연의 애를 낳은 이 여자는 집안 내력이라 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슬픔을 안고 사는 여성. 재능 있고 예쁜, 몸 구석구석 비밀과 아름다움이 숨어있을, 쾌활함보다는 침묵에 기대는 이 여자는 매혹적이다. 하지만, 솔직히 기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입술보다 큰 눈을 가진 라이문다는 날씨라는 게 변덕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몰랐었을까. 남자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그 숨겨진 칼에 대해 하나도 교육하지 않은 엄마는 나쁜 어머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불친절한 라이문다 씨의 남자를 대하는 태도는 너무도 일방적이고 방어적인데, 그럴 수 있겠다. 사실, 근친의 폭행 앞에 그런 엄마가 뭔 짓은 못하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사랑을 믿되 사랑이 변한다는 것도 명심하며 살아야 할 것이 여자의 일생 아니 사람의 일생일진댄.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이 어디 한용운 시에서 만의 일일 것인가. 불과 얼음의 복수          ‘첫 장면부터 등장한 칼 한 자루는 너절한 삶의 강바닥을 들추어낸다. 도마 위에서 리듬과 함께 맛난 음식을 만들던 칼은 한 때 강가에서 사랑이던 사람의 가슴에 꽂혀 더운 피를 뿜어댄다. 그 더운 김을 냉장고가 식힌다. 야채를 신선하게 하기도 하고 미운 사람의 관이 되던 심판녀의 소도구는 짐승과 함께 고향 강가에 묻힌다. 무심하다. 라이문다를 범해 아이를 낳게 한 짐승은 그의 아내가 저지른 산불에 타 죽는다. 여기 그 모자는 이 불과 얼음을 다 갖춘 존재. 그런데 이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들 누구도 뉘우치지 않는다. 이 더럽고 아픈 도돌이표는 알모도바르의 징한 복수. 지지배 같다고 놀려대던 친구들에 대한, 강한 것을 강조하던 아버지에 대한, 약한 것을 비웃던 세상에 대한 응징의 음표일 것. <그녀에게>의 찌질한 남자 앞에는 공권력이 등장하지만 <귀향>에는 공권력 없이 완전범죄에 이르는 연출은 매우 의도적으로 읽힌다. 복수다. 거리에서 몸을 파는 뚱땡이 친구가, ‘여자들끼리는 뭐든 할 수 있다’는 말, 동선이 비슷한 여인네들만의 연대, 거슬린다. 거기다 여자들끼리의 키스는 쪽쪽 소리 나게 하고 남자들과는 너무 데면데면 한 것, 쉽지 않은가. 반면 짐승 파코는 가족 하나 없고 그가 사라져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스페인이 이렇게 허술한가. 과연 세상이 그렇게 남잔 남자대로 여잔 여자대로 살아지던가. 아니다. 이 스페인 남자 감독은 ‘한(더러)’ 못된 ‘남자의 추악한 욕망’을 ‘인간의 추악한 욕망’으로 그리지 않고, 한편으론 태우고 한편으론 얼리면서 죄를 묻고(問) 또 묻는다(葬). 과연 귀향이라 말할 수 있나?        포르투칼 출신 작가 마르케스의『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근친상간을 범한 주인공이 하늘로 승천하는데, 여기 같은 범죄를 저지른 스페인 남자들은 죽어나간다(성폭행이니까). 죽었다고 믿어지던 엄마는 러시아 사람으로 유령처럼 살아있고, 살아 있다고 믿는 파코는 승천 못하고 냉장고에 죽어 있는 상태. 거기다 살인자가 도둑년(도둑질 하지도 않은)을 욕하는 아이러니도 귀여운 배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반복되는 그의 부감샷은 주인공을 관객의 시선 아래로 내려놓는다. 이 정도면 잘 짜여진 스토리에 완벽한 콘틴데. 여인들의 비밀스럽고 끔찍한 장면들 사이사이 스크린 속 공들인 회화적 장면에서 비둘기 피보다 더 붉은 의상과 소품들은 이 나라가 고야와 벨라스케스 그리고 피카소의 나라란 걸 상기하게 해주고. 엄마가 불러주신 노래와 방귀 냄새 그리고 도너츠의 맛 등 기억 속에 채곡채곡 끼워 있던 것을 꺼내는 작업 또한 선수의 솜씨다. <귀향>의 작은 새들은 학대받고 성적으로 착취당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런 죄를 저지른 짐승에 대한 벌은 누가 집행하는가. 작은 새도 상처받으면 대담해지듯, 어머니가 하고 아내가 한다. 아, 아내를 배신한 남자들의 서글픈 운명이라니. 한 때 고향 강가에서 파코는 라이문다를 달이 지도록 사랑했으리. 그러나 이 생산의 여신(부감으로 잡은 가슴을 보라)을 사랑했을 게으름뱅이 남편은 담요에 덮여 냉장고에서 얼음이 되고 만다. 죽어서도 냉장고 안에 자는 그는 영원히 썩지 못하고 강물 소리를 듣지 못할진댄 그것이 제목처럼 과연 <귀향>일까? 바람과 육체와 혼이 냉장고 밖을 나가지 못하는데 말이다. 크루즈가 딸을 데리고 와서 울지만, 강물은 흘러가 버렸다. 가우디의 나라 작가는 그 나라의 창이다. 스페인에서 제법 알려진 홍상수와 김기덕을 통해 한국을 본다면 우리는 알모도바르 또 루이 부뉴엘을 통해 스페인을 본다. 스페인의 산과 강이 키운 언어의 표정 알모도바르는 이제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선 심장이며 메인. 그리고 그의 <귀향>은 심장에 남는 영화일 것. 그러나 이 잘못된 욕망에 대한 복수극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일일 것이나 과연 그것이 어머니로 살아가는 초상의 대표성을 띨 수 있을까? 진정한 예술은 페미니즘을 넘어서는 것. 이창동의 <오아시스>와 <박하사탕>이 텍스트의 해석에서 거의 한 목소리만 나오는 것처럼, 메인이 만드는 마이너리티 이야기는 미안하지만 한발도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돈 주앙부터 피카소까지 세상 남자들 아직 그 모양이다. 이런 세상에서 여자들만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참혹극이 평가받는 것은 우울한 일. 산불을 내고 냉장고에 감추는 것이 고통 받는 여성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여성은 그리 약하지 않으니 조심하라고, 그렇게라도 연대를 해야 할 만큼 처절하다고? 여성의 연대라, 물론 약한 자 연대해야 한다. 그러나 연대도 연대지만 악착같이 이해시키고 치밀하게 대비하고, 그래도 안 되면 안 된다면 슬픔에 지든가 익숙해지든가. “세상일이란 항상 못 다한 일이 있단다.” 라이문다의 엄마가 딸에게 한 말인데, 천하의  알모도바르도 어떻게 다 못한다는 말은 아닐는지. 어쩌겠는가. 치밀한 복수가 내 것이 못된다면, 이해 안 되는 저편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자기부정 그 뒤에는 침묵해야 하지 않을까. 아으, 삶이란 뻔히 구멍 난 양탄자거늘…….   억압받는 여성을 통해 지나온 삶과 강고한 세상에 복수하는 알모도바르. 그만이 스페인의 창이랴. 20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짓고 있다는 ‘성 가족성당’의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사람. 오래 참는, 기다리는 나라 스페인, 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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